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74
‘그의 체내에 음기가 흐르면서 형성되는 기이한 표식은 평소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백미가 쌍욕선결이라는 말을 한 뒤에야 드러났지. 그 역시 내게 보여주려 했던 거야. 백미는 천운자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된 것 역시 천운자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바로 백미 그가 날 천운종 밖으로 데리고 나온 이유로군.’
한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진도삼자(塵道三子)를 향해 포권을 했다.
“급히 할 일이 생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말을 마친 한제는 허이국을 저물대에 집어넣은 뒤 곧장 사라졌다.
진도삼자는 멍하니 한제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한편, 한제는 백미의 방문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천운자의 비밀을 굳이 캐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오히려 천운자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려면 백미에게 대체 어떤 일이 생겼던 것인지 알아야 했다.
한데 한제는 백미의 방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금제의 파동을 느끼고는 흠칫했다. 상당히 옅은 파동이라 바로 앞까지 오지 않았다면 감지할 수 없었을 터였다.
‘뭔가 이상해!’
눈을 번득이던 한제는 곧장 신식을 뻗었다. 한데 그의 신식이 들어선 찰나, 방에서는 금제의 파동이 증폭되었다.
쾅!
한제의 신식과 금제의 파동이 충돌한 순간, 멀리 떨어진 정자 안에 있던 진도삼자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제는 억지로 모든 금제를 제거했지만 방에는 아무도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백미가 사라진 것이다.
‘백미의 수준으로는 절대 나에게서 몰래 빠져나갈 수는 없어!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으면서 이런 금제를 배치할 수도 없지. 분명 누군가에게 납치된 거다! 그리고 그를 데려간 사람의 수준은 분명 나보다 훨씬 높다!’
한제의 얼굴은 차게 굳었고 두 눈은 번득였다.
‘잠깐! 뭔가 이상하다. 누군가가 백미를 끌고 갔다면 이런 금제를 방에 배치해두었을 리가⋯⋯.’
순간 한제는 냉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 그는 높은 하늘 위에 떠 있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번개가 번쩍였으며, 천둥이 울렸다.
한제는 신식을 넓게 펼쳤지만 여전히 백미의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허나 백미가 이 부근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식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아주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임을 한제는 알고 있었다.
진상을 깨닫다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려 하늘을 가리킨 한제가 낮게 호령했다.
“환우(喚雨)!”
뒤이어 그가 손을 흔들자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나타났다. 그 빛에 대지가 밝아진 순간, 빗방울들은 굳은 듯 허공에 그대로 멈췄다.
뒤이어 보이지 않는 힘이 한제의 손가락에서 발산되면서 찰나의 순간 반경 수만 리의 빗방울들을 뒤덮으면서 모두 허공에 머물렀다.
새롭게 응결된 빗방울들 역시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미 떨어져 내리고 있던 빗방울들마저 모두 제자리에 멈춰섰고 각각의 빗방울에는 기이한 힘이 맴돌고 있었다.
순간, 원력이 응집되어 각 빗방울들로 녹아들더니 눈 깜짝할 사이 밝게 빛났다.
세상의 원력이 용솟음치는 상황에 귀안성의 모든 수준 높은 수련자들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진도삼자의 눈은 충격으로 뒤덮였다.
“이런 신통력은 정열기 수준 수련자만 발휘할 수 있다!”
일진자는 찬 숨을 들이마시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편, 한제는 그 무렵 양팔을 크게 휘둘렀다.
콰르릉!
순간, 허공에 멈춰 있던 수많은 빗방울이 한 차례 폭풍을 형성하더니 한제 곁으로 몰려들어 눈 깜짝할 사이 거대한 회오리가 되었다.
한제는 그 회오리에 신식을 녹여 넣으면서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린 뒤 대지를 가리켰다.
순간 회오리는 다시 수많은 빗방울로 흩어졌다.
각각의 빗방울에 깃든 한제의 신식은 반경 수만 리에서 끝없이 뻗어나갔다. 마치 이 수많은 빗방울 하나하나가 그의 분신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각 빗방울들은 한제가 세밀한 부분까지 살필 수 있도록 널리 퍼져나갔다.
그 신식을 통해 탐색을 하던 한제의 눈빛이 어느 순간 귀안성 서쪽 수천 리 떨어진 어느 산골짜기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한제는 한 줄기 전광이 되어 질주했다.
