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75
한제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감히 저것을 받지 못할 것이라 여길 것이다. 내가 저것을 취한다면 당연히 나를 죽이려 들겠지! 그렇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그의 예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과 진배없어!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한제의 눈에 갈등의 빛이 드러났다. 과감한 결단력이 무기인 그에게서는 좀체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받는다면 생사의 위기가 닥쳐올 것이다. 허나 받지 않는다면? 그랬다가는 난 평생 천운자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몰라! 그것만은…’
그렇게 된다면 두려움에 잠식된 그는 인과에 대한 깨달음도 본원의 힘도 수련자의 길을 계속 걷는 데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고 현재 수준에 머문 채 천운자 아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난 하늘을 거스르는 수련자다!’
한제의 눈이 광기와도 같은 빛이 번득였다. 그는 요령의 땅에서 문정기에 이르렀을 당시 품었던, 하늘을 거스르겠다는 의지를 떠올렸다. 겨우 천운자를 하늘의 위엄에 비할 수 있겠는가!
물론 백미는 호의에서 자신에게 극양의 씨앗을 건네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마지막으로 천운자에게 대적해 한 번이라도 그의 예언을 빗나가게 하고 싶은 것뿐이다. 이를 위해 목숨을 담보고 한제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한제는 광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받겠소.”
그때, 천운성 밖 우주에서는 한 줄기 긴 빛이 질주하듯 달려들고 있었다. 그 빛 안에는 보라색 옷을 입은 사내가 있었는데 그의 거친 얼굴에는 고고함과 오만함이 가득했다.
“녀석의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되었을지 궁금하군. 젠장, 봉란성(鳳欒星) 여인들이 그토록 사나울 줄이야. 나를 도와줄 자가 없으니 그렇게 무섭게 달려든 것이겠지. 한제 녀석을 찾아서 그 여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
일지찬천운(一指簒天運)
묘시가 갓 지난 시각, 백미는 굳은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주위를 훑어보다가 마지막으로 삶의 끝자락에서 고향을 찾은 노인과도 같은 눈빛으로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고 그 순간, 그의 체내를 가득 채우고 있던 짙은 음기가 성난 파도처럼 증폭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발생한 일이었다. 산골짜기 내의 말라버린 풀과 꽃들은 분분히 가루로 흩어져 사라졌고 사방의 벽에는 쩌적 소리와 함께 서늘한 성에가 끼었다.
뒤이어 짙은 음기가 백미의 체내에서 끝없이 발산되어 정수리 위로 솟더니 회오리를 이루었다. 온전한 음기로만 이루어진 회오리는 회전할수록 점점 커져갔다.
회오리는 점점 빨라지더니 순식간에 폭풍을 형성해 사방을 휩쓸면서 산골짜기를 얼음으로 봉해버렸다.
그 안에서 휘날리던 풀과 꽃들 역시 허공에 그대로 멈춰버렸다. 또한 산골짜기가 미세하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성난 하늘이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큰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졌고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내리 떨어졌다.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물이 곳곳에 고였고 그 위로 또다시 빗방울이 떨어져 웅덩이에 파문을 일으켰다.
허나 보이지 않는 덮개가 씌워지기라도 한 듯, 빗방울은 산골짜기로 접근하지 못하고 무언가에 가로막혔다가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산골짜기의 음기는 점점 짙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산골짜기를 뒤덮은 덮개가 쩍 하고 갈라지면서 음기가 피어올랐다.
형태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덮개 밖으로 나간 음기는 쩌적 하는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균열 안으로 떨어져 내리려던 빗물은 지면에 닿기 전에 얼음 결정이 되었다.
음기가 훑고 지나가는 곳의 빗방울들은 모두 얼음이 되었고 머지않아 수많은 진주가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과도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천둥번개가 내리치면서 얼음 결정은 더욱 밝게 번득였다.
펑!
잠시 후, 산골짜기를 감쌌던 금제는 결국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큰 덩어리의 음기들이 곧장 밖으로 튀어 나가 하늘을 휩쓸면서 산골짜기를 중심으로 사방의 빗물들이 얼음 결정으로 응결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세상 모든 빗방울이 얼음 결정으로 굳어졌다.
