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56
더 이상 한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대한 초승달 허상뿐이었고 그 허상은 잔뜩 흥분한 표정의 노인 뒤쪽으로 질주해 번득이는 그물이 맞물려 닫히기 전에 빠져나가려 했다.
“왕족 고신을 삼키면 난 장존회에 들 수준에 이르게 될 거야! 크하하하!”
노인 긴 웃음에는 희열이 느껴졌다.
그는 왕족 고신을 흡수한 뒤 장존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신을 상상하며 그물 쪽으로 다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초승달 허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노인의 표정은 희열에서 경악으로 급격히 바뀌어갔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행복한 상상 역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천역주(天逆珠)
한제를 집어삼켰던 초승달 허상 안에서 광기 어린 기운이 폭발했다. 이 기운은 너무나 짙어서 초승달 허상이 격렬하게 진동하더니 그물 근처에 이른 순간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무너져 내려버렸다. 초승달 허상은 갈기갈기 찢겨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순간, 노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미간에서는 펑, 펑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한 움큼 피를 토해내더니 두려움에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말도 안 돼!”
그의 미간에 새겨진 초승달 형태의 흔적은 중간에서부터 갈라져 하나에서 둘로 나뉘었고 노인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의 곁에 있던 흑의의 청년은 멍하니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내 그물 안쪽에서 터져나간 초승달 허상에서 한제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미간에서는 다섯 개의 반점이 느릿하게 회전하고 있었고 5성급 왕족 고신의 힘을 사방으로 풍겼다.
하지만 그 힘은 초승달 모양의 문양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도 노인에게 심각한 중상을 입히지도 못했다.
그때, 한제의 미간에서 흑백의 구슬 하나가 떠올랐다.
‘천역주!’
방금 초승달 허상에 삼켜졌을 때 한제 체내의 천역주가 저절로 활성화되더니 그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그 순간 기이한 힘 한 줄기를 발산했다. 이에 한제를 집어삼켰던 초승달 허상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또한, 천역주에서 맴돌던 흑백의 기운 두 갈래가 번득이는 그물을 뚫고 곧장 그 노인에게로 쏘아졌다.
“크아악!”
노인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고 짙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그 구슬을 알아본 듯 와들와들 떨며 한제를 올려다보았다.
“너, 너는⋯⋯?”
노인은 곧장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흑백의 기운이 곧장 그물 형태의 봉인진을 꿰뚫고 그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곧장 부풀어 오르더니 엄청난 속도로 노인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놀랍게도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순간이동도 축지성촌도 천역주에서 발산된 흑백의 기운 앞에는 모두 효력을 잃었다.
노인은 바르르 떨었다. 쿵쾅, 쿵쾅! 요란한 심장 소리만이 귓속을 가득 메웠다.
흑백의 기운이 노인 주위를 맴돌면서 회오리를 하나 만들어냈고 이내 그 안에서 손 하나가 뻗어 나와 노인의 미간을 향해 뭔가를 불러내는 듯한 손짓을 했다.
“끄아악! 크아아아!”
그 순간, 노인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경련을 일으키며 비명을 질러댔고 그의 미간에서는 갈라진 초승달 흔적이 튀어나왔다.
몸과 줄기줄기 핏줄로 연결된 그것이 튀어나간 순간, 노인의 온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 솟았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 정맥이 울툭불툭 불거졌다.
“봉계(封界)의 지존이시여, 제발 살려주십시오!”
노인은 소리를 지르며 절망감 어린 눈빛으로 그물 너머의 한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 충격을 받기는 한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상황을 통제할 수도 천역주의 행위를 저지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애원을 해도 아무 변화가 없자 노인은 비참하게 웃었고 초승달 모양의 흔적은 그의 미간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수많은 핏줄을 줄줄 매단 채 회오리에서 나타난 손으로 떨어졌다.
노인의 미간에서는 피 안개가 뿜어져 나왔고 그의 기세는 완전히 꺾여버렸다. 두 눈에서는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육신은 끈 떨어진 연처럼 훌훌 나가떨어졌다.
흑의의 청년 또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는 감히 한제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 와중에도 청년은 몸을 날려 노인을 끌어안았다.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빨리 도망쳐!”
청년은 두 말 않고 노인을 끌어안고 질주했다.
그 무렵, 회오리가 사라지면서 서서히 흑백의 기운으로 돌아왔고 완전히 맞물린 그물을 관통하여 천역주 안으로 스며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천역주는 천천히 한제를 향해 다가와 눈앞에 우뚝 멈췄다.
