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71
흘러넘칠 듯 짙은 영력이 천운종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한낮이라 그 영기에는 양화(陽火)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 들이마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영력은 이른 새벽이나 황혼이 지는 때의 영력보다 그 효력이 떨어졌다.
자계는 천운종의 일곱 계 중 가장 낮은 단계로 각 계마다 있는 천운자의 일곱 직계 제자조차 완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은 한제를 포함해 다섯 명뿐이었다.
이에 자봉에 입문하기를 원하는 일반 제자 역시 많지 않았다. 정오가 된 지금도 거대한 자봉은 스산하기만 할 뿐, 인적 역시 많지 않았다.
산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한제는 누구도 마주치지 못했다.
한편, 뒤따르던 허이국은 한제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오랜 시간 수련을 해오면서 삶의 즐거움이란 조금도 느끼지 못한 녀석이지. 허나 녀석의 정진 속도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만 해도 결단기 수련자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허이국은 얼른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하지만 저놈처럼 살 수는 없어! 이런 삶에 무슨 즐거움이 있단 말이야? 이렇게 높은 수준은 끝없는 위기와 피바람 속에서 쌓여왔을 테니까. 이 허이국은 그보다는 품에 미인을 안고 노는 것이 더 좋아. 저렇게 살다가는 언젠가 다른 자의 손에 숨통이 끊어지게 될 거야. 하긴, 저 녀석이 그렇게 죽임을 당한다면 내게도 좋은 일은 아니겠군. 저놈을 죽인 자가 내 의식을 지워버리면 나 역시 다른 검령(劍靈)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될 테니까.’
진도삼자(塵道三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들은 자봉 아래에 이르게 됐다.
산 아래 정자에는 보라색 인영이 얌전히 서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유유자적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어딘가 유약해 보이기도 했다.
때마침 불어온 미풍에 인영의 검은 머리가 흩날렸다. 고운 손을 들어 머리를 정리하며 몸을 돌리던 그 사람은 한제를 발견하고는 살짝 웃었다.
“이 사제의 말에는 거짓이 없군.”
백미는 가볍게 웃었다.
한제의 표정은 덤덤했으나 뒤쪽에 선 허이국의 눈빛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만약 한제가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그건 뭐지?”
백미의 눈빛이 닿자 검은 안개 형태로 변해 있던 허이국은 본래의 모습이 드러냈다. 두 눈에는 음탕하고 사악한 빛이 번득였으나, 표정은 나름 진지했다.
허이국이 막 뭔가 말을 하려던 그때, 한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에 허이국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알랑거리는 표정이 드러났다. 이 빠른 표정 변화에 백미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제 기령(器靈)입니다. 백 사형, 그 시장이 어디입니까?”
한제는 허이국에 대한 별 다른 소개 없이 본론을 물었다.
이에 허이국은 속으로는 화가 났으나 감히 분노를 드러내지는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백미만을 바라본 채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이 망할 놈! 자기가 관심 없으면 빠질 일이지 어찌 나의 앞길까지 막는단 말이냐?’
“백… 사형? 사형?”
백미가 예쁜 눈썹을 살짝 찡그리자 한제는 난감해지고 말았다. 평생 그를 난감하게 한 일은 몇 안 되는데 그중 두 번이 백미로 인한 것이었다.
한데 자신의 주인이 난감해하는 동안 허이국은 속으로 소리쳤다.
‘아아! 내 운명의 사랑이 바로 저 사람이로구나!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허이국의 체내에서 검은 안개가 격렬하게 솟아오르더니 거대한 힘이 되어 곧장 백미를 집어삼키려는 듯 달려들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한제고 뭐고 없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백미의 얼굴뿐이었다.
한데 그 순간, 한제가 손을 쭉 뻗더니 그 검은 안개의 중심에 있는 허이국의 영혼을 움켜쥐었다.
“컥!”
퍼뜩 정신을 차린 허이국은 괴로움에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상황에서도 알랑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주인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백 사…저. 안내해주십시오.”
한제는 여전히 어색한 듯 난감해하며 말했다.
한편, 백미는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는 듯 웃으며 허이국을 힐끗 살폈다. 그리고 그 시선에 허이국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입을 가리고 살짝 웃던 백미가 저물대를 두드리자 비검 하나가 빠져나왔다. 백미는 그 비검에 오른 채 전방으로 나아갔고 한제는 그 검광을 쫓아갔다.
