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68
“천금, 왜 그래?”
분홍색 옷을 입은 여인이 녹의의 여인에게 물어왔다. 허나 천금은 고개를 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천운자의 비밀
천운자의 분부로 천운종 사람들도 속속 흩어졌고 이제 광장에는 천운자와 한제만 남게 됐다. 스승과 제자의 수백 년 만의 독대였다.
“어쩔 계획이냐?”
한참 후에야 천운자가 조용히 물었다.
“요령의 땅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한제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게는 그럴 자격이 있지. 나천성역의 정뇌선이자 사성종(四聖宗) 주작 일맥 중의 한 명이니. 듣기로는 이번 주작 서열 안에 든 것은 너를 포함해 단 세 명뿐이라더구나.”
한제는 침묵했다. 주작 서역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에 스승의 말에 심신이 떨려왔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요령의 땅을 열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 동굴에 들어가려면 몇몇 벗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그동안 너는 이곳에서 안심하고 쉬고 있거라.”
천운자의 태평한 얼굴에서는 기쁨도 분노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덤덤하게 이야기를 마친 그는 소매를 휘두르더니 발아래에서 솟아오른 하얀 구름에 올라탄 채 하늘로 떠올랐다.
“널 위해 아직 자한각을 남겨두었다.”
그 말을 끝으로 천운자가 저만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능천후의 마지막 행동은 뭔가 이상해. 심지어 신통술을 발휘할 때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지.’
능천후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천운자에 대해서는 여전히 파악이 불가능했다.
여러 가지 단서와 흔적을 통해 약간의 실마리를 파악한 것 같다가도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무언가가 나타나 모든 것을 수수께끼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그래서인지 천운자는 언제나 짙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는 것처럼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알 수가 없어.”
사실 한제는 천운자가 자신의 방문을 예견했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천운자와 다시 만나고 그가 자신의 예상대로 행동하자 왠지 모를 불길함이 자꾸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과 생각에 너무나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내 생각을 떨쳐낸 한제는 익숙한 천운종를 둘러보다가 예전에 자신이 사용했던 자한각으로 향했다.
광장에서 자계의 산봉우리로 향하는 길은 계단으로 이루어진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 하나였는데 양쪽에는 바위가 높게 솟았고 초록색 풀과 이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석양이 지고 청량한 산바람이 불어왔다. 곳곳에서는 솨아아 하고 나뭇잎이 흔들렸다. 저 멀리서 흐르는 계곡 소리도 바람에 실려 왔다.
한제는 수백 년 만에 다시 이 길에 오르자 어쩐지 감개무량했다.
“모든 것이 당시와 다름없는 것 같구나.”
한제는 산책을 하듯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한데 그때 남색 옷을 입은 영변기 수준의 남녀 수련자 한 쌍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다가왔다. 바람 소리에 실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사매, 일주일 뒤에 귀안(鬼眼) 시장이 다시 열린다는 소리 들었어? 적지 않은 도우들이 벌써 그쪽으로 가고 있다더군.”
“귀안 시장이요? 선술(仙術)을 팔아서 단번에 유명해진 그 시장 말씀인가요?”
여인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가득 어려 있었다.
“그래, 그 귀안 시장 말이야. 당시 그 선술로 엄청난 반향이 일었지. 들리는 말에 따르면 수준 높은 수련자 선배님들도 그 선술 때문에 직접 시장에 방문했다더라고. 더구나 그때 귀안 시장에서 팔았던 건 완전한 선술이었다더군! 이번에 열리는 시장에서도 그런 신비로운 물건들을 팔겠지?”
“휴,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겠어요. 귀안 시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하나 같이 너무 비싸서 우리는 엄두도 못 낼 텐데요. 더구나 그곳에 들어가려면 초대장도 필요하고요.”
“괜찮아. 경매장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자유 거래 구역에는 우리도 들어갈 수 있으니까.”
사내는 말을 마친 뒤 저물대에서 옥패를 하나 꺼냈다. 새카만 옥패의 중앙에는 눈동자처럼 생긴 뭔가가 박힌 채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굉장히 기이하게 느껴졌다.
“귀안 시장의 초대 옥패!”
여인의 두 눈이 반짝였다.
사내는 의기양양해져 뭔가를 말하려다가 저 위쪽에서 내려오는 한제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두 남녀의 수준으로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제가 다가오는 것을 전혀 눈치챌 수가 없었다.
한제는 온화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남자 수련자를 훑어보며 웃었다.
“이 사형,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너는⋯⋯? 이한제!”
자신도 자리를 비웠다가 이제 막 복귀한 터라 한제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사내는 화들짝 놀랐고 뒤로 물러나며 덜덜 떨기까지 했다.
허나 한제는 이 사내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그저 성이 이 씨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천운종에서 일면식이 있던 사이로 당시 한제를 바라보던 사내의 눈빛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사내에게도 그동안 어느 정도의 진전이 있었는데 수준이 당시 영변기 초기에서 중기까지 높아져 있었다.
한제는 이제 두 사람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형, 저자의 이름이 이한제예요? 들어본 것도 같은데⋯⋯.”
고개를 돌려 한제를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한제가 돌아왔다니! 저자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스승님께서 모르실 리 없다. 설마 당시의 일에 대해 스승님께 용서를 받은 것인가! 방금 저자에게서 난 마치 일반인을 보는 것처럼 영력(靈力)의 파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한데 저자가 내 곁을 스쳐가는 순간에는 심신이 떨려왔지. 체내의 영력이 저자의 존재에 겁을 먹은 거야!’
