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90
영이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긴 속눈썹을 조금 떨더니 느릿하게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별이 총총히 뜬 밤하늘이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한제를 발견했다. 달빛에 한제의 날카로운 옆얼굴이 비춰 보였다.
깨어난 뒤 그녀의 머릿속에는 봉인이 열린 듯 수많은 흐릿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 기억들은 모두 너무도 오래된 것들이었다.
영이는 다시 한제를 바라보았고 그 순간 넋을 놓게 되었다.
그녀의 눈에 초점은 없었다. 사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한제가 아니었다. 한제가 그 자리에 없었다 해도 그녀는 이 순간 넋을 놓게 됐을 터였다.
영이의 머릿속에서는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맴돌았고 결국 그녀는 날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올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을 상기할 수 있었다.
미간을 매만지던 영이는 자신을 오랜 시간 혼란스럽게 했던 그 꿈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성공했다.
“신노(神奴) 목령, 고신을 뵙습니다.”
영이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한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돌아가거라. 더는 방해하지 말고…”
한제의 말은 영이에게 가장 강력한 명령이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개 숙여 대답한 영이는 손목의 방울을 흔들었고 그러자 저 멀리서 두루미가 날아왔다. 영이는 몸을 훌쩍 날려 그 두루미에 올라탔다.
고개를 돌려 한제를 살피던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를 떠났다.
한제는 줄곧 먼 바다만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줄기 노을이 하늘 끄트머리에서 느릿하게 나타나 점차 확산되었다.
그러자 그 기이한 느낌이 또다시 강력하게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아침 해가 완벽하게 떠오를 때까지도 한제는 여전히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 ★ ★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한제는 자신이 이곳에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지도 잊은 상태였다. 심지어 그동안 진도삼자와 대두, 부풍자 등이 찾아왔는데도 한제는 이를 알아채지도 못했다.
지금 그는 그저 핏발이 선 눈으로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순간, 그에게는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해가 떠오르는 광경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 ★ ★
산봉우리로부터 10리 정도 떨어진 허공. 진도삼자는 산봉우리 위에 가부좌를 튼 채 꿈쩍도 하지 않는 한제를 바라보았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일용자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체 뭘 깨닫고 있는 걸까?”
곁에 있던 일성자는 신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정열기 수련자가 이토록 오랜 시간을 들이는 깨달음이라면 분명 엄청난 신통술이겠지!”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일진자가 고개를 저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자네들도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주위에 원력의 파동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심지어 신식조차 존재하지 않지. 그런데도 우리는 저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네.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야. 게다가 난 그가 도를 깨닫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단 말이지!”
“도를 깨닫는 것이라고?”
일용자는 화들짝 놀라 한제를 돌아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기도 하군!”
“이곳에는 원력의 파동이 없지만 반경 10리 안으로 세 걸음 들어가기도 전에 엄청난 힘에 떠밀려 나오고 말아!”
일성자가 말을 받았다.
“진입을 막는 그 거대한 힘은 마치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 같아. 며칠 전 그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포효하는 큰 바다에 마주 선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
일용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가만히 지켜보자고. 만약 정말 뭔가를 깨닫는 중이라면 우리에게는 아주 희귀한 경험이 될 거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지 모르지.”
한편, 진도삼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부풍자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살짝 눈을 번득이며 전방의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를 깨닫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아냐, 저자가 지금 뭘 하고 있건 지금이 내게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이 봉인을 해제한 뒤 어떤 변고가 일어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풍자는 극심한 갈등에 빠져들었다.
대두와 타산, 그리고 뇌길 역시 근처에 있었다. 한제가 좌선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까닭에 이들도 걱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벽의 힘
해가 뜨고 또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시간은 또 흘렀고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나갔다.
한제의 두 눈은 핏발이 잔뜩 서다 못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지금 그는 모든 것을 잊은 듯 그저 전방의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해가 뜨고 질 때마다 자신의 곁을 맴도는 맥락이 점점 또렷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제가 산봉우리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지 두 달 하고 아흐레 째 되는 날, 하늘이 어두운 구름으로 가득 덮였고 콰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맴돌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명이 터올 무렵, 콩알만 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빗방울이 떨어지자 멀리 바다에서는 하늘에 저항하듯 강렬한 파도가 몰아쳤다.
아침 해가 흐릿한 구름으로 싸인 채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이 너무 흐린 탓에 햇빛은 그대로 시커먼 구름에 먹혔다. 그럼에도 해는 그 비를 뚫고 떠오르려 애를 쓰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한제의 두 눈이 가늘게 변했다. 지난 두 달 동안 내내 기다려온, 그 중요한 순간이 다가왔다는 강렬한 직감을 느꼈다.
