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73
한데 소녀의 용모는 어딘가 일진자와 닮아 있었다.
한제의 시선에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다만 그 와중에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제를 힐끗거렸다.
한제는 피식 웃었다. 똑똑하고 눈치 빠른 한제는 진도삼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박에 파악할 수 있었다. 방금 그들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던 사이였으나 수련계에서는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진도삼자는 자기들끼리만 있는 곳에 한제를 불러내면 상대가 오해를 할 수도 있고 또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어려울 것이라 여겨 일진자의 가족인 듯한 여인을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를 이곳에 부른 것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악의도 없다는 것을 한제에게 알리기 위함일 터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겨우 원영기 수준에 불과한 어린 여인을 이곳으로 불러놓았을 리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일진자는 한제에게 소녀를 소개했다.
“이 형, 이 아이는 제 가문의 후배입니다. 철이 없는 아이이니 앞으로 잘 보살펴 주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이번에는 소녀를 향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이야, 이 분은 이 선배님이시다. 수준이 매우 높으신 분이니 이분을 만난 것만으로도 네게는 큰 행운일 게야.”
소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한제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영이라 합니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소녀의 목소리는 매우 듣기에 좋아 마치 뼛속까지 스미는 듯했다.
한데 그녀를 살피던 한제는 흠칫 놀랐다.
“알아채셨겠지만 제 손녀인 이 아이는 태생적인 수령체(水靈體)입니다. 다른 방면이야 저를 비롯한 수준 높은 이들이 어찌 가렸지만 목소리만큼은 그럴 수가 없더군요. 하여 곁에 두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자질을 가지고 밖에 나갔다가는 나쁜 마음을 품은 수련자들이 단로(丹爐)로 삼으려 야단일 테니까요.”
일진자가 쓰게 웃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령체라면 그 무엇보다 단로로 쓰기에 좋았다.
허나 일진자 곁에 있는 이상 소녀는 다른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진도삼자의 품에 있는 이 소녀를 노릴 사람은 없을 테니까.
더구나 진도삼자는 셋에 불과하지만 정말 생사의 위기가 닥친다면 이들을 도우러 나설 이가 적지 않을 터였다.
소녀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한제는 잠시 슬퍼졌으나 곧 감정을 추스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속에서는 짙은 씁쓸함이 피어올랐다. 아주 오래 전 묻혀있던 기억이 끄집어내어지는 듯했다.
‘그녀도 태생적인 수령체였지.’
속으로 한숨을 내쉰 한제는 도저히 잊을 수도 완벽하게 봉인할 수도 없는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완벽하게 묻고 봉인했다고 생각해도 비슷한 상황이 닥쳐오면 그 봉인은 여지없이 열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속에서는 덮거나 가릴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한제의 시선이 다시 한 번 그 소녀에게 닿았다. 소녀는 쭈뼛거리면서 고개를 숙인 채로 다시는 한제를 보지 못했다.
영이
저물대를 두드린 한제의 손에 밀짚모자가 나타났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밀짚모자를 보던 한제는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은 지인이 준 것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기운을 덮을 수 있습니다. 일진자 도우가 제련한다면 그 위력은 더욱 막강해지겠지요. 이걸 이 아이에게 씌우면 좋을 듯하군요.”
한제의 제안에 소녀는 코를 찡긋거렸다. 그 밀짚모자는 전혀 예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일진자는 감탄한 눈으로 그 모자를 들어 살폈다.
“이 형, 이건 선보(仙寶)는 아니지만 매우 정교한 물건 아닙니까? 이 안에 배어 있는 금제도 매우 많아 짧은 시간에는 다 살필 수도 없을 정도군요. 이런 금제들이 서로 얽혀 엄밀하게 모든 기운을 가리는 작용을 하고 있으니 금제의 대가라면 이 모자를 가지고 더욱 더 많은 금제들을 만들어내고 이것을 통해 금제의 수준을 높일 수 있을 겁니다. 이 형, 이리 귀한 것을⋯⋯.”
