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23
주작성 내 5성 수련국인 조나라 합환종(合歡宗) 뒷산 동굴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좌선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합환종의 내문 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곳으로 다른 곳보다 영력이 훨씬 짙었다.
한데 그때, 동굴 밖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 사매, 약속 잊지 마. 내가 그 동굴을 한 달간 양보해주는 대가로 사매는 사흘 동안 내 짝이 되어야 하는 거야! 나흘 후면 한 달인 거 알고 있지? 헤헤!”
경박한 목소리는 더 경박한 웃음소리를 남기며 점차 멀어져갔다.
동굴 안의 여인은 두 눈을 번쩍 뜨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합환종의 외래 제자인 그녀는 응기기의 9단계로 돌파하기를 원했으나, 외부는 영기가 너무 부족했다. 오직 이 동굴 안에서 수련을 해야만 9단계로 돌파할 수 있었다.
‘1천 년 전, 우리 가문의 장호 선조님은 대산파의 제자가 되셨지 허나 대산파가 사라질 줄이야… 이제 고작 합환종의 외래 제자가 되는 게 최선이라니.’
그녀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며 좌선을 이어가던 중 돌연 눈을 번쩍 떴다. 놀란 그녀의 눈이 향한 곳에는 어느새 백의의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평범한 외모였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질이 느껴지는 청년이었다.
백의의 청년, 한제는 덤덤하게 여인을 바라보다가 저물대에서 영석과 선옥 그리고 비검 한 자루를 꺼냈다.
“난 네 선조인 장호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 그 은혜를 오늘에서야 갚는구나.”
여인의 휘둥그레진 눈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한제는 슬픔이 어린 짧은 한숨을 남긴 채 몸을 돌려 떠나갔다. 장호는 이미 죽고 없었지만 한제는 그 여인의 몸에 장호의 피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4성 수련국 화분국(火焚國)의 전신전(戰神殿) 대전에 가부좌를 튼 궁복(宮服) 차림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화신기 후기에 이르러 영변기로 돌파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주위에 놓인 선옥은 다소 부족해 보였다.
그녀 앞에는 한 청년이 앉았다. 역시 화신기 후기의 청년으로 무척 젊어 보였지만 노련한 기운이 흘렀다.
그는 여인을 바라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 사매, 남은 선옥이 얼마 되지 않아 우리가 동시에 흡수하기는 힘들 것 같군. 사매가 흡수하도록 해. 사매가 영변기에 들어선다면 우리 화분국도 승급하는 거니까.”
여인은 청년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주 사형, 만약 제가 영변기에 이르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 둘은 짝이⋯⋯.”
한데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째서인지 눈앞의 청년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앞에 앉은 청년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 남은 수명은 많지 않으니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원해서 이리하는 것이야. 게다가 듣기로는 그가 주작성에 돌아왔다더군.”
그때, 대전 안에 어느새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
“장웅, 주자홍, 그간 잘 지냈나?”
다소 슬픔이 깃든 그 목소리에 두 남녀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한제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당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역외 전장에서 그가 준 영액 덕분이었다.
“이한제!”
한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웃더니 저물대에서 대량의 선옥을 꺼내놓았다. 선옥은 대전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게 되다니, 축하하네. 이 선옥은 이 이한제의 선물일세.”
한제는 포권을 하며 진심으로 두 사람을 축하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단약 몇 개를 더 꺼내놓은 뒤 떠나갔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사라진 한제와 그 자리에 남은 선옥 그리고 단약들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거마족(巨魔族) 수명은 수련자들과 다르기 때문인지 족장인 치호의 얼굴 역시 예전과 달라진 바가 없었으나 노련한 기운은 한층 더했다.
또한 그는 어느새 영변기 후기에 이르러 이제 문정기까지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 상태로도 그는 강력한 육신과 천부적인 신통력을 통해 문정기 수준 수련자들과도 거뜬히 싸워낼 수 있었다.
지난 수백 년간 치호는 갈수록 안정을 찾아갔고 주작성에서의 지위도 제법 높았다. 거마족이 주작성에서 차지한 위치도 상당했다.
허나 그는 옛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한제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거마족의 족장인 그 역시 당연히 알고 있었다.
가부좌를 튼 채 호흡하던 치호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그 앞에는 한제가 편안한 모습으로 희미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서 있었다.
“치호 형, 오랜만이군.”
“천우! 하하하! 이게 대체 얼마 만인가?”
치호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서며 호탕하게 웃었으나, 이내 표정이 씁쓸하게 변하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거마족을 위해서였다고는 하나, 어쨌든 자신은 친구인 한제를 배신했던 것이다.
“그 일은 잊게.”
치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한제는 피식 웃더니 저물대에서 대량의 선옥을 꺼냈다. 선옥은 치호의 사방에 작은 언덕을 이루며 쌓였다. 한제는 저물대에서 뇌길의 피로 가득 찬 병까지 꺼내놓았다.