‘백미는 당시에도 여성스러웠지만 지금처럼 증상이 심각하지는 않았어. 체내는 음기로 가득 차 있고 심지어는 심성마저 많이 바뀌었구나.’
그때, 한제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뒤에서 누군가가 몰래 따라오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볼 것도 없이 그 인영의 주인은 조현몽이었다.
백미를 자세히 살피던 한제는 그에게서 예전과 다른 느낌을 받았지만 대체 어느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1천 년이 넘는 수련을 통해 직감이 예리해진 한제는 천운자만큼 정확한 예지력은 없더라도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지 약간의 예측은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전에 이곳에 왔을 때도 오래 머물지는 않았어. 몇 개월 후면 천운성의 날씨가 바뀔 거야. 흐린 날과 맑은 날이 교차되는 시기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천운정의 독특한 풍광이라 할 수 있지.”
한제가 자신을 신식으로 살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백미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지난 수백 년간 천운종은 평온했어. 뒷산에 누가 심어놓았는지도 모르는, 영원히 꽃을 피우지 않는 백양목에 별안간 꽃이 피었다는 게 그나마 화젯거리였달까? 한데 그 꽃은 하얀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고 피어나자마자 바로 죽어 안개로 변했어. 모두가 희한하게 여겼지. 나도 당시 그곳에 있었는데 그 꽃을 살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네.”
‘의심이 가는 부분은 없는데⋯⋯.’
한제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딱히 이상한 부분은 없었지만 알 수 없는 느낌이 마음속에 내내 맴돌았다.
“자네가 떠난 이후 수백 년 동안 스승님은 폐관수련을 하시며 세상일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으셨지.”
백미는 미소를 지은 채 한제가 자리를 비웠던 동안의 일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허나 처음에는 열심히 이야기를 듣던 한제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잡다한 것들이었고 두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안성(鬼眼城)은 몇 해 전 완전한 선술을 판 것으로 유명해지면서 이후로는 열릴 때마다 수많은 수련자들이 모이고 있지. 한 달 정도 열리는데 그 기간 동안 경매만 열리는 게 아니라 자유로운 거래도 할 수 있어. 다만 귀안성은 넓지 않아 머물 곳이 부족해. 그러니 늦게 가면 꼼짝 없이 노숙을 하는 수밖에 없지.”
한제는 한참이나 백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백 사저, 사저는 무슨 공법을 수련했습니까?”
그 물음에 백미는 흠칫 놀라 표정이 변했다. 앞장서서 귀안성으로 향하던 걸음도 우뚝 멈추더니 뒤로 몇 걸음 물러나 한제를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사제는 날 무시하는 건가? 그런 것이라면 다시는 보지 않겠네!”
그저 궁금증에 가볍게 던진 질문일 뿐인데 뜻밖에도 격한 반응이 돌아오자 한제는 오히려 당황했다.
“오해를 한 모양이군요. 별 뜻 없이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입니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백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답했다.
백미는 입술을 깨문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배운 공법의 이름은, 쌍욕선결(雙欲仙訣)이라 하네!”
말을 마친 백미는 그 후로 말없이 나아가기만 했다.
‘쌍욕선결이라⋯⋯.’
한제는 생각에 잠겨 백미의 뒷모습을 살폈다. 상대의 체내에서 짙은 음기가 더욱 빠르게 맴도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 경맥을 따라 흐르는 음기는 기이한 표식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 표식은 백미의 체내 음기의 경맥을 따라 이루어져 있었다. 이전까지는 그 음기가 흐르는 속도가 비교적 완만했는데 빠르게 흐르는 음기로 인해 드러난 표식은 잠시 유지되다가 곧 사라졌다.
한제는 그 표식을 기억에 남겼다.
해 질 무렵, 저 멀리 원형의 도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둥그런 도시의 사방에는 수련자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진법을 이루는 금제의 파동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 끄트머리에서 나타난 검광들이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더러는 혼자였고 더러는 삼삼오오 무리를 이룬 그들은 도시 근처에 이르러 초대 옥패를 내보인 뒤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낯선 곳을 신식으로 살피다가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한제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매우 조심스럽게 신식을 펼쳤다. 도시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금제의 파동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다소 실례될 수도 있으나 수련계에서는 어느 정도 묵인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이 도시에 드리운 금제는 한제에게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그의 수준과 금제에 대한 조예가 합쳐진다면 신식으로 금제를 훑는 도중에도 금제는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한데 한제의 신식이 그 금제를 지나 도시 안쪽을 살짝 훑고 다시 돌아오려던 그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세 갈래 신식이 돌연 폭발하여 마치 세 마리의 거대한 용처럼 솟아올랐다.