한제의 눈이 기이하게 번득였다. 이 음기는 너무나 짙어 고신의 육신을 가진 그조차도 감당하기 버거웠다.
저 앞에 가부좌를 튼 백미의 긴 머리와 옷이 사방으로 나부꼈다. 그의 체내에 존재하는 음기는 너무나 짙어 이미 절정에 이르러 있었고 육신은 엄청난 속도로 짙푸른 얼음으로 뒤덮였다.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짙푸른 얼음 결정이 백미의 온몸을 뒤덮더니 미간으로 응집되었고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돋친 형태가 되었다.
뒤이어 백미의 미간에는 기이한 표식이 나타났다. 일전에 그의 체내에서 보았던, 음기로 이루어진 그 표식이었다.
표식은 어스름하게 번득였고 백미는 그때마다 고통스러운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에 푸른 정맥이 돋아나면서 체내의 음기는 그 표식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백미의 몸을 뒤덮은 짙푸른 얼음층은 조금 더 두꺼워졌고 체내의 살과 피마저 점차 얼음 결정과 동화해 그 일부분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체내의 마지막 음기까지 그 표식에 흡수되던 순간, 백미의 온몸이 바르르 떨리더니 목 아래 부분의 살과 피가 얼음 결정으로 변해버렸고 미간의 표식은 보라색이 깃든 검은색으로 변했다. 그 안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음기가 깃들어 있었다.
“크아아아!”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백미는 마지막으로 포효를 내질렀다. 그 포효에는 천운자에 대한 원한과 무력감, 삶에 대한 집착 그리고 약간의 해탈감이 어려 있었다.
그 포효에 한제는 충격을 받은 듯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는 백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천운자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자 일종의 거역이었다.
백미의 포효는 반경 수만 리까지 퍼져나갔지만 요란한 천둥소리와 빗소리에 묻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천운자! 나의 죽음으로 네 예언을 틀리게 할 수만 있다면 난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 그리고 구천에서 너를 비웃어줄 것이다! 크하하하!”
광기 어린 웃음이 터져나온 순간, 백미의 체내에 존재하던 모든 음기를 흡수한 미간의 표식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켜 주먹만 한 회오리를 이루더니 천둥과 같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콰르릉!
그리고 그 순간, 회오리가 된 표식에서는 금색의 빛이 떠올랐고 모든 음기는 그 빛으로 몰려들었다.
잠시 후, 음기는 사라지고 오직 금빛의 점 하나만 남게 되었다. 태양처럼 눈부신 빛을 발하는 그 점은 느릿하게 한제에게 다가왔다.
백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모든 생기를 잃은 듯 광기 어린 웃음을 짓던 모습 그대로 얼음 조각이 되어 있었다.
영원히 남아 있을 그 얼음 조각에서는 짙은 저항심과 반항심이 물씬 느껴졌다.
한제는 백미의 얼음 조각에서 눈을 돌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극양의 씨앗을 바라보았다. 흘러넘칠 듯 짙은 생기와 극도의 열감이 느껴졌다.
“극양(極陽)!”
한제가 극양의 씨앗을 움켜쥔 순간, 음기로 인해 얼어붙었던 것들이 모두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산골짜기의 얼음이 빠르게 녹아내리면서 곳곳에 초록 풀이 돋아났고 산골짜기 밖에서는 얼음 결정으로 봉인되어 있던 빗방울들이 녹아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묘시가 지났다.
★ ★ ★
천운종에는 기묘하게 생긴 산이 하나 있다. 마치 뾰족한 끝부분만 남기고 모두 땅에 묻힌 삼지창 같은 형태의 산으로 뒤편에서는 일곱 가지 색깔의 빛이 발산되었다.
선기(仙氣)가 진동하는 이곳은 마치 선경(仙境) 같았다.
그 중앙의 산꼭대기에는 천운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백의(白衣)와 백발을 바람에 흩날리는 그에게서는 신선의 풍모가 물씬 풍겼다.
