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95
“한데 네 수준이 좀 이상하구나. 분명 규열기 중기인데 좀 전의 그 주먹질은 정말 놀라웠다.”
사도환의 수준은 정열기 초기였지만 그는 타고난 자질이 워낙 뛰어난 데다가 최근의 폐관수련을 통해 같은 수준에서는 정점에 있다 할 만했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정열기 중기 수련자와 맞붙을 수 있을 정도였다.
좀 전의 싸움은 그저 서로의 현재 수준을 확인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지만 사도환은 한제의 몸에 그를 놀라게 할 만한 힘이 숨겨져 있음을 똑똑히 느꼈다. 고고하고 오만한 사도환이 큰 충격을 받았을 정도로 심상치 않은 힘이었다.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한제는 1천여 년이 흐른 지금 앳된 티를 완전히 벗고 진정한 강자가 되어 있었다.
사도환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헤어지던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한 명은 천운종으로 가서 배움을 계속하겠노라 했고 다른 하나는 봉란성에 가서 세속적인 즐거움을 누리겠노라 했다.
그리고 수백 년이 흘러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의 정은 변치 않았지만 다른 모든 것은 너무도 많이 변한 상태였다. 인생이란 본디 그런 것이었다.
한제 역시 사도환을 바라보며 당시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오래 전의 일들이었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심지어 그는 당시 자신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했던 말도 잊지 않고 있었다.
“이 이한제는 평생 부모님 외의 그 누구에게도 절을 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환은 그에게 은인과도 같았다. 사도환이 아니었다면 한제는 조나라에서 진즉 죽어 사라졌을 터였다. 또한 사도환이 아니었다면 한제의 자질로는 지금과 같은 강자가 되기는커녕 원영기에도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사도환의 적멸지와 화마지, 황천지 그리고 그가 준 법보가 아니었다면 천운성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요령의 땅에서 산마(散魔)의 공격을 받아 생기가 거의 다 흩어져 사라졌던 순간, 적멸지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소멸해 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그보다도 한제가 사도환을 진심으로 은인이라 여기는 것은 천역주 때문이었다. 사도환이 그 신비로운 법보에 욕심을 부렸다면 그것이 한제의 원신에 녹아들었을 때 그 원신을 취해버렸을 터였다.
허나 사도환이 남긴 것은 이 말 한마디뿐이었다.
“네가 갖도록 해라.”
과거의 기억을 더듬던 두 사람은 산봉우리 꼭대기에 앉아 침묵에 잠겼다.
산봉우리의 거센 바람도 두 사람이 느끼는 재회의 감격은 조금도 흩어놓지 못했다. 이 감격은 갈수록 깊어지고 짙어지다가 한 줄기 실이 되어 두 사람을 영원히 잇는 우의(友誼)가 되었다.
두 사람은 술을 나눠 마시고 잠시 침묵하다 또 마주보고 웃었다. 진정한 친구 사이에 많은 말들은 필요 없었다. 술 한 잔과 한 번의 웃음이면 충분했다. 사내에게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수 있어도 진정한 벗은 없을 수 없는 법이었다.
한제의 기이한 수준에 대해 사도환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크게 웃었다.
“우리 사이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느냐? 내가 봉란성에서 고초를 겪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너였다. 언젠가 함께 봉란성에 가보자꾸나!”
한제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술잔을 기울이다보니 어느새 깊은 밤이 되었고 휘영청 밝은 달이 떴다. 춥지만 고요하고 고즈넉한 밤, 한제는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졌다.
이런 따뜻한 감정을 느껴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런 따뜻한 감정은 옛사람과 마주 앉았을 때에만 생겨나는 것으로 마치 주작성에서 천역주 안의 사도환과 함께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넌 나천성역에서도 이름깨나 떨치고 즐거운 생활을 보낸 모양이더구나. 한데 나는… 망할, 봉란성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쩌다가 빌어먹을 여인들을 만나게 됐지. 사실 처음에는 별일도 아니어서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냥 옥패에 신식으로 기록했을 뿐.”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사도환의 표정이 울적하게 변해갔다.
“한데 글쎄 그 여인들이 추살령을 내리지 뭐냐! 밤낮없이 나를 추격해오는 바람에 나는 수시로 장소를 바꿔가며 폐관수련을 해야만 했다. 지난 수백 년간 마치 생쥐처럼 이 수련성에서 저 수련성으로 옮겨 다니는 삶을 살았지.”
