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27
“일전에 요령의 땅에서 그림을 하나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그림에 선배님이 그려져 있었지요.”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장문인이라고 해서는 안 되지. 나천성역의 그 훌륭한 정뇌선(正雷仙) 허목을 내가 언제 제자로 두었단 말이냐?”
한제는 심장이 덜컥했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제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입니다.”
노인은 어째서인지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한제를 보았다. 최소한, 한제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방금 너는 큰일을 저지를 뻔했다! 열여덟 번째 층은 네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심지어 곁에 선유족 사람까지 있지 않았더냐. 만약 그가 본원을 취한다면 이 주작성은 물론 연맹성역 전체에 커다란 재난이 일어날 것이다!”
한제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공손한 표정으로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척했다.
“이한제, 네게 묻겠다. 진심으로 나를 과거의 대산파 장문인이라 여기느냐? 진심으로 너 스스로를 과거의 그 대산파 제자라고 생각하느냐?”
한제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대산파에 대한 감정은 복잡했다. 어찌됐든 대산파는 그가 처음 수련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문파였다.
“대산파는 제 첫 번째 문파입니다. 주작성은 제 고향이고요.”
“흠.”
노인은 한제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뇌선전의 정뇌선이라는 그 지위는 어찌된 것이냐?”
그 천둥 같은 목소리에서는 은은한 분노가 느껴졌다.
“시간과 상황의 압박으로 그리된 것뿐입니다!”
한제는 흔들림 없이 맑고 또렷한 눈으로 노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노인은 한제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듯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다가 약간 누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난 네가 나천성역에서 무슨 지위를 갖고 있든, 얼마나 많은 문파에 소속되어 있든 상관치 않는다. 허나 네가 연맹성역 수련자이기 전에 주작성 사람이라는 것만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넌 네 개의 성종(聖宗)에서 주작의 제자다! 이 점만 잊지 않는다면 난 영원한 너의 장문인이 될 것이다!”
한제는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나천성역과의 전쟁은 우리 4성종과는 무관한 일이야!”
노인은 심드렁한 말투로 내뱉더니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네 수준에 내 도움이 더해진다면 열여덟 번째 층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슨 조화를 만들어내느냐는 네 운에 달린 일이지!”
그러더니 노인은 한제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소매를 크게 휘둘렀다. 순간 한제는 엄청난 힘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허나 그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여전히 공손한 표정으로 가만히 기다렸다.
그때, 노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사방에서 뜨거운 열기가 나타났고 노인의 발아래 지면에서는 용암이 들끓는 듯했다. 그 안에서 검은 화염이 솟아오르면서 노인을 감쌌다.
잠시 후, 노인은 한제와 함께 사라져 이 열일곱 번째 층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제는 뜨거운 기운이 훅 끼쳐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열기에는 본원의 힘이 어려 있어, 한제는 더욱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굴기로 결심했다.
잠시 후, 한제가 나타난 곳은 1천 척 넓이의 밀실이었다.
사방은 어두웠다. 오직 중앙에만 미약한 불덩어리 하나가 꺼질 듯 말 듯 일렁였다. 그림자가 춤을 추며 음산함을 더했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귀신이 불덩어리 주위를 맴돌며 다가서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떠나다
“여기가 열여덟 번째 층이다. 저 불꽃은 이 문양 부족 본원의 힘이다. 깨달음을 얻을 것인지는 네 운에 달려 있는 것이니 한번 잘해 보거라.”
노인의 말에 한제는 말없이 불꽃을 바라보았다.
한데 시선이 불꽃에 닿은 순간, 심신이 바르르 떨려왔다. 그 불꽃에서 기이한 힘이 튀어나와 곧장 심신으로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그 불덩어리에서는 삶에 대한 갈망, 힘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 심지어 한 줄기 피비린내 어린 기운도 느껴졌다.
순간, 불꽃이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제는 머릿속에 쾅 하는 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고 그 순간 대량의 정보가 미친 듯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너무나 많고 혼잡한 정보가 머리를 쪼갤 듯 닥쳐왔다. 한제의 두 눈은 기이하게 변해 왼쪽 눈은 해를 오른쪽 눈은 달을 품었다.
그때, 인과의 도가 곧장 체내를 뒤덮고 머릿속에서 그 도안이 회전했다. 그러자 잡념들이 사라지고 결국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장면이 펼쳐졌다.
한편, 옆에서 이를 지켜보낸 노인은 감탄한 눈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정도의 본원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데 성공하다니, 훌륭하군. 조금 더 관찰한 뒤에는 이 녀석을 주작의 서열로 들일 수 있겠어!”
그 무렵, 한제는 광활한 우주에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각양각색의 법보를 타고 있는 수많은 선인들이었는데 저 멀리에는 수십, 수백, 심지어 수천 개에 달하는 노란 부적이 있었다.
각 부적 위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한데 그들의 복장은 수련자와 흡사했으나 미간에는 선유족의 식물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그 잎의 수는 서로 달랐으나 모두 번득이고 있었다.