사내는 창백해진 얼굴로 곁에 있는 사매를 끌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
“사형, 왜 그러세요?”
여인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저자는 당시 우리 천운종 자계의 일곱째였지. 사매, 아직도 기억 안 나나?”
사내의 다급한 목소리에 여인도 그제야 흠칫 놀랐다.
“요령의 땅에서 피로 강을 이룰 정도로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다가 결국 스승님과 다른 여러 선배님들에게 쫓겨 도망쳤다는 그 이한제라고요?”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은 한제는 쓰게 웃었다. 소문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지속됐고 그러는 동안 곡해되고 왜곡되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한제는 좁은 길을 따라 천운종 밖으로 향했다.
전방에는 산봉우리 하나가 구름을 뚫을 듯 높이 솟아 있었고 그 꼭대기를 맴도는 구름에서는 보라색 빛이 흘렀다.
익숙한 산봉우리를 바라보던 한제의 눈에 슬픈 빛이 어렸다. 마치 주작성을 떠나와 막 이곳에 이른 청년이 한 걸음씩 산봉우리를 오르며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듯했다.
천운종의 자봉(紫峰). 자계 제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자봉 위에는 적지 않은 초목이 있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하늘하늘 흔들렸다.
멀리서 바라보면 산이 흔들리고 있는 건지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제는 산바람을 맞으며 자봉에 올랐다. 계단은 저 높은 꼭대기까지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여유롭게 산꼭대기까지 오르는 동안 한제는 단 한 명의 수련자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곁을 오간 것은 산바람뿐이었다.
산꼭대기는 당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상태로 저 먼 곳에 세워진 정교한 누각만이 살짝 드러났다. 누각의 편액에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자한각!
‘내가 차지하기 전까지 이곳이 자운각이라고 불렸지.’
한제는 잠시 말없이 서서 자한각을 지켜보다가 문을 열었다. 곰팡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가구들은 당시와 똑같이 남아 있었다.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라면 한가득 쌓인 먼지뿐이었다. 탁자 나무 의자 침상 할 것 없이 먼지 범벅이었다. 기름등의 기름도 이미 바짝 마른 상태였다.
잠시 방을 둘러보던 한제가 가볍게 손가락을 휘둘렀다. 그러자 순간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방을 가득 채운 바람은 꼭 누각 안에서 일어난 한 차례 폭풍 같았다. 한데 기이하게도 그 폭풍은 먼지만 휩쓸어갈 뿐 나머지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문풍지 역시 그 강력한 바람에도 찢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한제는 손을 위로 들어 올려 허공을 꽉 쥐었다. 그러자 누각 안의 폭풍은 시간이 거꾸로 흐르듯 사방에서 한제의 손가락으로 빨려들었다. 더 이상 누각을 휩쓰는 폭풍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제의 손바닥에는 짙은 회색의 회오리가 하나 떠 있었다. 그 안에는 이 누각에 가득 쌓여있던 먼지가 전부 다 모인 상태였다.
누각의 창문이 열리자 그 회오리는 창밖으로 날아가 흩어졌다. 수백 년간 쌓였던 세월과 기억이 모두 닦여 다른 곳으로 날아간 것만 같았다.
이내 석양이 지면서 방은 점차 캄캄해졌고 한제의 인영도 흐릿해졌다.
한제는 보라색 나무로 된 찬장 옆으로 다가갔다. 당시 그는 등잔에 넣을 기름을 이곳에 두었는데 찬장을 열어보니 역시나 갈색 기름이 반 정도 차 있는 병이 하나 있었다.
기름 등에 기름을 채운 뒤 불을 붙이자 불꽃이 피어오르면서 어둠을 몰아냈다. 다만 그 빛이 나타난 순간 창문을 통해 누각 안으로 불어닥친 산바람에 불은 휘청거렸고 이에 방 안으로 늘어진 한제의 그림자도 흔들거렸다.
“음?”
한제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 휘청거리는 등불을 바라보던 그는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 스쳐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동시에 그의 두 눈이 반짝였다.
“바람이 불어와 등불에 변화를 일으켰어. 바람의 변화는 짐작이 불가하여 어떤 것이 가장 처음의 상태인지 알 수가 없지. 그래! 천운자는 바로 이 등불과 같아. 내가 그를 볼 때마다 매번 다른 느낌을 받았던 것은 그가 수시로 변화하기 때문이야. 마치 그가 가진 수천 개의 분신이 동시에 하나의 육신 안에 존재하면서 매 순간 교체되는 것처럼⋯⋯.”
한제는 흔들리는 등불을 바라보았다. 그 불빛으로 인해 한제의 안색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했지만 그의 두 눈에는 깨달음으로 인한 밝은 빛이 깃들어 있었다.
“등불은 바람 때문에 흔들렸어. 산에서 불어온 바람에 풀과 나무가 흔들리는 것처럼. 풀과 나무가 흔들리면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한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사실 산은 움직이지 않아.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것은 등불이 아니라 바람이다!”
한제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순간 누각 안의 모든 창문이 탁 하고 닫혔다. 이제 밖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은 누각 안으로 들이닥치지 못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없으니 격렬하게 흔들리던 등불도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등잔에 찬 기름이 줄어들면서 등불은 다시 살짝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