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58
“타향에서 죽은 자네의 뼛가루는 내가 고향에 데려다 주었네만 만약 언젠가 이 이한제가 죽거든 누가 내 뼛가루나마 주작성에 가져다줄지 모르겠네.”
한제는 한참이나 말없이 손태의 봉분을 바라보다가 휙 몸을 돌렸다.
“이것 역시 인과로군.”
한제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목동 소년의 노랫가락만이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고 귓가에 맴돌았다.
“살구나무에 하얀 꽃들이 피면⋯⋯.”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일반인들은 선인이 되기를 바라지. 그 길에 오른 이들 중 평안한 삶을 사는 사람이 몇 안 된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거야. 손태처럼 타지에서 죽음을 맞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그 뼛가루조차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는 또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수련자가 된 자신의 아이를 기다리다 죽어 가는지⋯⋯. 일단 이 길을 택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또한 모르는 거야.’
그의 마음속에는 울적함이 더욱 짙어졌다.
‘그 아이의 노래도 수많은 조상들의 슬픔과 고통으로 가사를 엮은 것이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련자들이라면 가슴이 미어질 노래로구나. 아마도 수련자가 되지 말라는 뜻에서 만들어진 노래겠지.’
이내 한제는 허공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다만 그 동요와 그를 통한 깨달음만이 영원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자격
우주에 나타난 한제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짙은 씁쓸함을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었다.
연맹성역의 서쪽 구역과 북쪽 구역 사이는 이미 나천성역 수련자들의 완충지가 되어 있었다. 당시의 전장에서 가장 가까운 수련성 중 하나는 그 전투 아래에서도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았지만 그곳의 영기(靈氣)는 더 이상 풍족하지 않았고 열운자는 그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열운자는 그 수련성 어느 산꼭대기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곁에는 어두운 얼굴의 한 청년이 마찬가지로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청년은 바로 허정이었다.
열운자의 사방에는 열세 개의 붉은 공이 떠 있었다. 당시의 전투에서 사용하고 남은 나부(羅浮)였다.
이 수련성의 몇 안 되는 수련자들은 열운자를 우두머리로 여겼다.
그들은 이곳에 남아 열세 개의 나부와 결합하여 수련자 연맹을 노리는 강력한 최전방 병력이 되었다.
열세 개의 나부에 신식을 녹여 넣자 그 신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폭되었다. 덕분에 열운자는 한참 멀리 떨어진 곳의 작은 동향까지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때, 우주에 나타난 파문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한제가 이 수련성 근처로 다가와 열운자를 찾았다.
한제가 청수에게 열흘의 말미를 달라고 한 첫 번째 이유가 손태의 고향을 찾는 것이었다면 열운자를 만나는 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였다.
당시 허무의 공간에서 돌아왔을 때 한제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열운자였다.
산꼭대기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열운자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 순간, 근처에 있던 열세 개의 나부가 진동했고 뒤이어 그 안에서 열세 개의 붉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 눈동자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쏠려 있었고 흘러넘칠 듯 강력한 위압감이 응집되었다.
열운자는 환하게 웃었다.
“왔구나.”
그는 강력한 수련자답게 한눈에 한제의 변화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 염뇌자만큼 한제를 꿰뚫어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허정은 끓어오르는 살기를 조금도 감추려 하지 않은 채 서늘한 눈으로 한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열세 개의 눈동자가 쏠린 곳에서 나타난 한제는 사방의 강력한 압박감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여유가 넘쳤다. 그는 허정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열운자를 향해 포권을 했다.
“허목이 열운자 선배님을 뵙습니다.”
열운자가 손을 휘두르자 열세 개의 눈동자가 천천히 사라졌고 기이한 힘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한제는 아무런 변화조차 없는 얼굴로 한 걸음 나아가 산꼭대기에 이른 뒤 허정의 맞은편에 섰다.
“허목! 네놈…”
허정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순간, 한제가 냉랭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리한 검처럼 날카로운 그 눈빛은 곧장 허정의 두 눈을 꿰뚫었다. 이에 허정은 머릿속에서 쿵 하는 울림을 느끼고는 깜짝 놀랐다. 이어서 심신이 떨려 왔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흘렀으며, 체내의 선원마저도 무너질 뻔했다.
쿵쾅! 쿵쾅! 쿵쾅!
허정이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심장 소리뿐이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면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지금의 한제에게서는 가문의 선배에게서나 받았던 압박감이 느껴져 조금의 저항심도 품을 수가 없었다.
허정은 마치 거인의 발아래에 선 것처럼 몸을 달달 떨었다. 그 거인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육신도 원신도 삽시간에 뭉개져버릴 수 있을 터였다.
“우웩!”
한 움큼 피를 토해낸 허정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 멍하니 한제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한편, 열운자는 번득이는 눈으로 이를 살피다가 작게 혀를 찼다.
한제는 다시 열운자를 향해 포권을 했다.
“선배님께서 저를 부르신 것은 무슨 일 때문인지요.”
한제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열운자의 안색은 묵직했고 한제를 향한 눈빛도 이전과는 달랐다. 이제 더 이상 까마득한 후배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한제가 원했던 것이었다. 간접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알리는 것. 열운자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한제가 모를 리 없었다. 예전에는 어떤 조건을 제시할 자격이 없었으나 이제 그는 그럴 자격을 갖춘 것이다.
