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84
‘설마… 저자가 당시 능천후의 공격을 받아낸 것이 그저 좋은 법보 덕이 아니었단 말인가?’
노인의 눈이 살기로 번득였다. 무자비하기로 유명한 그는 한제를 맞닥뜨리자마자 살의를 느꼈다. 그리고 그 살의는 탐욕에서 기인했다. 그는 한제가 탈것으로 삼은 거마족이 욕심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선부의 열쇠가 더욱 탐났다.
‘이 녀석을 죽이고 선부를 갖게 된다면 요령의 땅에 들어갈 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입술을 핥으며 노인은 뒤로 물러나면서 곧장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더니 자신의 몸 곳곳을 두드렸다. 그때마다 그의 몸은 바르르 진동했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으며, 표정은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똑똑하게 굴어라. 선부의 열쇠와 저 거마족을 넘긴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허나 둘 중 하나라도 내놓지 않는다면 오늘이 제삿날이 될 것이다!”
노인이 매섭게 외치며 두 손을 앞으로 강하게 떠밀었다.
순간 그의 거대한 육신은 기이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빠른 속도로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변해 어느새 가죽과 뼈만 남은 해골 같은 모습으로 변해갔다. 허나 몸에서는 끔찍한 기운이 응집되더니 미간에서 눈부신 빛 한 줄기가 나타났다.
“도라부진(塗羅浮塵)!”
노인이 낮게 외친 순간 미간에서 빛이 번득이며 튀어나오더니 곧장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제는 그 빛이 대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위험은 감지할 수 있었다.
‘과연 정열기 수준이로군. 얕잡아볼 수 없겠어. 고신의 육신이 없었다면 절대로 이렇게 덤비지 못했을 거야. 특히 온몸의 피와 살의 정수를 응축시켜 만들어낸 저 빛은 결코 범상치 않다!’
한제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자 순간 콰르릉 하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원력이 용솟음쳤고 우주에는 균열이 일었다. 그 균열에서 붉은 빛이 튀어나와 응축되더니 한제의 손에서 멸신모(滅身矛)의 허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멸신모를 꺼낼 만한 상대로군!”
한제는 그 허상의 멸신모를 힘껏 내던졌다. 멸신모는 한 줄기 붉은 빛이 되어 전방에서 달려드는 강력한 빛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황량한 기운이 절정에 이르더니 창이 번득임에 따라 흘러넘칠 듯한 힘이 되어 사방을 휩쓸었다.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멸신모는 노인이 내뿜은 강력한 빛과 충돌했다. 이어지는 충돌에 강력했던 빛은 빠르게 허약해져 순식간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멸신모는 한 번 깜빡이더니 곧장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고 얼굴이 창백해진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재빨리 물러났다.
하지만 멸신모를 떨쳐내기에는 한참 부족해 순식간에 따라잡혔고 금방이라도 관통당할 것만 같았다.
찰나의 순간, 노인은 저물대에서 작고 푸른 방패를 꺼내 멸신모의 공격을 막아냈다.
퍼퍼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작은 방패는 바르르 떨며 뒤로 밀려났지만 균열은 생겨나지 않았다.
“우웩!”
노인은 곧장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혈둔술(血遁術)을 발휘하더니 푸른 빛을 발하는 방패를 쥔 채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정열기 수련자가 혈둔술을 발휘했을 때 낼 수 있는 속도는 상상을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한데 노인이 든 작은 방패를 본 한제의 눈빛이 굳었다. 그 방패에 미약한 고신의 기운이 흐르는 것을 똑똑히 느꼈기 때문이다.
‘고신의 법기(法器)!’
노인이 질주하듯 뒤로 물러나자 멸신모는 점차 흐릿해지면서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한제는 서늘한 눈빛으로 곧장 한 발 내딛었고 발아래에서 파문을 일으키며 천운성의 범위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축지성촌을 발휘했다. 이내 허공에 녹아든 한제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제 노인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고 머리가 저릿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다. 그는 다시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내며 엄청난 속도로 뒤로 물러났다.