옛 일을 떠올린 사도환은 다시 화가 치민 듯 술을 주전자 째로 들이켜더니 한이 서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폐관수련을 마치고 곧장 봉란성으로 찾아갔지만 그년들의 수가 너무 많았던 데다가 지원군까지 온 바람에 또 한 번 크게 당하고 말았어!”
사도환의 얼굴은 이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를 빤히 보던 한제는 불쑥 사도환의 손을 쥐고는 신식으로 살폈고 그러더니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사도환은 또 술 한 잔을 들이켜고는 쓰게 웃었다.
“봤느냐?”
한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독이기에 선배님의 수준으로도 몰아내지 못할 만큼 강력하답니까.”
사도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봉란성의 그 망할 년들이 어딘가에서 가져온, 욕선욕사(欲仙欲死)라는 선계의 독이다. 선계가 붕괴하기 전 수많은 선인들이 수백 년간 제련해 만들어낸 결과물로 일반인들에게는 효과가 없고 오직 선인들에게만 효력을 발휘하는 독이지! 더구나 일단 체내에 들어오면 원신과 결합하여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절대 해독할 수 없단다.”
사도환은 잠시 말을 끊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을 이었다.
“욕선욕사라는 이름처럼 처음 사흘은 천국에 있는 것 같은 환상에 수시로 빠져들면서 신심의 힘을 소모하게 되고 이후 사흘은 죽은것처럼 느껴지지. 그리고 일곱 번째 날에는 원신이 완전히 망가지게 된다! 게다가 죽음까지는 7일이 걸리지만 중독된 순간부터 모든 수준을 잃게 된다고 하지.”
“그렇다면 선배님은⋯⋯?”
사도환은 분명 수준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게 어찌된 일인지 한제는 궁금해졌다.
사도환은 쓰게 웃으며 술주전자를 들었으나 이미 비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저물대에서 술을 아예 동이 째로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가를 타고 술이 흘러냈다.
술동이를 내려놓은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냐? 저항할 방법을 찾아냈지. 좀 극단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여자 수련자를 제물로 삼아 육체적 관계의 자극을 통해 수준을 흩어지지 않게 하고 있단다. 그렇게 여태 버텨온 것이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하늘 어딘가를 노려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사도환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봉란성(鳳欒星)에 대한 살기가 들어찼다.
“봉란성에 쇄열기 수준 수련자도 있습니까?”
한제의 물음에 사도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가장 강한 자도 정열기 중기 수준이지. 허나 그곳에는 정열기 수련자가 꽤 많은 데다가 외부의 지원 세력도 있어. 다 합치면 열 명은 넘을 것이다!”
한제는 냉소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에게 반드시 죄를 묻겠습니다. 허나 그보다 해독이 중요하겠지요.”
한제의 말에 사도환은 눈을 번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계획이 있다. 내가 알기로는 그년들은 독약만 가지고 있지 해독약은 가지고 있지 않아. 아마도 해독약은 선계에나 있겠지! 우(雨)의 선계가 다시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가 찾아볼 생각이다.”
“선계요? 그 독약이 우의 선계에서 제련된 것이랍니까?”
한제의 물음에 사도환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찾아본 바에 의하면 우의 선계에서 제련된 것이라 했다.”
한제는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는 주일이 맡긴 선옥탑이 있고 그 안에는 선군 청상의 시체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청상이 바로 우의 선계의 선군이었다!
‘여러 단서로 미루어 요령의 땅의 가장 비밀스러운 선부(仙府)에는 그 옛날 가장 강력한 선제(仙帝)였던 청림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청림은 청상의 아버지이니 그에게는 청상을 부활시킬 방법이 있을지 모르지. 그리고 청상을 부활시킨다면 이 독을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한제는 한층 밝아진 눈으로 사도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 해독약을 찾으려고 우의 선계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곧장 사도환에게 당시 요령의 땅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과 자신의 생각을 알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사도환은 잠시 고민하다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듣고 보니 나쁘지 않구나. 그리해봐야겠다. 그 추측이 맞건 틀리건 너와 함께 요령의 땅에 가겠다. 성공한다면 일거양득일 테니까!”
“봉란성 여인들 또한 도망치지 못할 겁니다!”
한제의 눈에는 극도의 살기가 어렸다.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지만 먼저 자신을 건드린 자에게는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이 바로 한제였다. 그리고 사도환을 건드린 것은 자신을 건드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취하다
사도환은 동이 터오자 저물대의 마지막 술까지 마신 뒤 한제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기이하게 웃었다.