그제야 소녀도 밀짚모자에 흥미가 생긴 듯했다.
한제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제게는 쓸모없는 물건입니다. 이 아이에게 주십시오.”
일진자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소녀를 바라보는 한제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이내 그는 다시 저물대에서 이번에는 세 개의 방울을 꺼냈다.
“이것도 네게 주마.”
소녀는 기쁜 눈빛을 번득이며 방울을 받아들고 살짝 흔들었다. 맑은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방울이 더욱 마음에 들었는지 소녀는 한제를 향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 목소리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애교가 넘쳤다. 다만 한제에게는 그 목소리도 아무런 위력을 갖지 못했다.
일진자는 그 방울을 바라보았다. 식견이 풍부한 그는 단박에 그 방울 역시 범상치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이 도우, 정말 감사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자신들인데 자신의 후손이 상대에게 귀중한 보물을 선물 받았다는 사실에 그는 내심 부끄러워졌다. 이에 잠시 고민하던 그는 저물대에서 검은 돌 하나를 꺼냈다.
“이 도우, 이 천명석(天冥石)을 받아주십시오. 원신을 의탁하여 분신을 만들거나 예비용 신통술을 저장해놓을 공간에 이 천명석이 필요하지요.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제 체면이 더 깎여나갈 겁니다.”
한제는 그 돌을 받아 신식으로 잠시 살피고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너무도 신기한 이 돌은 수많은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기이한 기운을 발산했다. 그래서 그 안에 신식을 넣어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통술도 저장해 놓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선유족(仙遺族)의 부적과도 비슷했다.
뿐만 아니라 분신으로도 만들 수 있는, 매우 실용적인 보물이었다. 매우 귀중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희귀한 것이었다.
한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 천명석을 저물대에 챙겼다.
“제가 어리석었군요. 아직도 이 두 사제를 소개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쪽은 제 둘째 사제인 류월룡입니다. 도호(道號)로 일용자라고 부르지요.”
청의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이 형 앞에서 어찌 도호로 불릴 수 있겠습니까? 본명으로 불러주셔도 좋습니다.”
“이쪽은 제 둘째 사제 진성한, 도호는 일성자입니다.”
보라색 옷을 입은 중년 사내의 수준은 셋 중 가장 낮았음에도 규열기 초기였다. 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저 역시 본명으로 불러주십시오.”
“이 형의 도호는 무엇입니까?”
소개를 마친 일진자가 한제를 향해 물었다.
수련계에서는 수준 낮은 수련자들 중에도 도호를 쓰는 이들이 있지만 그런 이들의 도호는 넓게 알려지지 못했다. 정말 수준 높은 수련자들의 도호와는 의미와는 전혀 달랐다. 특히 두 번째 단계에 이른 수련자들의 도호는 삶의 방식이나 특성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제는 도호가 없었다. 굳이 꼽자면 나천성역에서 엄청난 살육을 저지르고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얻게 된 마도자 정도였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제 도호는 마도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일진자를 비롯한 세 사람은 피비린내 어린 기운이 훅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한제가 금방이라도 원고 시대의 마수가 되어 엄청난 살육을 저지를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방금 막 다른 곳에서 돌아온 상태이고 그전에도 천운성에 머무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지요. 그러니 아마 여러분들께서도 제 도호를 들어보지는 못하셨을 겁니다.”
말을 마친 한제는 잔을 들어 술을 한 잔 마셨다.
고신의 육신은 대부분의 독소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한제는 신식으로 한 번 자신의 몸을 훑어 술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술잔을 내려놓자 영이라 불린 아름다운 소녀가 다가와 잔을 새로 채워준 뒤 다시 일진자의 곁으로 돌아가 예쁜 눈으로 한제를 힐끔거렸다.