‘축지성촌이라니! 이한제 저 녀석이 축지성촌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축지성촌은 누구나 발휘할 수 있는 술법이 아니었다. 축지성촌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수준 차이가 크지 않은 상대와의 전투에서는 불패의 고지에 오를 수 있음을 뜻했다.
‘저자의 수준은 나보다 훨씬 높은 데다가 축지성촌까지 사용할 수 있다! 이 전투는 결코⋯⋯.’
노인의 눈에 두려움의 빛이 어렸다.
질주하듯 뒤로 물러나는 그의 옆에서 돌연 파문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모습을 드러낸 한제가 곧장 오른손을 냅다 휘둘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까워 한제의 주먹은 노인으로부터 7촌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마치 노인이 주먹을 향해 달려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한제의 주먹에 어린 고신의 힘은 한 줄기 폭풍이 되어 사방을 휩쓸었다. 노인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도 도우! 자비를 베풀게나! 내 말 좀 들어보게, 내 말 좀!”
한제의 주먹은 노인의 코에서 단 1촌 떨어진 곳에 우뚝 멈춰 섰다. 노인의 얼굴은 창백했고 심장은 두방망이질 쳤으며,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죽음의 위기가 이렇게 가까이 닥쳐온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상대의 주먹에 흘러넘칠 듯 배어 있는 강렬한 힘에 노인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만약 저 주먹이 멈추지 않았다면 자신의 육신과 원신은 모두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요령의 땅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도움이 필요할 걸세. 내 오늘의 일을 사죄하는 뜻에서 돕겠네!”
싸늘한 한제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에 다급해진 노인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 이 방패도 넘기겠네. 내 법보 중 방어력이 가장 높은 물건이니 선부에 들어갈 때도 큰 도움이 될 걸세!”
말을 마친 노인은 손에 쥐고 있던 방패에서 자신의 낙인을 지운 뒤 재빨리 한제에게 넘겼다.
한제는 말없이 노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주먹을 거두고는 방패를 받아 들어 잠시 살피더니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한제가 오른손을 들어 결인을 그려 금제로 이루어진 노예 낙인을 노인의 미간에 찍혔다. 노인은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낙인은 노인의 미간에서 잠시 번득이더니 녹아들어 사라졌다.
“네 일을 다 처리한 뒤 따라오도록!”
말을 마친 한제는 휙 몸을 돌려 사라지더니 뇌길의 등 위에 다시 나타나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진즉 흑의의 사내들을 모두 처리한 대두가 입술을 핥으며 돌아왔다.
노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배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간단한 지시를 남기고는 한제 앞으로 다가왔다. 제자들은 그의 배를 몰고 멀어져갔다.
“도우의 분부대로 내 일은 다 처리했네. 내 이름은 진풍이고 도호(道號)는 부풍자라 하지. 도우의 명에 절대 복종하겠네. 요령의 땅에 가서도 약속했던 대로 전력을 다해 돕지. 대신 요령의 땅에서 돌아오면 봉인을 풀어줄 수 있겠나?”
“봉인은 깊지 않다. 풀고 싶다면 스스로 풀 수 있을 것이야.”
한제는 진풍에게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씁쓸하게 고개를 저으며 진풍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제의 말대로 규열기 수준의 봉인을 푸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감히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 심지어 한제의 이런 행태가 함정이거나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생각에 더욱 두려운 심정이었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지. 심계가 깊은 자로구나. 절대 얕잡아봐서는 안 되겠어. 그런 자가 만든 봉인이라면 틀림없이 함정이 있을 터!’
이것이야말로 한제의 노림수였다. 아직 규열기 중기 절정에 불과한 그가 정열기 수련자를 봉인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뭔가 함정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꾸며야 했다. 즉, 그의 꾀가 무형의 봉인이 된 셈이었다. 그것도 세상 그 어떤 봉인보다 훨씬 예리한 봉인이었다.
