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70
조현몽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 한 이야기는 천운종 내에서는 금기시되는 터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절망감에 휩싸여있었다. 체내의 봉인은 하루하루 계속해서 느슨해져갔고 머지않아 완전히 풀려버릴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문정기를 넘어선 자는 모두 스승님께 산 채로 삼켜졌다는 소문도 있어. 이한제, 난 네게 내 명혼을 되찾아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니야. 그냥 내 체내의 봉인을 다시 굳건하게 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내 수준이 영원히 영변기 후기에 멈춰있을 수 있게만 해줘.”
조현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한제를 향해 절을 하려 했다. 그러자 한제가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부드러운 힘을 뿜어냈다. 그 힘은 조현몽이 절을 하지 못하게 했다.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한제는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표정이 급변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조현몽 역시 잠시 후 뭔가를 감지한 듯했고 잠깐 고민에 잠긴 듯하더니 어째서인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조심스레 한제 곁으로 다가갔다.
뒤이어 그녀는 신발을 벗고 한제의 침상으로 올라가더니 결인을 그려 모습을 감췄다.
그때, 누각 밖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일곱째 사제, 백미일세.”
음산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느릿하게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사실 백미에 대해 악감정은 전혀 없었다. 천운종에 처음 왔을 당시 그의 은근한 주의가 없었다면 천운자에 대해 그렇게 깊이 알게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형, 들어오시지요.”
한제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옆에서 풍기는 옅은 체향에 약간 불편해졌다.
난감해진 한제
방문이 열리더니 여전히 잘생긴 백미가 약간은 초췌해진 상태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한제를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감개무량하다는 듯 말했다.
“오랜만이군. 일곱째 자네는 그 당시와 변한 게 없어.”
“백 사형께서도 똑같으십니다. 수백 년 만에 만나는데도 꼭 어제 본 사이 같군요.”
피식 웃으며 답하는 한제를 바라보던 백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틀린 표현을 썼군. 다시는 나를 백 사형이라 부르지 말게. 백 사저라 불러야지.”
순간 한제는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쓰게 웃었다.
백미는 그런 한제의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부르기 껄끄럽나? 난 언제나 여인이었는데…”
한제는 무척 난감했다. 1천 년 넘게 살아왔음에도 지금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흠! 백 사형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백미는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물기 어린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 눈빛에는 규열기에 이른 높은 수준도 고신의 육신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백 사…저,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백미는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환하게 웃었다.
“이한제, 자네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해! 이곳에서 말하기는 어려운데 시간을 내주게 천운성에 귀안이라 불리는 시장이 요 며칠 뒤에 열리는데 시간이 있다면 같이 가지. 따로 알려줄 일도 있고 하니 말이야.”
한제는 잠시 고민했다. 허나 그간 천운성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누군가에게는 들을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당시 백미와의 우정을 생각하면 그 제안을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한제는 백미의 체내에 봉인이 있는지 살폈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 아니 그녀의 수준은 보이는 그대로 영변기 중기였다.
“좋습니다. 정오에 자봉산 아래에서 만나지요.”
백미는 싱긋 웃어 보인 뒤 눈짓을 하고는 몸을 돌려 떠나갔다.
한제는 쓰게 웃었다. 백미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그때, 저물대에서 웅웅거리는 파동이 느껴지더니 머릿속으로 허이국의 목소리가 울렸다.
“최상품! 최상품! 주인님, 저건 최상품입니다. 이 허이국이 일평생 수많은 사람들을 봐왔지만 이렇게 훌륭한 품질의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특히나 그 여인이 떠나기 전 남겼던 그 눈짓에 이 허이국은 뼛속까지 나른해질 지경이었단 말입니다! 어린 여자애들보다 훨씬 강한 느낌이었지요. 주인님, 절 좀 풀어주십시오. 주인님은 저 여인이 거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전 좋습니다. 저 여인을 보자마자 당시의 그 매희가 떠올랐지 뭡니까.”
한제는 대꾸하기는커녕 원신을 가동해 허이국의 목소리를 제거해버렸다.
그때,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조현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제를 향한 그녀의 눈빛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한제는 의자에 앉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넷째 사저, 말씀하신 일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조현몽은 한참이나 한제를 빤히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수준이 높지는 않지만 1천 년 전부터 여태 정조를 지켜오고 있다. 만약 네가 나를 도와 봉인을 강화해준다면 천 년 된 원음(元陰)을 주지.”
조현몽은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로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에는 작은 붉은색 반점이 하나 나타났다.
잠시 후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소매를 다시 내리고는 한제를 힐끔 본 후 몸을 돌려 떠나갔다.
‘이게 내 마지막 희망이야. 능천후와 맞붙은 것으로 보아 저자는 이미 정열기에 가까워졌을 거야. 그러니 내 봉인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거야!’
조현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멀리 떨어진 하늘 끄트머리로 사라졌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 한들 스승님 눈치를 보느라 누구도 도우려 하지 않겠지.’
조현몽이 떠난 후, 한제는 방에 앉아 고민에 잠겼다. 그녀를 돕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천운자가 좋아할 리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봉인을 용인하는 것은 분명 어떤 뜻이 있기 때문이겠지. 분명 내적인 갈등도 느낄 테고…”
그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 저물대에서 허이국이 깃든 선검이 튀어나오려는 듯 난동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웅웅 파동이 울려왔다. 생각을 방해받은 한제는 미간을 팩 찌푸리고는 저물대에서 선검을 꺼냈다.