네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어느덧 밝은 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네 사람이 제법 가까워졌을 무렵, 맑은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일진자는 술잔을 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속세의 모든 것과 절연을 해야 한다지요. 그렇게 속세의 모든 것과 연을 끊어내야만 큰 도를 이룰 수 있다고요. 하지만 일평생 모든 연을 끊어냈어도 오직 가족만은 끊어낼 수가 없더이다.”
“끊어낼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수련자는 하늘마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찌 세간의 소문을 두려워하십니까? 어떤 곳에서는 가문 단위로 수련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강력한 수련자들이 다수 배출되었지요. 그러니 모든 것은 다 마음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일진자는 깨달음을 얻은 듯 들고 있던 술잔을 한참 동안 내려놓지 못했다.
“가족 단위의 수행이라 함은, 나천성역 수련자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일용자는 자신의 물음에 한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요. 가족 단위로 수련을 해오면서 그렇게까지 발전하다니요. 수련자 연맹의 통지가 없었다면 전 믿지 못했을 겁니다. 이번에도 수련자 연맹을 패퇴시켰으니 말입니다.”
그때, 저 멀리 밤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 밝은 달을 가렸다.
사방이 습해지는가 싶더니 한 줄기 전광이 하늘을 가르며 번쩍 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콩알만 한 빗방울들이 퍼붓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땅에 떨어지며 튀기는 빗방울로 심지어 옅은 물안개까지 피어올랐다.
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얼른 정자 가장자리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일진자는 천둥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이맘때면 천운성(天運星)의 날씨는 변덕이 매우 심해지지요.”
그 말에 보라색 옷을 입은 중년 사내, 일성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꼭 괴팍한 수련자 같지 않습니까? 변덕이 심하고 짐작이 불가능한 점이 꼭 닮았습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한제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는 맹렬히 고개를 들어 정자 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손에 든 술잔은 그대로 멎어 있었다.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넋을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좀 전까지 백미에 대해 생각하느라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는 느낌이었다.
‘사람의 성격처럼 변덕이 심하고 짐작이 불가능하다. 이전에 백미는 몇 개월만 기다리면 천운성의 날씨가 급격하게 변할 것이라 했다. 그럼 흐린 날과 맑은 날이 교차되는 천운성의 독특한 풍광이 나타날 거라고…
별것 아닌 말 같지만 실제로는 깊은 뜻이 담겨 있어! 천운성의 날씨가 변덕이 심하다는 것은 곧 천운자가 변덕이 심하다는 뜻. 수많은 분신이 수시로 천운자의 몸을 장악하면서 볼 때마다 다른 사람 같다고 느낀 것처럼!’
돌연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한제의 모습에 일진자 등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후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조심했다.
잠시 후, 생각을 가다듬은 한제는 좀 전과 달리 머리가 맑아져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백미의 언행을 떠올린 그는 어렴풋이 무언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뒷산에 누가 심어놓았는지도 모르는, 영원히 꽃을 피우지 않는 백양목(白陽木)에 별안간 꽃이 피었다는 게 그나마 화젯거리였달까? 한데 그 꽃은 하얀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고 피어나자마자 바로 죽어 안개로 변했어. 모두가 희한하게 여겼지. 나도 당시 그곳에 있었는데 그 꽃을 살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네.”
당시 백미는 그리 말했다.
‘백양목은 바로 백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구나! 영원히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건 자신이 남자이기 때문에 결코 여자가 될 수 없다는 뜻! 한데 그런 백양목에 꽃이 피었다. 또한 그 꽃이 하얀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다. 이는 자신이 어떤 이유로 인해 남자에서 여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허나 그 꽃이 피자마자 죽었다는 것은 그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인가?’
그러고 보면 백미는 공법에 대해 물었을 때 정색을 했다. 아마도 이는 한제로 하여금 이전의 언행들을 더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려는 뜻이었을 터이다. 공법이 쌍욕선결(雙欲仙訣)이라 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