“직접 풀지는 않을 생각인가보군. 그럼 네 말대로 앞으로 말을 잘 듣는다면 요령의 땅에서 나온 뒤 풀어주도록 하지!”
한제의 덤덤한 목소리에 진풍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에 가부좌를 틀었다. 바짝 말라 있던 그의 몸은 호흡이 거듭되자 서서히 불어났다.
한제는 흥미롭다는 듯 그 모습을 살폈다.
‘저자가 수련한 공법도 정말 괴이하군! 어쨌든 저자의 도움이 있다면 요령의 땅에서 좀 더 수월하게 성공을 거둘 수 있겠지. 허나 아직 부족해.’
각자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뇌길은 빠른 속도로 우주를 가로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떨어진 곳에서 깊은 바다처럼 푸른 수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수련성에서는 짙은 영기(靈氣)가 발산되고 있었다.
‘수령성(水靈星)이로군. 진도삼자에게 속한 곳이지. 이 수련성의 이름은 일진자의 손녀 이름에서 따왔다고 하던데…’
진풍이 눈을 번쩍 뜨고는 사악하고 탐욕스런 눈으로 수령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수령체의 몸으로 태어난 그 소녀에게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진도삼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면 한참 전에 그 소녀를 데려다 단로로 제련했을 터였다.
한편, 수령성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한제는 이내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수령성은 폐관수련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지만 진도삼자의 수령성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삼을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막 그가 떠나가려는 순간, 그 수령성에서 세 갈래 빛이 튀어나왔다. 빛은 우주로 나오자마자 세 마리의 거대한 용으로 변하여 포효했다.
“어디서 온 도우들이기에 우리 진도삼자의 면전에서 얼쩡거리는가!”
포효에 섞인 일진자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러나 일진자는 곧장 뭔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헛!”
으르렁거리던 포효가 우뚝 멈추더니 용으로 변한 세 갈래의 빛 안에서 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도삼자였다.
세 사람 역시 방금 그들의 수령성에 도착한 상태였다.
이번에 귀안성에서 뜻밖의 사고가 일어난 까닭에 시장은 열리기도 전에 파했고 세 사람은 그 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심기가 불편한 상태에서 좌선을 하던 그들은 두 번째 단계에 이른 수련자의 기운이 수령성 밖에서 맴도는 것을 느끼고는 곧장 뛰쳐나온 것이다.
뇌길의 거대한 몸집을 본 그들의 비록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무척 놀란 상태였다. 연맹성역에서 거마족을 탈것으로 삼은 이는 대부분 능천후나 천운자와 같이 명성이 자자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이어 한제를 발견한 그들은 잠시 넋이 나간 듯했다. 특히 천운성에서의 전투를 직접 목격한 일진자는 한제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더더욱 놀라는 한편 한제에게 깊은 존경심이 생겨났다.
‘천운자와 능천후가 교전하도록 만들다니. 마도자 정말 만만치 않군!’
허나 그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진풍의 존재였다.
진풍은 비록 당시의 혈조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천운성에서 제법 이름난 수련자였다. 특히 그는 색을 밝히기로 유명해 영이에게도 관심을 보여 왔다. 지금은 포기한 눈치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진도삼자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영이를 기억하십니까
진도삼자가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진풍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보게, 진도삼자! 그 수령성을 내게 넘기는 것이 어떻겠나!”
순간 안색이 변한 진도삼자가 막 일갈하려던 찰나, 한제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헛소리!”
그 한 마디에 진풍은 심신이 바르르 떨렸다.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한제가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한제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진풍은 얼른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를 본 진도삼자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진자 도우, 이렇게 금방 다시 만나게 됐군요. 폐관수련할 곳을 찾던 중인데 이곳이 세 분의 고향인 줄은 몰랐군요. 다른 곳을 찾을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한제는 진도삼자에 깍듯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이에 일진자도 얼른 포권으로 예를 갖추었다. 진풍이 한제의 한 마디에 벌벌 떨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