선검에서는 검은 안개가 피어올라 응집되더니 곧 허이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상품! 최상품입니다! 이 여인과 비교하자면 그 요령의 땅에 있는 계집애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할 수만 있다면야⋯⋯.”
허이국은 좀 전까지 백미가 있던 곳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취한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얼굴에는 더러운 웃음이 피어났다.
한제가 냉랭하게 노려보자 허이국은 몸을 떨었다. 서늘한 기운이 몸을 훑고 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서늘함은 곧장 그의 혼으로 뚫고 들어왔다.
‘빌어먹을! 이 악독한 녀석의 수준은 왜 또 높아진 거야? 말도 안 돼. 이전에 녀석을 봤을 때는 두렵기는 했어도 지금처럼 눈빛 한 번으로 영혼을 덜덜 떨리게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제는 원하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내 혼백을 흩어 없어지게 할 수 있겠군.’
경악한 허이국은 곧 알랑거리는 눈빛으로 몸을 굽혔다.
“주인님의 수준이 또 한 번 높아지셨군요. 천부적인 자질이 정말 뛰어나신⋯⋯.”
그러나 허이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제가 덤덤하게 물었다.
“이렇게 급하게 튀어나온 것은 무엇 때문이지?”
한제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눈빛은 냉랭했다.
그가 보기에는 허이국은 주기적으로 혼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천지분간 못 하고 멋대로 난동을 피울 것이 분명했다. 이 마혼(魔魂)은 그가 만든 것이었으며 이 세상에서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제련되기 전에도 마음속에 엄청난 원을 품고 있었던 데다가 성격도 온순하지 않았던 허이국은 마혼으로 제련되면서 그 성격과 심성은 더욱 극단적으로 변했다. 이에 태생적인 반골 기질이 되었고 자신보다 강한 존재 앞에서만 설설 기었다.
그에게 충성심이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 마음속에는 언제든 들고 일어설 불복종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는 것을 한제는 잘 알고 있었다.
‘야단났군. 이 악독한 녀석이 오늘 내게 손을 대려는 모양인데⋯⋯?’
허이국은 내심 긴장하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주인님, 사실 이놈이 나온 것은 주인님의 정진이 너무나 기쁘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 전, 제 뛰어난 식견으로 주인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이래, 제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주인님의 수준은 높아져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이놈이 모습을 많이 드러낼수록 주인님의 수준도 더욱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지 뭡니까. 하하⋯⋯.”
허이국은 알랑거리면서도 조심스레 한제를 살폈다.
한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허이국을 힐끔 살피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그것이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면 일단은 선검으로 돌아가지 말고 내 곁을 따르면서 네가 전승받은 검기를 느껴보도록 해라.”
허이국은 얼른 자신의 가슴팍을 탕탕 내리치며 말했다.
“주인님, 걱정 마십시오! 절대 주인님의 체면을 깎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 허이국은 남몰래 웃고 있었다.
‘난 아직도 총명하고 반응도 빠르지. 단 몇 마디로 이 악독한 녀석을 구워삶았어! 네 수준이 아무리 높다고 한들 이 허이국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한제는 허이국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가부좌를 튼 채 호흡을 시작했다.
허이국은 마치 유혼(遊魂)처럼 방안을 한참 떠다녔지만 결국은 다시 백미를 떠올렸다. 조심스럽게 한제를 힐긋 살핀 허이국은 이내 취한 듯한 얼굴로 코를 벌름거렸다.
‘미인이로군. 정말 미인이야. 정말 여인이었다면 이렇게 특별하지는 않았겠지. 난 그간 많은 여인들을 만나보았지만 그는 사내야.’
허이국의 마음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간지러워졌다. 당장이라도 백미를 찾아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머릿속에서 한 차례 환상을 그려내던 허이국은 더욱 마음이 달았다. 하지만 한제가 곁에 있다는 것을 자각한 뒤에는 한숨을 내뱉었다.
‘당시 내가 거마족의 선조와 같이 있었을 때 그는 내게 참 잘해줬지. 매희도 내게 주었고… 아주 다채롭고 즐거운 날이었어. 한데 이 악독한 녀석 곁에서는 내내 저물대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다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허이국은 점차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언젠가 내 수준이 높아지는 날, 반드시 이 녀석의 목을 따주겠어!’
그때, 한제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허이국은 화들짝 놀라 얼른 한쪽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수준이 부족해 한제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눈을 감고는 전승받은 원고 시대 검기를 깨닫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다가 평생 이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이 모든 과정을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히 알아챈 한제는 저 마혼을 다시 한 번 제련을 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을 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 시간이 흘러 정오에 이르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누각 밖에는 눈부신 햇살이 드리웠다.
그제야 눈을 뜬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렸다. 그러자 문이 저절로 활짝 열렸다. 뒤이어 눈을 뜬 허이국도 황급히 한제를 뒤따랐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녀석의 눈에서는 차오르는 흥분을 애써 참는 듯한 빛이 드러났다.
‘그 미인을 보러 가는구나!’
허공을 밟으며 한제는 자봉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진 천운종의 일곱 개 봉우리에서 인영이 이리저리 오가는 모습들이 보였고 주문을 외는 소리도 들려왔다. 천운종의 수준 낮은 제자들이 훈련 중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