“이 정도 선옥이면 문정기에 이르는 데 부족하지 않을 걸세. 그리고 이 병에는 거마족 선조의 피가 들어 있으니 자네의 천부적인 신통력이 더욱 위력을 갖게 될 거야.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또 보세!”
한제는 다소 아쉬운 듯한 얼굴로 짧은 인사를 남기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제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던 치호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
★ ★ ★
수마해(修魔海) 안, 뼈로 가득 찬 곳에는 노련한 기운을 풍기는 노인 하나가 가부좌를 튼 채 호흡을 하고 있었다.
화신기 후기에 이른 노인이 호흡을 하는 동안 대량의 음산한 기운이 체내로 흡수되었고 그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얼굴에서는 푸른 정맥이 울툭불툭 튀어나왔으며, 그물 형태의 검은 문양도 떠올랐다. 허나 이 문양은 노인이 끊임없이 음산한 기운을 흡수하자 점차 억눌려졌다.
한참 뒤에 긴 한숨을 내뱉은 그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로 눈을 떴다. 무척 피로해 보이는 그의 두 눈에는 짙은 원한이 담겨 있었다.
“적혈 선조, 이 이기경은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한데 그때, 수마해의 마수들 몇 마리가 노인의 존재를 눈치 챘는지 맹렬하게 돌진해왔다.
허나 피비린내 나는 바람을 훅 끼치면서 달려들던 마수들은 노인에게서 1천 척쯤 떨어진 곳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남색 원에 충돌하더니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캬아아!”
마수들의 몸은 빠르게 오그라들었고 그러자 노인은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더니 순식간에 그중 한 마리 마수 곁으로 날아갔다. 이어서 그는 마수 위에 올라타더니 그 목덜미를 맹렬히 물어뜯었다.
“캬오오오!”
목덜미를 물어뜯긴 마수는 비명을 내지르며 더욱 빠르게 수축하더니 순식간에 한 구의 목내이가 되었다. 노인은 곧장 다른 마수에게 달려들었고 같은 일이 반복됐다.
모든 마수가 바짝 마른 시체로 변한 후에야 노인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좀 전까지 가부좌를 틀고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의 두 눈에는 여전히 짙은 한이 번득였다.
“적혈 선조, 네가 그때 내 여동생을 뒤쫓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어찌 이한제를 만났겠느냐?”
이기경은 모완의 오라버니로 당시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적혈 선조는 당시 모완을 뒤쫓았던 수련자로 이기경은 그에게 짙은 원한을 가진 상태였다.
그는 면밀한 조사 끝에 적혈 선조가 지금 수마해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잠복 중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의 수준은 적혈 선조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혈문(血紋)에 영향을 받은 터라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혈문이 한 번씩 폭발할 때마다 적혈 선조가 자신의 위치를 알아차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기경은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한데 그때, 이기경은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섰다. 그는 바짝 졸아든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수십 척 떨어진 곳에 어느새 한제가 나타나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한제는 노인이 된 이기경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기경은 한제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몸을 부르르 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너는 누구냐!”
아주 오래 전이긴 하지만 직접 본 적이 있고 지난 수백 년간 조각상으로도 봐온 한제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믿기 힘들었을 뿐이다.
한제는 말없이 저물대를 두드려 피천관(避天棺)을 꺼냈다. 모완은 그 안에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기경은 동생을 발견하고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 순간, 그의 눈에는 오직 그 관 안의 동생만이 들어왔다. 수백 년간 만나지 못한 유일한 가족⋯⋯.
“모… 모완아⋯⋯.”
두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기경의 눈에 가득했던 깊은 원한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를 짙은 애정이 대신하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너를 잘 돌보라고 하셨는데… 정말 미안하구나.”
이기경은 슬픔 가득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한제는 말없이 그런 이기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인과를 정리하다 (3)
한참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기경은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마음으로 말없이 모완을 바라보았다.
한데 그때, 저 멀리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번득이는 세 갈래 검광이 나타났다.
선두의 붉은 검광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는데 영변기 후기 수준에 해당하는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두 중년 사내가 그 노인을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기경, 오늘로 네놈의 그 질긴 목숨도 끝이다!”
노인은 버럭 호통을 치며 맹렬히 다가왔다. 한데 그러던 중 피천관을 발견하고는 흠칫하더니 멈춰 섰다.
“저 관은 대체 무엇이기에 저토록 짙은 선기가 배어 나온단 말인가!”
크게 감탄한 노인의 두 눈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허나 그 곁에 선 한제에게 시선이 닿은 순간, 노인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어딘가 낯이 익은 자였으나 선뜻 생각이 나지는 않았다.
한제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노인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 순간, 노인은 심신이 뒤흔들렸고 그를 받치고 있던 검광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