이 산골짜기에는 금제가 걸려 있는 곳이 있었는데 그 금제는 아무런 파동도 발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방금과 같은 방법이 아니었다면 발견하기 힘들었을 터였다.
한제가 그 근처까지 다가가자 금제에 돌연 한 줄기 균열이 일더니 그 안쪽으로부터 혼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제, 들어오시게.”
‘백미!’
한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화들짝 놀랐다. 그 목소리는 백미의 것이었으나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본래 백미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워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였는데 방금 들은 목소리는 매우 탁했고 듣는 순간 남자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한제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 산골짜기로 들어섰다.
이 산골짜기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듯 비에 젖은 흔적이 없었고 꽃과 풀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 꽃과 풀들은 모두 노랗게 마른 채였고 죽은 듯 짙은 음기만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산골짜기 안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백미였다.
허나 한제가 알던 백미와는 그 기운이 전혀 달랐다. 덤덤한 표정과 음산하면서도 부드러운 백미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고 그 대신 단단하고 전광처럼 번득이는 눈빛과 냉랭한 기운만을 풍기고 있었다. 또한 지금 그는 여성스러운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냉랭하고 잘생긴 사내일 뿐이었다.
“사제, 놀랐는가?”
백미가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했던 말에 숨겨진 목적을 이해한 모양이군.”
백미는 산골짜기에 드리운 금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체내에 존재하는 음기는 이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이미 실체화되기 시작했을 만큼 짙은 음기로 백미의 수준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개 수련자의 체내에 존재하기는 불가능할 정도였다. 진즉 시체가 되었어야 마땅했다.
한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사제가 이렇게 빨리 내 말을 간파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네.”
백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3개월은 더 있어야 발작할 줄 알았지. 그리고 그 안에 사제의 도움을 받는다면 버텨낼 가능성이 2할은 될 거라 생각했건만 안타깝게도 나는 여전히 스승님의 계획에서 벗어날 수가 없군.”
한제는 말없이 백미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묘시. 스승님이 폐관수련을 하실 때지. 묘시가 지나면 스승님은 나의 상태를 파악하고 곧장 이곳으로 오실 걸세. 그전에 이야기를 좀 해주지.”
백미는 고통스런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천운성의 한 부잣집 일반인 가정에서 태어났지. 내가 태어나던 날 천운성에는 붉은 노을이 온 하늘을 덮었다더군. 내가 수련자의 길에 오른 후 처음으로 고향에 돌아간 날에야 나는 그 붉은 노을이 진정한 양(陽)이라 불린다는 것을 알게 됐네. 내가 태어난 날은 바로 수천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극양일(極陽日)이었던 거지. 조사해보니 극양일에 태어나려던 아이들은 모두 어머니 체내에서 사산되었더군. 그나마 남자아이인 경우에는 죽더라도 태아의 시체로 남아 있었던 반면 여자아이는 그대로 흩어져 사라졌다네.”
마치 원치 않는 기억을 되새기는 듯 백미의 눈에 점점 고통이 들어찼다.
“내게는 쌍둥이 여동생이 하나 있었지. 극양일에는 음기가 극에 달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나는 그 극음(極陰)의 순간으로 변하던 때에 태어났네. 내 여동생은 흩어져 사라지면서 극음의 기운을 어느 정도 흡수했지. 덕분에 그 애의 육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영혼만은 나의 육신에 스며들게 됐네.”
백미의 목소리는 깊은 회한에 잠긴 듯했다.
“본래는 모든 것이 평안했어. 여동생의 영혼은 내 육신에 스며들어 있긴 했지만 줄곧 잠들어 있었지. 한데 일곱 살이 되던 해, 나는 한 천운종 수련자의 눈에 들어 수련계에 입문했네. 나의 자질은 제법 훌륭해 성장 속도가 매우 빨랐고 곧 정식 제자로 발탁됐어. 그렇게 수백 년이 흘러 나는 영변기에 이르렀네. 거기에 우연한 기회를 얻어 자계(紫系)의 제자 중 하나가 되기까지 했어.”