묘시에서 진시로 넘어가던 그 순간, 반쯤 뜬 천운자의 두 눈 안에는 구름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했고 해와 달과 별까지도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 눈에 세월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덤덤한 눈으로 주위를 한참 둘러보던 천운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하지. 영겁과도 같은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저 허황된 것일 뿐. 그들은 한낱 미물의 눈으로 보고 원하는 것뿐이다. 이 천운자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의 운명이 곧 하늘이 운명이기를 바랄 뿐이고 나의 생각이 곧 하늘의 생각이기를 바랄 뿐이며 하늘의 도가 나의 도에 섞여들기를 바랄 뿐!”
천운자는 저 멀리 떨어진 귀안성(鬼眼城)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의 눈에 기이한 빛이 번득였다.
“이한제, 겁도 없구나.”
말을 마친 그가 오른손 검지로 전방을 가리킨 순간, 천운성 바깥의 우주에 구름이 용솟음치더니 거대한 소리와 함께 세상의 원력이 응집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천운성 바깥에 두께가 1천 척, 길이는 1만 척에 이르는 거대한 손가락의 허상이 나타났고 원력은 엄청난 속도로 그 손가락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따라 허상에 불과했던 손가락은 순식간에 실체화되었고 마치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지문들까지 또렷해졌다.
말 그대로 거대했지만 고신의 손가락은 아니었다. 그것은 천운자가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만들어낸 신통력인 일지찬천운(一指簒天運)에 의해 나타난 것이었다.
그 거대한 손가락은 천운성을 향해 느릿하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연맹의 장로 중 하나인 천운자의 신통력은 당연히 천지개벽할 수준으로 한창 때에는 현보 상인조차 그와 맞서기를 두려워했을 정도였다.
비록 그가 연맹의 장로단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누구도 감히 그와 척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허나 천운자는 매우 조용히 지내왔기에 점차 그의 힘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줄었다.
그런 천운자가 불러낸 그 거대한 손가락은 점차 다가와 천운성을 꾹 눌렀다. 일견 느릿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속도였다.
그 거대한 손가락의 끝에서 길이가 수천 척에 달하는 거대한 호가 나타나 일곱 빛깔 광채를 번득이면서 천운성과 충돌했다. 그 순간…
콰르릉!
엄청난 소리와 함께 천운성이 진동했고 강력한 바람이 일었다. 동시에 천운성의 모든 수련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엄이 훅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접근해온 손가락과 접촉한 부분은 무너져 내릴 기색이 었고 부서진 우주 공간은 가루가 되어 흩어지면서 눈앞의 모든 것들을 왜곡했다.
콰르릉! 쾅!
웅장한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고 거대한 손가락에 닿은 대기층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면서 일곱 색깔의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손가락이 밀고 나가면서 만들어낸 한 줄기 균열은 끊임없이 커지면서 기류를 회전시켰고 천운성의 구름층을 응집시켰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바로 귀안성으로부터 1천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산골짜기였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짙은 위압감이 내리 떨어지면서 대지 곳곳에서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균열이 일었다.
하지만 이런 천지개벽할 변화에도 그 누구도 감히 상황을 살피려 들지 못했다.
귀안성 상공에서는 억수와 같은 비와 우렁찬 천둥이 끊임없이 내리 떨어졌다. 하지만 그 거대한 손가락이 강림하자 시커먼 구름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세상 모든 힘이 그 거대한 손가락 앞에서는 길을 내주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에 앞서 다가온 호 형태의 파문은 먹구름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그 파문을 따라 흐르는 전광이 밤하늘을 밝게 물들였다.
마치 하늘마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한제는 산골짜기에서 어두운 안색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그 손가락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이 천운자의 것임을 그는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신통력이지?’
극양의 씨앗을 손에 쥔 순간 천역주가 미미하게 진동했으나, 이에 대해 살필 여유는 없었다. 한제는 극양의 씨앗을 저물대에 집어넣은 후 그 거대한 손가락을 주시했다.
거대한 손가락이 일곱 빛깔 광채에 휩싸인 채 느릿하게 다가오면서 만들어낸 균열이 한제를 향해 점차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상상을 초월하는 위압감이 하늘에서 내려와 한제의 사방에 응집되었다.
“천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