“너 설마⋯⋯ 아직도 목석같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
사도환의 물음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한제는 당황한 듯 코를 만지작거렸다.
“바보처럼 굴지 마라. 네가 이 수령성에 온 목적이 설마 그 두 계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냐?”
사도환은 묘하게 웃으며 재차 물었다.
“난 그 두 계집을 네게 첩으로 주려고 했다. 한데 네가 나보다 더 빨리 이곳에 와 있었지. 설마 그 두 계집의 마음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니겠지? 조언을 해주마. 계집의 의향 따위 따지지 말고 네가 원한다면 취하거라! 나 또한 주작성에 있었을 당시부터 그리했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바로 취했어. 어느 누가 감히 싫다 하겠느냐?”
한제는 쓰게 웃었다. 그가 아는 사도환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녀들에게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은 아닙니다. 그중 하나가 저와 연이 있기는 하지만 반려자의 연은 아니지요.”
여기까지 말을 마친 한제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피천관(避天棺)에 있는 모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생각할 때마다 심정이 복잡하게 뒤얽히는 류미도 뒤따라 떠올랐다.
한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류미… 아직 살아 있겠지?’
이는 연맹성역으로 돌아온 뒤부터 내내 느껴온 일종의 직감으로 1천 년 이상 살아오면서 수련의 두 번째 단계에 이른 그가 갖게 된 미래에 대한 흐릿한 감각이었다.
한제의 두 눈 깊은 곳에 숨겨진 슬픔을 읽어낸 사도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제와 모완 사이의 일에 대해 그는 알고 있었고 그런 한제에게 자꾸만 여자를 만나라고 들먹이는 것도 이를 통해 그 슬픔에서 헤어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허나 그는 한제의 슬픔이 이전과는 달리 류미로 인해 더욱 깊어졌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이후 그 슬픔은 한제의 영혼 깊은 곳에 남아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되었다.
한제의 삶에서 사랑은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가 모완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은 것은 그녀가 사라진 후였다. 또한 류미와의 관계에서 있었던 일은 심장을 옥죄는 듯한 통증을 남겼다. 그 원한을 삭이는 데 한제는 꼬박 1백 년의 세월을 들였지만 결국 그 고통을 말끔히 지우는 데에는 실패했다.
한제는 마지막 남은 술동이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켠 후 쾅 소리가 나도록 탁자에 내려놓았다.
“선배님은 당시 제게 수련계가 얼마나 잔혹한 곳인지 알려 주셨지요. 이곳은 약육강식의 세상으로 까딱하면 죽게 되는 곳이니 살아남으려면 잔혹하고 악독해져야만 한다고 하셨지요. 지난 1천 3백 년이 넘는 세월을 수련해오면서 저는 잔혹하고 악독해졌으며, 수많은 살육을 해왔고. 또 고독도 배웠습니다.
허나 잃은 것 역시 너무도 많습니다. 부모님을 잃었고 일족을 잃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아이를 잃었고 기쁨을 잃었습니다. 이제 저는 수시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말입니다!”
사도환은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았다. 한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심신이 진동하는 듯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저는 비통함과 분노에 시달렸지만 모든 것을 바꾸기에는 무력했습니다. 제 비통함과 분노는 한 줄기 마화(魔火)가 되어 타올랐지요! 모완이 죽어가고 있을 때 제게는 운명을 바꿀 능력도 윤회의 굴레에서 그녀를 되찾아올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저 뜬 눈으로 그녀가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한제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류미는 제 아이를 가졌습니다. 허나 제게 보내진 것은 수백 년의 원기를 흡수한, 제 아비에 대한 증오와 원망으로 이루어진 아이였지요! 이 모든 것이 제가 수련자의 길에 올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제가 수련자가 되지 않았다면 벌써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도 남았겠지만 대신 이토록 슬프고 비통한 일은 없었겠지요.”
한제의 얼굴이 슬픔으로 얼룩졌다.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이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이 오랜 고통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 바로 사도환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주작성을 떠나던 그 순간까지 자신을 봐왔고 수련자의 길을 안내하고 이끌어 주었던 사도환뿐…
사도환은 말없이 술동이를 들어 한제에게 건넸다.
한제는 다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웃었다.
“게다가 술을 이토록 마시는데도 취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하하하!”
그는 크게 웃었으나 그 웃음에는 소리 없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취하고 싶다면 취하게 해주마.”
사도환이 저물대를 두드리자 보라색 옥으로 된 술병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