한제는 묵묵히 백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허나 수준이 높아질수록 나는 점차 내 영혼의 반은 여동생에게 속해 있다는 것과 그녀의 영혼이 점차 깨어나려는 조짐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원래는 여동생이 깨어난 뒤에 스승님께 도움을 청해 그것을 분리해내고 윤회의 굴레로 되돌려줄 생각이었지. 한데…”
백미는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난 내 안에서 여동생의 영혼이 완전하게 깨어나려 한 그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네. 그때 어째서인지 돌연 조성살이 나타나 나를 공격했어! 막 깨어나려던 내 여동생의 영혼은 그 공격으로 내 영혼과 더욱 긴밀하게 융합되었지. 그 후로 난 남자이면서 남자가 아니고 여자이면서 여자가 아닌 상태가 되었다네.”
백미의 눈에 하늘을 뒤덮을 듯 강력한 한이 어렸다.
“절망감에 빠진 나는 스승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지. 스승님은 내게 음양쌍욕결(陰陽雙欲訣)을 전수해주시면서 그것을 9단계까지 수련한다면 나와 여동생의 영혼은 분리될 거라고 하셨어. 나는 스승님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지. 음양쌍욕결을 수련하자 기이한 변화들이 일어났고 수준도 맹렬하게 높아졌네. 허나 내가 원하는 것은 여동생의 영혼을 윤회의 굴레로 되돌려놓는 것뿐이었어.”
백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또 수백 년이 흘렀지. 그동안 자네는 천운성을 떠났고 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손쓰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네.”
그의 눈은 짙은 슬픔에 잠겼다. 옷섶을 헤치자 가슴팍에는 두 팔에서 뻗어 나온 푸른색과 붉은색의 가느다란 선이 식물의 가지처럼 교차해 있었다.
“보이는가? 이 표식이 발작할 때마다 체내의 음기가 커지고 있네. 그럼 음양쌍욕결은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수련이 돼.”
한제는 묵묵히 이어질 백미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태어났을 때 찾아온 극양일 역시 스승님의 조화였네. 이 모든 것이 그분의 계획이었던 거지. 스승님은 수준이 병목에 이르러 점점 마도(魔道)에 잠식되고 있고 나는 그저 실험 대상에 불과한 거야. 극양일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극음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체내의 음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극양에 이르게 될 터. 스승님은 그 순간을 기다리시는 거야. 그분은 이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같은 실험을 해보셨네. 허나 그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살아남은 것은 나 하나뿐이지.”
그 말에 한제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극양과 극음이라는 것은 대체 뭐지? 천운자가 이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얻으려는 것이 뭘까?’
한제는 직감적으로 백미의 말이 7할 정도는 믿을 만하다고 느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난 그분 앞에서 한 마리 개미에 불과하겠지. 그리고 개미가 무슨 짓을 해도 결국 세상은 변하지 않아. 허나, 실험 대상에 불과했던 나는 천운자를 깜짝 놀라게 해보려 하네! 불현듯 떠오른 이 생각까지 그가 속속들이 알고 있지는 않겠지.”
백미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으나 그 미소는 자조적이었다.
“이제 누구도 나를 구할 수는 없어. 허나 죽기 전에 난 지난 1천 년간 체내에서 묵혀온, 천운자가 바라던 이 극양의 씨앗을 자네에게 넘기려 하네. 어떤가? 받아보겠는가?”
그의 목소리는 산골짜기를 왕왕 울리며 천둥처럼 우렁차게 한제의 귀에 꽂혔다.
한제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비록 그것이 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계획하고 공을 들인 것을 가로채버린다면 천운자는 당연하게 분노할 것이었다.
“곧 천운자가 들이닥칠 걸세. 사제, 결정하게. 받아보겠는가?”
백미는 더 기다려도 한제의 대답이 없자 실망한 듯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천운자는 이것까지 내다본 것인가? 내가 자네에게 넘기려 하는 것도 자네가 받지 않을 것도 내다본 것인지도 모르지. 아니, 어쩌면 자네가 받아 곧장 그에게 넘길지도 모르겠군. 스승님, 당신은 정말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겁니까? 지난 수만 년 동안 단 한 번도 예언이 틀린 적이 없는 겁니까? 정말 믿을 수가 없군!”
그때,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것은 완벽한 천운자다. 그런 상태의 그에게는 대적 자체가 불가능해. 시작도 전에 진 것이나 다름없지. 허나 만약⋯⋯ 그의 예언을 틀리게 만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