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59
허정은 비참하게 웃으며 쾅 하고 1백 척 너머에 처박혔고 족자는 곧장 맞물려 허공에 떠오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열운자는 아쉬운 듯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비록 전의로 이루어진 수령(獸靈)에 저항하지는 못했지만 족자를 7할 이상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허정은 그의 뛰어난 실력과 재능을 입증한 셈이었다.
열운자는 족자를 한제에게 넘기며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허목, 네 차례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족자를 손에 쥐고 열운자를 힐긋 살폈다. 그와 열운자는 친한 사이도 그렇다고 적도 아니었다.
한제는 허정이 당시 첫 번째 족자를 보면서 얻었던 한 줄기 본원의 힘이 방금 그 거대한 마수에게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을 똑똑히 봤다.
‘재미있는 족자로군.’
한제는 피식 웃으며 족자를 양손으로 들고 펼쳤다.
촤락!
족자가 약간 펼쳐진 순간, 원고 시대 마수가 포효하며 한제를 집어삼킬 들 달려들었다.
열운자는 말없이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이전까지는 한제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 않았다. 지금껏 족자를 보는 것을 허락받은 외지인 중 가장 뛰어난 자도 족자를 절반 정도 펼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은 한제에 대한 기대감이 달라진 상황이었다. 한제는 자신에게 조건을 제시하고 청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압박했다.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이를 행하려면 정확한 시기를 잡을 수 있어야 하고 대선배인 자신에게 협상을 시도할 정도의 담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허정을 눈빛 한 번으로 제압한 모습까지 더해지자 열운자의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한편, 한제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원고 시대의 마수를 보면서도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매섭고 강렬한 기세도 고신의 위엄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약해도 너무 약해서 우스울 지경이었다.
한제는 천천히, 여유롭게 족자를 펼쳤다. 족자가 펼쳐짐에 따라 마수의 기세는 더욱 강력해졌고 분노에 찬 포효가 울려 퍼지며 광풍이 되어 사방을 휩쓸었지만 한제에게는 선선한 바람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이를 지켜보는 열운자의 눈은 한제에게 고정되었고 동공이 졸아들었다.
한편, 어딘가 멀리에 처박힌 허정은 선원의 반 이상이 무너져 내린 상태로 원한과 감탄이 뒤섞인 눈으로 한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유명(幽冥)의 인도
한제는 느긋하게 족자의 3할 정도를 연 뒤 잠시 멈추었다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족자는 7할 이상 펼쳐졌다.
쾅!
“캬오오오!”
날카로운 포효가 하늘을 뒤흔들었고 허정을 날려버린 마수가 곧장 모습을 드러내더니 광풍을 일으키며 한제를 삼키려 달려들었다.
한제는 피식 웃더니 혀를 찼다.
“쯧, 더러운 짐승이로군.”
그 순간, 하늘이 갈라질 듯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제가 선 산봉우리에서도 쾅, 쾅 하는 거대한 소리가 퍼져나가면서 무너져 내릴 조짐을 보였다. 땅속에서 거대한 용이 꿈틀거린 듯 지면에는 삽시간에 균열과 고랑이 생겨났다.
원고 시대의 마수는 한제의 심신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지금의 한제는 완전한 고신, 그것도 5성급 왕족이었기 때문이다.
훌훌 나가떨어진 마수의 눈에는 두려움과 충격이 어려 있었다. 녀석은 크게 놀란 듯 몸을 바르르 떨더니 얼른 다시 족자 속으로 들어갔다.
눈앞의 수련자에게서 느껴지는 저 극강의 기운은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존재의 그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광경에 열운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나 이어서 희열에 가까운 기쁨이 차올랐다.
‘허목은 저 마수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구나! 우리 전가에서 이런 실력을 보인 사람은 아주 오래전의 선조였던 전성야 뿐이었거늘!’
한제는 다시 두 손에 힘을 주었고 족자는 이내 완전히 펼쳐졌다. 그리고 그 순간, 족자에서 솟아오른 한 줄기 본원의 힘이 미간의 세 번째 눈으로 스며들었다.
족자 위에는 멋들어진 필체로 ‘전(戰)’이라는 한 글자만이 적혀 있었다.
그 글자에서는 고래(古來)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눈동자에 그 글자가 비춘 순간, 한제는 눈앞이 이지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끝없는 우주와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가부좌를 튼 노인은 오른손 두 손가락으로 허공에 ‘전(戰)’자를 끊임없이 그려내고 있었다.
“난 3만 년 전 공(空)의 경계에 이르러 그 경계의 맥락을 더듬었다. 평생 누구에게도 이를 전수한 적이 없고 수련의 모든 결과를 이 글자 하나에 담아냈지. 그리고 그 경계를 깨기 전에 만에 하나 실패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여섯 개의 족자를 남겨놓았다. 그 족자를 얻은 후대 사람은 나의 전승자가 될 것이다!”
노인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움직이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순간 서로 다른 크기의 전(戰) 자 수천수만 개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노인의 손짓에 따라 돌연 짙은 검은 빛을 번득이며 한곳으로 질주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하나로 응집됐다.
“전(戰)!”
노인이 덤덤하게 외치자 하나로 합쳐진 글자가 진동하면서 한 가닥 검은 빛이 되어 허공에 떨어졌다.
그 순간, 동공에 비친 글자는 사라졌고 동시에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면서 깨어났다.
“무엇을 보았느냐?”
가까이 다가온 열운자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물었다.
한제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열운자가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저 멀리 떨어져 있던 허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떠밀려갔다.
“자 이제 말해보아라. 무엇을 보았느냐?”
