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57
청수는 마치 당시의 자신을 보듯 눈앞의 한제를 바라보았다.
같은 냉정함, 같은 잔혹함, 같은 외로움…
그때, 앞장서 가던 선계의 조각이 돌연 금빛을 발산하며 우뚝 멈춰 섰고 전방에는 금빛으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하나 나타났다.
회오리 안에는 제단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수많은 수련자가 가부좌를 튼 채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들 틈에서 염뇌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행화촌(杏花村)을 가리키는 목동
광활한 우주에서는 성운(星雲)들이 반짝였다. 멀리서 보면 이 성운들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육안으로 눈치챌 수 없는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각 성운의 모양은 달랐으나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이날, 이 성운 안을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으나 그 빛이 스쳐 지나갈 때 성운은 그것을 피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한데 놀랍게도 그 빛의 주인공은 성라반(星羅盤) 같은 법보도 사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청의의 이 사람은 약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였고 외모는 평범했다. 굳이 특징을 찾자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풍긴다는 것뿐이었다.
마치 수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듯한 그는 바로 한제였다.
나흘 전, 그와 청수는 염뇌자의 도움으로 허무의 공간으로부터 빠져나왔다.
허무의 공간에 관련한 일과 일목자나 무동선, 망월의 행방에 대해서도 자세히 털어놓지 않았다.
염뇌자 역시 그에게 많은 것을 묻지 않았고 그저 망월에 대한 이야기에 미간을 살짝 구겼을 뿐이다.
한제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사적인 볼일이 있다며 떠나왔다.
염뇌자는 말없이 바라볼 뿐, 그를 붙잡지는 않았다. 그의 수준으로는 고신의 육신을 가진 한제를 꿰뚫어볼 수 없었으나, 상대의 몸에 흐르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운은 매우 약했지만 머지않아 놀랄 만한 수준으로 성장할 것 같았다.
청수는 허무의 공간에서 빠져와 봉인의 힘에서 벗어나면서 차차 수준이 되돌아왔다. 선원(仙元) 역시 정말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공간 안에서 제한된 것에 불과했다.
수준을 회복한 청수 역시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훌쩍 사라졌다.
한제는 청수가 분명 자신을 찾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현보 상인의 원신을 통해 기억을 찾는 것이 청수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니 필히 그럴 것이다.
허무의 공간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한제는 새삼스레 감개무량해졌다. 라진의 일생이나 봉계 밖에서의 파란, 선계의 비밀 등이 그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역시 천역주였다.
‘이 천역주가 수만 년 전 4대 선계의 붕괴를 이끈 엄청난 전쟁의 근원이라니… 당시 4대 선계에서의 전쟁은 분명 이번 두 성역 사이의 전쟁 따위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격렬했겠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성운을 가로지른 한제는 저 멀리 우주를 바라보다가 우뚝 멈춰 섰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파문이 일더니 그 안에서 청수가 걸어 나왔다.
“오셨습니까?”
한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이렇게 꾸며내지 않고 진심으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상대는 무척 드물었다.
“이제 우주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됐구나. 안심이다.”
청수는 대견한 듯 한제를 칭찬하며 다가왔다.
그 순간, 한제는 청수의 몸에서 풍기는 짙은 피비린내 어린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상대의 수준이 나흘 전보다 훨씬 높은 상태로 회복됐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도중에 누군가가 네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연맹성역 수련자들이었는데 숨는 데 재능이 있더군.”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됐을지 한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청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한제는 그가 이곳으로 오는 도중 처리한 연맹성역 수련자의 수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짐작할 수 있었다.
수련자 연맹의 살역계(殺域界)에서는 줄곧 정뇌선(正雷仙) 허목을 찾아내 제거할 계획이었다. 이에 한제가 허무의 공간으로 들어간 이후 그 주위를 감시했다. 그러다가 그중 운이 지극히도 없는 자들이 청수와 맞닥뜨린 것이다. 청수는 그들을 남김없이 죽였고 그 무리를 이끌던 우두머리를 삼켜버렸다.
한제는 저물대에서 현보 상인의 원신을 꺼내 청수에게 건넸다.
청수는 곧장 현보 상인 원신의 정수리를 꾹 누르며 체내의 선원을 가동했다. 순간 현보 상인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비참한 비명을 질러댔고 점차 오그라들었다.
한참 뒤에 청수는 눈을 뜨더니 한 층의 서리가 낀 얼굴로 소매를 휘둘러 현보 상인의 원신을 한제에게로 보냈다.
한제는 말없이 그 원신을 받아들었다. 현보 상인의 원신은 이미 지능을 잃고 선원을 품은 자루에 불과했다.
그 옛날 당당했던 선인이자 천보 상인의 사제였던 그의 추락한 모습을 보자 이 잔혹한 수련계에서는 선인이든 수련자든 까딱하면 이런 비참한 꼴이 될 수밖에 없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가장 강한 자가 되어야만 했다.
한제는 현보 상인의 원신을 저물대에 거둔 후 청수를 바라보았다. 청수는 본래의 침착한 모습을 되찾았으나 눈빛만큼은 다소 서늘하고 사나운 빛이 감돌았다. 현보 상인의 원신을 통해 약간의 단서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사제, 난 수련자 연맹의 살역계에 가서 뭘 좀 가져올 것이다. 함께 가겠느냐?”
청수의 제안에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열흘 정도만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청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열흘 뒤에 다시 찾아오마!”