“당시 봉선 의식이 있었을 때 내가 네게 우리 전가의 보물인 전(戰) 족자를 주겠다고 했다. 당시 두 번째 족자를 보여주겠다고 했지. 내가 너희 두 사람을 불러들인 것은 약속한 족자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말을 마친 열운자가 왼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자 그의 앞에서 스윽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줄기 균열이 나타났다. 뒤이어 그 균열 안에서 검은 빛이 발산되는가 싶더니 검은 빛에 휩싸인 족자 하나가 튀어나와 열운자의 손 위로 떠올랐다.
“이것이 우리 전가의 세 족자 중 두 번째 족자다!”
열운자는 형형한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한 줄기 기대감도 어려 있었다.
오른손으로 그 족자를 받아 든 한제는 족자를 펼치지는 않은 채 그저 빙그레 웃었다.
“선배님, 이걸 그냥 볼 수는 없겠지요?”
한제를 바라보던 열운자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허나 좀 전에 한제가 보여준 힘을 떠올린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허목. 아주 대담하구나! 뭘 원하느냐? 말해봐라!”
한제는 하늘에 떠 있는 열세 개의 나부를 가리키며 덤덤하게 말했다.
“두 번째 족자를 보는 대신 나부 하나를 가졌으면 합니다.”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던 열운자는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가질 수 있는 법보 같으냐?”
한제는 빙그레 웃으며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덤덤하게 말했다.
“이곳에 오기 전 사형과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사형은 며칠 뒤 저를 찾아오겠다 하셨지요.”
그 말에 열운자는 유쾌하게 껄껄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주마!”
말을 마친 그가 한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자 붉은 공 하나가 떨어지며 주먹 크기로 줄어들었다. 열운자는 그 붉은 공을 한제에게 던졌다.
한제는 조심스럽게 나부를 받아 들고 잠시 살펴본 뒤 저물대에 챙겨 넣었다.
“이제 족자를 봐라!”
열운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뇌선(副雷仙) 허정 역시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허정더러 먼저 보게 하시지요. 당시 시험으로 첫 번째 족자를 볼 때도 허정이 먼저이지 않았습니까?”
한제는 족자를 허정에게 건넸다.
바들바들 떨리는 심신을 애써 안정시킨 허정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날아든 족자를 받아 펼쳤다. 그 순간, 천둥과 같은 우렁찬 포효가 그 족자 안에서 울려 퍼졌다.
“쿠오오!”
뒤이어 짙은 전의(戰意)가 피어올라 허정에게로 떨어졌다.
허정은 격렬한 경련을 일으켰고 광풍이 불어닥치는 것을 느꼈다. 족자에 갇혀 있던 원고 시대의 마수가 풀려나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마수는 지난 수만 년 동안 품고 있던 분노를 한순간 다 쏟아내며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열운자의 눈에 옅은 긴장감이 드러났다. 그 정도 수준과 연륜에 이렇게 긴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전가에서도 첫 번째 족자를 보는 데 성공한 수련자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첫 번째 족자를 보는 데 성공한 수련자 대부분도 이 두 번째 족자를 미처 펼치기도 전에 그 안에서 튀어나온 상상을 초월하는 전의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중상을 입고 불구가 되거나 심한 경우 그대로 죽음에 이르렀다.
두 번째 족자를 열 수 있는 사람도 적었거니와, 이를 약간이 아니라 완전히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지난 몇 세대가 지나도록 열운자를 포함해 단 세 명에 불과했다.
그 무렵, 허정은 창백한 얼굴로 땀범벅이 된 몸을 떨며 약간 펼쳐진 족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족자를 아주 약간 펼친 것만으로도 그는 족자에서 튀어나온 강력하고 광기 어린 기운에 삼켜질 뻔했다. 심지어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귓가에서는 원고 시대 마수의 포효와 고함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긴 머리는 사방으로 흩날렸다. 마치 큰 바다 위의 조각배가 되어 거친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천부적인 실력을 가진 동림성(東臨星) 허가 출신 수련자이자 승선지(升仙池)에 들어가 경지를 선원으로 바꾼 사람이었다. 만약 선계가 존재했던 상고 시대였다면 그는 진정한 선인으로 대접받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허정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는 떨리는 두 손을 천천히 펼쳤다.
이 모습을 보며 열운자는 감탄했다.
‘허정은 첫 번째 족자에 신식을 주입할 때에도 단 몇 초 만에 성공했지. 아마도 두 번째 족자를 4할 정도는 펼칠 수 있을 듯한데 궁금하긴 하군.’
한제는 여전히 심드렁한 눈으로 허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허정의 두 손은 점점 격렬하게 떨렸고 족자가 조금씩 펼쳐질수록 그 안에서 발산되는 강력하고 맹렬한 기운에 떨림은 거세어졌다. 심지어 허정은 이것이 족자가 아니라 진정한 원고 시대의 마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족자는 서서히 펼쳐져갔다. 허정의 옷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가 족자를 4할 정도 펼쳤을 때, 족자에서 발산된 전의가 더욱 짙어졌다. 허공에서 폭풍이 불어 닥쳤고 콰르릉 하는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족자에서 튀어나온 검은 빛이 미친 듯 번득이며 허정을 거의 감싸다시피 했다.
허정의 심신은 진동했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로 이를 악물고 선원의 힘을 활성화했고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족자는 7할 정도 펼쳐졌다.
이 모습을 본 열운자는 놀라움과 기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캬오오!”
그 순간, 포효가 터져 나오면서 대량의 검은 안개가 한 마리 거대한 마수가 되어 허정을 집어삼키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었다.
열운자의 눈이 기대감으로 번득였다.
하지만 허정은 한 움큼 피를 토해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펑,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대량의 피 안개가 체내에서 분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