“유산을 봤습니다!”
한제가 느릿하게 답했다.
“유산… 그래, 유산이지. 선조의 실종은 분명 그 유산과 막대한 연관이 있어!”
열운자의 안색이 변했다. 그에게는 한제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려낼 능력이 있었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유산이라는 답을 한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당시의 선조 전성야도 두 번째 족자를 본 뒤 비슷한 말을 했다. 그분은 오랜 연구 끝에 마침내 세 번째 족자를 열었지. 이후 그분은 세 번째 족자를 가지고는 출입을 일절 금한 채 폐관수련을 시작했고 1천 년이 흐른 후에야 가문 사람들은 그분이 폐관수련을 하던 곳에 세 번째 족자와 옥패 하나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지. 선조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말을 하는 동안 열운자는 차차 침착함을 되찾아갔다.
“만약 선조께서 실종되지 않으셨다면 감히 뇌선전(雷仙殿)이라 해도 우리 전가를 감히 건드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상고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수련자 가문도 마찬가지였겠지. 선조는 곧 우리 전가의 영광이었으니까! 허나 선조의 실종으로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이후 우리 가문은 선조를 찾으려 했다. 선조는 죽지 않았어. 죽었다면 위패가 부서졌을 테니까!”
열운자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맴돌았다. 전가 사람들 중 두 번째 족자를 본 사람은 세 명이었지만 세 번째 족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대해 그는 한 번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가문 내의 다른 후손들 역시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모두 열운자를 비롯한 가문 내의 장로들이 세 번째 족자를 상세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열운자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자신을 포함해 두 번째 족자를 상세히 살피는 데 성공한 세 사람 중 누구도 허목처럼 족자로부터 깊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이는 수준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심지어는 자질과도 무관했다. 구체적으로 무엇과 관련된 문제인지는 열운자도 알지 못했다.
“허목, 만약 네게 세 번째 족자를 보여주려 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겠느냐?”
열운자는 한참이나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다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이는 사심이 섞인 제안이었다. 전성야를 찾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가 실종됐을 당시 남긴 옥패에 담긴 한마디가 더 중요했다.
‘우리 전가에서 누군가가 그 유산을 얻는 데 성공한다면 그자는 절정의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열운자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한제 역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저의 수준으로는 세 번째 족자를 열지 못할 겁니다.”
“이는 수준과는 무관한 일이니 일단 시도해보아라. 어떤 조건이든 이 열운자가 다 들어주겠다.”
열운자가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리자 정수리에서 짙은 검은 빛에 휩싸인 족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세 번째 전(戰) 족자였다.
열운자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그 족자를 한제에게 건넸다.
한제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손이 족자에 닿은 순간, 그는 심신을 뒤흔드는 기운을 느꼈다. 이 기운은 두 번째 족자에서 풍겼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
‘이 족자는 절대 열 수 없어!’
만약 억지로 족자를 열려고 시도했다가는 아주 약간에 불과한 이 기운조차 견뎌내지 못할 것임을 한제는 직감할 수 있었다.
“선배님, 전 죽을 길로 걸어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 족자를 억지로 열었다가는 제 목숨이 끊어질 겁니다!”
한제가 세 번째 족자를 돌려주자 열운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선배님, 걱정 마십시오. 저 역시 이 족자를 보고 싶습니다. 후에 수준이 충분히 높아진다면 찾아뵙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 족자에서 풍기는 기운만으로도 죽을 것 같으니 일단 다른 사람을 찾으시지요.”
한제는 공손하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거절했다고 해서 열운자가 공격을 해오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혹여 공격을 해온다 해도 맞서 싸우지 않고 방어와 도주에 집중한다면 청수가 찾아올 때까지는 버틸 자신이 있었다.
열운자의 머릿속에서는 오만 생각이 이어졌다. 그는 세 번째 족자의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금껏 이 족자를 열려고 했던 사람은 모두 죽음을 맞았기에 자신도 아직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천성역에 큰 공을 세운 허목에게 억지로 이 족자를 보게 하다가 그가 죽기라도 한다면 염뇌자는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염뇌자가 전쟁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허목 하나 때문에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지는 않겠지만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은 청수였다.
그가 보기에 청수는 정말이지 미친 자였다. 허목을 건드렸다가는 청수가 절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그는 허목을 위해 혈신자와 싸웠고 봉선 의식에서는 뇌선전 사람을 죽인 바가 있으니 말이다.
열운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허나 허목 이자가 죽는다면 다시 족자 안의 경지를 목격할 사람이 또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그래, 차라리 허목과 관계를 잘 다져놓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낫다.’
열운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피식 웃으며 인자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교만하거나 조급해하지 않다니, 과연 나천성역의 정뇌선답구나! 허목, 우리 전가는 향가처럼 혼을 부활시키는 술법은 가지고 있지 않다. 허나 고본법(固本法)이라는 술법이 있지. 네가 세 번째 족자를 열게 된다면 그 술법을 전수해주마! 그리고 온 가문 사람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할 수 있는 한 네가 제시한 조건은 무엇이든 지킬 것이다!”
열운자의 약속에 한제는 감동한 눈빛으로 공손하게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 허목도 반드시 약속을 지킬 터이니 선배님도 걱정 마십시오!”
열운자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하지. 좋다, 청수와의 약속이 있다고 했으니 이제 그만 가보아라!”
포권을 한 한제는 곧 한 줄기 긴 빛이 되어 먼 곳으로 사라졌다.
한제가 떠난 뒤, 낯빛이 어두워진 열운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청수가 문제로군. 그가 사라지면 허목 네놈은 절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한편, 한제 역시 표정이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