사방에서 번득이는 그물은 느릿하게 허무의 공간으로 뒤덮이며 점차 모습을 감춰갔다. 끝없는 어둠으로 가득한 이곳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망월과 라진은 번득이는 그물 밖에 있었고 허무의 공간이 퍼져나감에 따라 영원히 사라지게 됐다.
청수는 이 모든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의 선원(仙元)은 이곳에 존재하는 기이한 힘에 의해 대부분 봉인되어 있었다.
한제를 보던 그의 눈이 점차 또렷한 빛을 찾아갔다.
한편, 한제 또한 천역주가 일으킨 변화에 백발노인 못지않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특히 천역주가 처음으로 열렸을 당시 회오리에서 나타났던 손을 떠올리며 한제는 멍하니 천역주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신중하게 한손을 들어 천역주를 만졌다. 그러자 천역주는 그의 손으로 녹아들더니 다시 체내의 원신에 스며들며 이내 사라졌다.
“원고 시대, 스스로 세상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있었지. 그들은 선인이 되어 선역(仙域)을 만들었어. 원고 시대의 선역은 우리 선계의 성지이자 진정한 선계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는 청수의 눈에는 슬픈 빛이 드러났다.
“선존(仙尊) 백범이 바로 선역에서 내려와 만민을 교화시켜준 원고 시대의 사람이었어. 그런 선존께서 말씀하시길, 원고 시대 선역은 우주 만물을 수호한다고 하셨다. 선역이 있어야 하늘도 땅도 존재하며, 선역이 멸하면 만물의 영혼이 파괴될 것이라고⋯⋯. 원고 시대의 선역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야.”
청수의 목소리는 침잠되어갔다.
“허나 그날, 동서남북에서 원고 시대의 선역을 받치고 있던 참천거목이 무너져 내렸고 원고 시대 선역은 사라져 어떤 종적도 남기지 않았다. 선존께서도 평생 찾아다니셨으나 끝내 원고 시대 선역의 흔적은 찾지 못하셨지. 이로 인해 원고 시대는 끝났고 상고 시대가 도래했다. 이후 세상은 혼란스러워졌다. 선역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선인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 후 연기사(煉氣士)들이 나타났고 그중 하나였던 이 청수도 당시 청수국(淸水國)의 왕으로 군림했지.”
그의 목소리는 이제 안타까움으로 물들어갔다.
“선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선존 백범과 같이 일찍이 선역의 존재였던 분들은 당시의 선역과 이어지는 네 개의 통로를 만들고 또 다른 세상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을 선계라 칭하셨지. 풍(風), 우(雨), 뇌(雷), 전(電) 네 선계는 이 우주를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다. 풍계 아래에는 운해(雲海)가 우계 아래에는 곤허(昆虛)가 뇌계 아래에는 나천(羅天)이, 전계 아래에는 소하(召河)가 자리했지. 그중 곤허 성역은 후에 연맹성역으로불리게 됐으니, 일찍이 이곳이 곤허라 불렸다는 사실을 아는 이 또 누가 있을까?”
청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허무의 공간을 바라보았다. 당시의 뇌의 선계를 바라보듯, 그의 눈은 기억으로 잠겨드는 듯했다.
“그리고 뇌의 선계에서… 나는 그녀를 만났다.”
그 무렵, 한제의 몸이 점차 줄어들며 펑, 펑 하는 소리가 체내에서 울려 퍼지더니 이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허나 그의 미간에서는 다섯 개의 반점이 느릿하게 회전하면서 서늘하고 날카로운 고신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의 본체는 5성급 고신의 힘을 갖게 됐다. 그리고 5성급 왕족 고신의 신통력을 발휘한다면 정열기(淨涅期) 초기 수준 수련자와도 맞붙을 수 있다.
이제 그는 진정한 강자의 반열에 선 것이다. 특히 원력을 압박하는 힘에서 벗어난다면 정열기 초기 수련자 중 그가 이기지 못할 자는 몇 안 될 터였다.
주먹을 바르쥔 한제는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없이 청수를 바라보았다.
청수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이내 고통으로 물들었다.
그는 자각을 잃고 사랑하는 여인까지 제 손으로 죽였던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그 고통은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린 채 끊임없이 그를 집어삼켰다.
“상고 시대는 우리 선인들이 가장 전성기를 누렸던 때였지. 난 그 전성기가 오래가지 않았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 물건 하나 때문에 4대 선계에는 엄청난 전쟁이 벌어졌으니까!”