그는 떠오르는 해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해와 하나가 될 것만 같은 기세였다.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비가 쏟아져 내렸지만 이는 완벽한 몰입 상태인 한제의 심신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힘겹게 하늘 위로 반쯤 모습을 드러낸 해가 아직 약간은 바다 밑에 가려져 있는 그때였다.
한제는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쾅 하는 소리를 느낌과 동시에 근처에서 맴돌던 줄기줄기의 맥락이 전에 없는 속도로 빠르게 응집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온몸을 감싸던 맥락은 마침내 우뚝 멈춰서더니 전부 체내로 녹아들었다.
이 순간, 한제의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격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한제는 아침 해가 몸부림을 치며 바다 위로 느릿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마치 어미인 바다가 새끼인 태양을 낳는 것만 같았다.
여명이 밝아온 순간, 어미는 분만을 했고 태양이 태어났다.
아침 해가 태어난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뿜어져 나왔다. 이 힘은 밤중의 어둠을 찢고 몰아내는 밝은 빛이었다. 그 강력한 힘은 온 세상을 뒤집기에 충분했고 하늘을 뒤흔들기에 충분했으며, 어둠을 산산이 부숴버리기에 충분했다.
조각난 어둠은 사방으로 떠밀려 나갔고 그 어둠이 채웠던 자리는 밝은 빛으로 대체되었다.
바다와 해가 낳은, 찢긴 밤이었다.
“바로 이 힘이야!”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또다시 그 기묘한 상태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그의 시야를 채운 것은 아침 해가 떠오른 순간 어두운 밤을 찢고 몰아낸 새벽의 그 힘이었다.
‘지금이다!’
부풍자는 결심한 듯 이를 악물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봉인을 멋대로 해제할 경우 일어날 일을 걱정하던 그는 마침내 한 번의 고생으로 영원히 편안해지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바로 한제를 죽이는 것이었다.
‘저자를 죽이면 모든 봉인은 다 풀린다!’
살기 어린 눈빛으로 몸을 훌쩍 날린 부풍자는 한제가 깨달음을 얻은 그 순간을 틈타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제의 10리 안으로 진입한 순간, 그는 안색은 크게 변했다. 마치 감히 말로 형용할 수도 없는 광경을 목격한 듯 부풍자의 눈동자에는 전에 없던 두려움과 충격이 담겼다.
부풍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불처럼 타오르는 태양이었다. 그 아래로는 하늘을 뒤덮을 듯 성난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순간, 부풍자는 자신의 육신이 이미 흩어져 사라지고 끝없는 밤하늘이 된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태양이 바다에서 솟아오른 찰나, 그의 몸 곳곳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전해져왔다. 심지어 그의 원신마저 모두 그 고통에 휩싸였다. 온몸이 계속해서 찢겨져 나가는 듯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크으으!”
강렬한 죽음의 위기가 찾아온 순간, 부풍자는 놀란 표정으로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하늘을 꿰뚫을 듯 강렬한 원력이 그의 체내에서 발산되어 폭풍을 형성해 그를 겁박하던 힘에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여명이 밝아왔고 그 순간 떠밀려 나가는 밤처럼 그는 태양에서 발산된 햇빛에 펑,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관통당했다.
“크윽!”
폭풍은 갈기갈기 찢겨져 사방으로 흩어졌고 삽시간에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부풍자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그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통증에 칠공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고 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피를 토해냈다.
빨리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아무리 용을 써도 그 거대한 태양 앞에서는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덤벼!”
부풍자가 결인을 그린 오른손으로 앞을 가리키자 정열기 수준의 힘이 순간적으로 폭발했다. 직접적으로 원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열기 수련자만 가능한 일로 부풍자는 오른손을 뻗은 순간 그 능력을 발휘했다.
원력이 허공에서 줄기줄기 나타나 살아 있는 용처럼 부풍자의 근처를 맴돌았고 그 순간 그의 오른손 앞에는 주먹만 한 원력의 공이 하나 응결되었다.
이 공은 비록 크지는 않았으나 그 안에 깃든 파멸적인 힘은 어떤 규열기 수련자도 견뎌낼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그 원력이 나타난 순간, 수령성(水靈星)의 기색이 변하면서 대지가 뒤흔들렸고 진도삼자 역시 어쩔 수 없이 뒤로 밀려났다.
대두를 비롯한 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정열기 수련자의 강력한 신통력 앞에 그들은 감히 근처로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부풍자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다. 그는 코앞으로 닥쳐온 죽음의 위협과 엄청난 충격에 이미 구석에 몰린 짐승과 같은 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