“어떤 도우가 우리 귀안성에 오셨는가? 난 진도삼자(塵道三子) 중 한 명인 일진자일세!”
노련한 목소리가 신식을 통해 전해져왔고 그와 동시에 세 갈래 신식으로 이루어진 허상의 용은 잔뜩 화가 난 듯 회전하면서 폭풍을 일으켰다. 한제의 신식을 가둬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 작정인 듯 보였다.
세 갈래 신식 중 두 갈래는 규열기 초기 수준이었으며 일진자의 수준은 규열기 중기에 이르러 있었다. 때문에 그 셋이 연합한다면 한제는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한제의 신통력은 그의 육신에 근간을 두고 있었으며 신식의 수준은 아직 규열기 중기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천운종의 이한제입니다. 제가 결례를 범했군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결례를 범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한제는 사과의 뜻을 전했다.
“양해를 바란다고? 웃기는 녀석이로구나. 네가 직접 잘못을 시인했으니 오늘 일로 무거운 벌을 내리지는 않겠다. 허나 당장 떠나라. 다시 귀안성에 발을 들인다면 그때는 양해 따위는 없을 것이다!”
일진자의 곁에서 다른 신식이 음침한 목소리로 겁박해왔다.
한편, 한제의 육신은 백미와 도시 앞에 줄을 서 있었다. 한제와 세 사람의 신식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수준이 매우 높지 않은 이상 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백미 역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개의치 말게. 우리 세 사람은 귀안성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으니 신중을 기해야 해. 도우가 귀안성을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잡고 있는 도우의 신식을 파괴할 수밖에 없네.”
일진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과분한 처사이긴 했다. 한제가 다른 의도 없이 그저 이곳을 살피기 위해 신식을 뻗은 것뿐이라는 사실도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들도 다른 도시를 신식으로 살피는 일 정도는 해왔다. 다만 오늘은 귀안성에서 큰 행사가 열리는 만큼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천운성의 수련자들은 귀안 시장이 열리면 그들 진도삼자가 안전을 책임질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함부로 신식을 펼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었다. 한데 상대는 이런 존중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뒤늦게 잘못을 시인한다 해도 소용없었다.
‘저자를 엄중히 벌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신식을 펼치려 드는 자가 많을 거야. 그러니 강하게 벌해야지.’
“셋을 세겠다!”
일진자가 덤덤하게 외쳤다. 규열기 초기 수준인 수련자 한 명은 그들에게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상대가 천운종의 사람이라고는 하나 이 수련자 한 명을 위해 천운자가 직접 찾아오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진도삼자는 기회를 주었으니 만약 상대가 멋대로 굴다가 신식이 파괴되는 것에 대해서는 천운자도 따질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상대가 대나검종의 제자였다면 일진자의 행동은 달라졌을 터였다. 검존 능천후는 제자를 싸고돌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하나! 둘! 셋! 좋다, 우리를 원망하지 말거라!”
셋을 센 일진자는 차게 코웃음을 쳤다. 그 순간, 세 사람의 신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용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더니 입을 쩍 벌려 한제의 신식에게 달려들었다. 금방이라도 한제의 신식을 깨부술 것 같았다.
“지나치군!”
그때, 한제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제의 신식도 저지하지 못한 귀안성의 금제 진법이 그의 본체를 저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한제가 허공으로 숨어들어 모습을 숨긴 그 순간, 귀안성의 금제는 격렬하게 번득였고 콰르릉 하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금제가 무너져 내린 순간, 귀안성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한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거대한 용이 된 신식 하나를 왼손에 움켜쥐었다. 그 신식은 몸부림을 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한제가 내던진 순간, 그 신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용은 그대로 와해됐다.
귀안성 내, 매우 화려한 한 건물의 동쪽에서 세 번째 방에는 청의의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무척 엄숙한 표정의 노인이 돌연 두 눈을 번쩍 뜨더니 피를 왈칵 토해내며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