청수의 눈에 드러난 고통의 빛은 점차 갈무리됐다. 이는 그가 매일 밤 홀로 마주하는, 형용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고통이었다.
“그 전쟁은 오랜 세월 이어졌고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4대 선계가 무수한 조각으로 부서졌다. 그리고 그 전쟁이 절정에 이른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났지. 선존 백범은 그가 원고 시대 선역과 함께 사라졌던 자라고 했다. 그자가 등장하면서 전쟁은 중지됐고 우리는 그가 가져온 원고 시대 선역의 명에 따라 장벽을 쌓아 4대 선계를 분리했지. 그리고 그자는 그 장벽이 다시 열린다면 원고 시대 선역은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것이라 했어!”
한제는 청수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허나 그 전쟁의 근원,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탐욕을 느끼게 만들었던 그 물건이 대체 뭔지 난 알지 못한다. 그저 그것이 하나의 구슬이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청수의 말에 한제는 비록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으나 심신은 바르르 떨려왔다.
“내가 그 구슬을 손에 넣는다면 아주 은밀하게 보관하고 절대 다른 자들 앞에서 꺼내지 않았을 거야.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될 테니까.”
청수는 혼잣말을 이어가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4대 선계의 전쟁은 수많은 선인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풍우뇌전 모든 선계를 허약하게 만들었어. 한데 바로 그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스스로를 부문족(符文族)이라 칭하는 괴인들이 4대 선계 아래에 자리한 구역에 나타났다. 이들의 신통력은 선인들의 신통력과는 전혀 달랐다. 선인들은 천도를 수련하지 않고 그저 선원만 수련했으니 하늘의 힘에 거역할 줄도 그것을 사용할 줄도 몰랐어. 허나 부문족은 법보와 비슷한 부적을 이용해 신통력을 발휘했다.”
한제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말없이 귀를 기울였고 청수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 전쟁 역시 격렬했으나, 결국 선인이 승리를 거두고 부문족을 흩어놓았지. 또한 그들 대부분을 노예로 삼기도 했어. 허나 4대 선계는 더욱 심각하게 손상됐지. 그 후 조사해본 결과 부문족이 우주 아래 허무의 공간, 바로 이곳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청수는 자신의 발아래를 가리켰다.
한제는 찬 숨을 들이마셨다. 선유족과 몇 차례 접촉해왔으나 그들이 바로 이 허무의 공간에서 왔을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그는 좀 전의 그 노인과 청년을 떠올리며 퍼뜩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이 허무의 공간은 연맹성역에만 있는 게 아니야. 4대 선계 아래 자리한 모든 성역에 존재하지.”
청수는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부문족과의 전쟁 이후 나의 발작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허나 당시 나는 그 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 그 후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너도 염뇌자에게 들었으니 알고 있겠지.”
한제는 한참동안 말없이 청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형, 좀 전에 그 노인이 말했지요. 자신은 태고의 선족(仙族)인 월서족(月噬族)이라고⋯⋯.”
청수는 흐릿한 눈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 역시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태고의 선족이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노인과 같은 곳에서 온 부문족도 태고의 선족이었던 것인가.”
청수의 눈에 드리운 의혹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
“나는 어째서 그 일곱 빛깔 안개가 나타난 그때 환각을 보게 됐는지 그게 이상하구나. 난 당시 하늘을 가리키며 죽어갔던 스승님을 보았다. 스승님은 대체 무얼 보셨던 것일까?”
한제도 고민에 빠졌다.
온갖 수수께끼가 사방에 놓여 있었다. 허나 짙은 연기에 휩싸여 진실은 보이지 않았다. 허무의 공간, 한제와 청수는 침묵에 빠졌다.
청수 체내의 선원은 결국 완전히 봉인이 되어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고 셋째 날이 됐을 때에는 비행 능력까지 잃게 됐다.
한제는 청수를 부축해 끝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곁에서는 염뇌자에게서 받은 선계의 조각이 천천히 부유하며 부드러운 빛을 발했다. 또한 그 조각은 기이한 힘으로 외부와 소통하고 있는 듯 길 안내까지 해주었다.
선계의 조각을 따라 이동한 지 아홉째 날이 됐을 때, 한제는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청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기억을 빼낸 현보 상인의 원신을 드리겠습니다. 그 원신에는 선원이 깃들어 있으니 사형께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네 성격은 당시의 나와 참 닮았구나. 나보다는 너를 더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거라. 나는 이미 그런 배려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