그들은 한창 전쟁 중이었다.
수많은 선술이 발휘되었는데 문양이 그려진 이들은 특히 변화막측한 신통술을 발휘했다.
문양을 위주로 공격을 하는 그들은 세상을 봉인하고 세상의 원력을 진동하게 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이가 수천 척에 달하는 거대한 부적을 탄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의 미간에는 금색 잎이 하나 달린 식물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노인이 양팔을 옆으로 펼친 채 달려드는 순간, 온 우주가 진동했다. 선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부지불식간에 자신들의 온몸을 뒤덮은 문양에 선원을 잃고 말았다.
그때, 저 멀리에서 한 줄기 검은 빛이 번득이며 다가왔다. 그 빛 안에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흐릿하여 용모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달려들며 거대한 부적 위의 노인과 교전했다.
검은 빛에 휩싸인 사람이 오른손 두 손가락으로 노인의 미간을 두드렸다. 그러자 생기가 가득한 불덩어리가 그의 손가락을 따라 끌려 나왔다.
이어서 검은 빛에 휩싸인 사람이 그 불덩어리를 꽉 쥐자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불꽃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한데 그 불꽃 중 하나가 한제에게로 돌진하더니 미간에 찍혔다.
‘큭!’
한제는 이마로부터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몸을 바르르 떨었고 엄청난 힘에 끊임없이 뒤로 밀려났다. 그러는 동안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쾅 하는 소리가 울렸고 그 순간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뜨며 정신을 차렸다.
한제는 말없이 눈앞의 불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저 불덩어리는 방금 전 환상 속 노인의 미간에서 끌려나온 그 불덩어리와 똑같은 것임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좀 전에 본 광경은 꿈과 같았지만 미간에 느껴졌던 작열감은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할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한제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문질렀지만 미간에는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이때, 거대한 바위 하나가 연맹성역 서쪽 구역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그 위에는 적의(赤衣)를 입은 한 사내가 서 있었는데 그는 싸늘하고 무정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나천성역의 정뇌선 허목. 약해빠지지 않았기를 바란다.”
“훌륭하군!”
밀실 안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렁이는 파문 안에서 걸어 나온 노인은 한제를 특히 그의 미간을 자세히 살피며 덤덤하게 말했다.
“봤느냐?”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어떤 장면들을 보았습니다.”
노인은 빙그레 웃더니 오른손을 들어 그 불덩어리를 움켜쥐었다. 불덩어리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을 발했다.
“이것은 이 문양 부족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금엽(金葉) 부족원의 본원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본원의 힘을 깨달았다면 네 수준에 막대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4성종(聖宗) 내 우리 주작 일맥의 내문 제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험이기도 하지. 이것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면 내문 제자가 될 수 있다. 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해라!”
말을 마친 노인은 그 불덩어리에서 힘을 흡수한 듯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원래 상태로 돌아온 그는 손을 풀고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한제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제를 보내고 혼자 남은 노인은 기이한 눈빛으로 발아래를 주시하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있는 한 누구도 주작성을 감히 건드릴 수 없다! 문양 부족, 이 마지막 층은 반드시 내가 열 것이다!”
한제는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모습으로 주작성 어느 높은 산꼭대기에서 나타나 멀리 떨어진 선유족 구덩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저 노인의 수준은 매우 높군. 어쩌면 염뇌자보다 더 강할지도 몰라… 저런 사람이 주작성에 머무는 목적이 대체 무엇일까? 그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분명한 건 선유족의 마지막 두 개 층이 그 목적 중 하나일 것이다. 저자가 고신의 땅이 어딘지 알지도 모르겠군.”
한제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몸을 훌쩍 날려 빠르게 이동했다.
“그는 분명 4성종 내의 주작 중 한 명이라고 했다. 그전에 했던 말도 의미심장했는데⋯⋯. 일단 이 일은 여기까지만 생각하자. 일단은 떠나야 해.”
생각을 정한 한제는 신식을 펼쳐 타산 등을 찾아내 그들에게 명을 내렸다.
한제는 자신이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은 탁삼이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침묵하던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빠르게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주작성 내의 어딘가에서 타산과 소년, 그리고 뇌길도 날아올랐다.
★ ★ ★
어느 높은 산봉우리에 선 주무태는 씁쓸한 얼굴로 먼 하늘 끄트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뒤에야 한숨을 푹 내쉬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같은 시각 수마해 밖의 화분국(火焚國) 변경, 이기경은 고개를 들어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모완아. 저자를 따르는 것이 너의 선택이라면 이 오라비는 너를 위해 복을 빌어줄 것이다.”
운천종, 좌선 중이던 철암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한제가 이번에 떠나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주작성 밖 우주에서 모이자마자 타산은 한제의 그림자에 녹아들었고 어느 정도 상태가 회복된 듯한 머리 큰 소년은 공손하게 한쪽에 섰다.
뇌길은 한제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키가 1천 척에 달하는 거인이 되어 흘러넘칠 듯한 위엄을 가득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