말을 마친 청수는 곧장 허공으로 한 발 내딛으며 사라졌다. 그 순간, 하늘을 뒤덮을 듯 강렬했던 살기(煞氣) 역시 자취를 감췄다.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청수가 현보 상인의 원신에서 무엇을 찾았는지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 역시 이내 발아래에서 나타난 파문과 함께 사라졌다.
★ ★ ★
연맹성역 북쪽 구역에는 수련성이 하나 있었다. 북쪽 구역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이 수련성은 며칠 전의 전장으로부터도 한참 떨어져 있어 전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고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영력(靈力)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초록빛이 가득해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 개의 작은 부성(副星)이 곁을 맴돌고 있는 이곳은 7급 수련성으로 암월성(暗月星)이라 불렸다.
암월성은 대부분이 숲으로 뒤덮여 있어 많은 일반인 마을이 있었고 이름난 산과 큰 개천 사이에는 적지 않은 수련자 가문도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남쪽 지역에는 천산(天山)이라는 이름의 명산이 있었는데 매우 높아서 정상은 구름에 가려져 있을 정도였다.
작은 돌계단만이 산꼭대기로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데 그 계단도 대부분 구름에 가려져 있어 꼭 선경(仙境)처럼 보였다.
매일 아침, 그 산에서는 종소리가 울렸다. 검은 점처럼 보이는 몇 마리 예쁜 새들이 산을 감싼 구름을 뚫고 그 주위를 맴돌았고 이따금 목청을 높여 종소리와 화음을 이루었다.
이 광경은 그림처럼 우아해 꼭 도원경(桃源境) 같았다.
댕, 댕, 댕⋯⋯.
산꼭대기로부터 울리는 종소리는 구름을 가르며 널리 흩어졌고 종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그 산 아래에는 일반인 마을이 하나 있었다. 1백여 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 사방에는 살구나무가 가득해 바람이 불 때면 살구꽃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그 향기를 맡고 있노라면 절로 마음이 평안해질 정도였다.
아침 종소리는 밤의 추위를 몰아냈고 곧이어 마을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여기저기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광경은 한 폭의 그림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제는 멀리서 묵묵히 이 마을을 바라보았다.
밥 짓는 연기가 살구나무 사이로 흩어지는 광경은 동적이었고 줄지어 자리한 오래된 집들의 모습은 정적이었다. 또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과 한가로이 노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광경에 한제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이 마을을 보면서 자신이 유년기를 보냈던 주작성의 마을을 떠올렸다.
슬픔과 적적함에 젖어 있노라니 어디선가 아이들의 노랫소리와 이른 아침에 잘 어울리는 방울 소리도 뒤따라 들려왔다.
“살구나무에 하얀 꽃 피면 아가씨들은 도사 집안에 시집가지 마세요. 작년에는 둘째 남편이 산으로 올라가고 이듬해에는 첫째 남편이 백골이 됐대요. 아가씨는 울며 죽은 사람을 묻고 그 관을 제 집으로 삼았대요. 살구나무에 하얀 꽃이 피면 아이들을 도사들에게서 숨기세요. 나이를 묻는다면 도에는 연이 없다 하세요. 개는 짖고 고양이는 할퀴어 도사는 집으로 돌아갔대요.”
유치한 동요의 가락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맑은 방울 소리가 가까워진다 싶더니 거친 옷을 입은 채 황소 등에 올라 구불거리는 시골길을 따라 마을로 향하는 한 소년이 나타났다.
황소의 코에 걸린 코뚜레에는 두 개의 방울이 달려 있어 걸을 때마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황소 뒤로 어린 송아지 몇 마리가 따르고 있었다.
여유작작 동요를 부르며 나아가던 목동은 한제 곁에 이르러서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혹시 길을 잃었어요?”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어디지?”
소년은 웃으며 마을을 가리키더니 앳된 목소리로 답했다.
“여기는 행화촌(杏花村)이에요!”
말을 마친 아이는 소를 탄 채 계속해서 마을로 나아갔다. 노랫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한제는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지는 동요에 귀를 기울이다가 불쑥 중얼거렸다.
“암월성 천산 아래의 마을⋯⋯ 여기가 맞을 거야.”
한제의 귀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옛 친구의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내 뼛가루를 연맹성역의 암월성에 데려다줘. 그곳에는 천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산 아래에 마을이 있어. 내 뼛가루를 그곳에 가져다줘.”
행화촌으로부터 몇 리 떨어진 곳에는 봉분 몇 개가 쓸쓸하게 솟아 있었다. 한제는 그 봉분들을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다가 저물대에서 백옥으로 된 작은 병을 하나 꺼내 들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태, 우리 사이의 은원은 이미 끝났어. 자네의 뼛가루를 고향에 가져다주겠다는 그 옛날의 약속을 이제야 지키는군.”
말을 마친 한제의 손에서 백옥병이 둥실 떠올라 멀지 않은 공터에 내려앉아 흙 속으로 스며들더니 그 위로 작은 둔덕과 묘비가 생겨났다.
한제는 엄지와 검지를 펼쳐 허공에 휘두르자 반짝이는 빛과 함께 묘비에는 용과 봉황이 뛰노는 듯한 기세의 필체로 글자가 새겨졌다.
손태의 묘
“우리 같은 수련자들은 눈 깜짝할 새 1백 년, 1천 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가족들을 잃게 되지. 같은 혈통의 사람들이 있다 해도 그들에게서 가족과 같은 느낌을 받기는 어려워. 일단 수련자의 길에 오르면 평생 외로운 삶을 살게 되지. 이 구불구불하고 험한 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 가물가물하고 앞을 바라보면 안개가 자욱하더군.”
한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태의 봉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