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01
고요의 두 눈은 여전히 굳게 감겨 있었고 깨어날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제는 곧장 손을 뻗어 고요의 정수리에 얹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한제의 심신이 고요의 체내로 녹아들면서 그의 기억을 훑기 시작했다.
한제는 푸른 하늘을 보고 있었다. 운요군(雲妖郡) 안, 원래는 맑고 화창했던 하늘이 돌연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폭풍이 응집되고 구름의 기색도 급변했다. 붉은 인영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곧장 운요군 수도에 있는 황족의 9층 운요탑(雲妖塔)에 이르렀다.
곧이어 탑에서 경악에 찬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홉 개의 요령이 다시 한 번 합쳐져야만 고요가 되살아나 당시의 후회를 청산할 수 있다. 운요, 너와 나는 본디 한 몸이었으나 오랫동안 분리되어 있었지. 오늘 너와 나는 다시 합쳐진다! 고요의 이름은 곧 나의 이름, 배이라가 될 것이다!”
붉은 인영은 기이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운요탑에 난입했다.
콰르릉!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수도 안의 수많은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하지만 잠시 후, 그 굉음은 돌연 사라졌고 그 대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운요탑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흐릿한 요령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허나 그것은 얼마 가지 못하고 피처럼 붉은 빛에 뒤덮였다.
운요를 흡수한 붉은 빛에서 곧 배이라가 나타났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아홉 개의 요령 중 하나였으면서 한 치의 발전조차 하지 않았다니, 한심하군! 고요의 이름을 욕보인 것이나 다름없다!”
배이라는 차게 코웃음을 치더니 몸을 훌쩍 날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운요군은 무너지고 갈라졌으며 이제 더 이상 요령을 갖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배이라가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운요탑의 잔재 아래에서 미약한 잔영 한 줄기가 피어오르더니 깊은 원한과 혼란을 품은 채 어디론가 날아갔다.
‘내게 백 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분요법(分妖法)을 완성할 수 있다. 허나 안타깝게도 지금의 요식(妖識)은 너무나 약해. 본체가 삼켜졌으니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은 처지라 언제든 흩어질 수 있지. 운요군은 무너져 내렸고 운요탑도 사라졌으니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는 없다. 다른 군에 들어가 요력을 흡수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이 요식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날아갔다. 너무나 허약한 상태라 언제라도 제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날아가는 동안에도 이 미약한 요식은 조금씩 마모되었고 결국 거의 붕괴할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기억조차 흐릿해졌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지워지려던 찰나, 그는 한 줄기 요력이 흘러드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때 그가 지나던 곳에 바로 연혼(煉魂) 부족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연혼 부족의 규모는 크지 않아 부족원의 수도 겨우 수십만 명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대부분은 혼백을 찾으러 나간 상황이라 부족 안에 남은 것은 수만 명에 불과했다.
허나 그들은 모두 열광적인 표정으로 부락 중앙의 조악한 석상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정수리로부터 옅은 요기(妖氣)가 사방으로 흘러나왔다.
기억조차 흐릿해진 운요(雲妖)의 요식은 무의식적으로 석상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 녹아들었다.
그 순간, 석상은 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사방을 채우고 있던 옅은 요기들을 얼른 집어삼켰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운요의 요식은 검은 석상 안에 점점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도망쳐온 순간으로부터 오랜 세월을 지나 보내면서 그 옛날의 기억은 흐릿해져 갔다.
본디 본체가 아니라 한 줄기 요식에 불과했던 그는 하루 종일 기도를 올리는 연혼 부족 사람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요력을 흡수하면서 ‘이한제’라는 사람에 대한 그들의 숭배와 기억까지 받아들이게 됐다.
더구나 부족원의 수가 1백만 명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자신이 곧 이한제이자 지금 기도하는 이들의 선조라고 여기게 됐다.
그 상태로 수백 년이 지났고 연혼 부족원들의 수는 수백만에 이르렀으며, 이제 요식이었던 그것은 과거를 완전히 잊은 채 자신이 진짜 이한제라고 여겼다. 그렇게 의식이 변해감에 따라 석상의 모양 역시 점점 한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석상 안에 깃든 요식 역시 한제가 되었다.
한제는 다시 한 번 자신과 똑같이 생긴 고요를 바라보았다. 방금 목격한 이 고요의 과거에 대해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한제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는 이 고요는 자신을 나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두 번째 분신으로 만들 수 있겠군. 나의 본체는 고신이고 첫 번째 분신은 수련자이며 두 번째 분신은 고요가 될 것이다. 세 번째 분신을 고마(古魔)로 만들 수 있다면… 그때 본체와 분신들을 하나로 합치면⋯⋯ 그 옛날의 존재들로 되돌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제는 심장이 쿵쾅댔고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곧장 석상으로부터 떠났다. 그 안으로 펼쳐졌던 그의 신식과 수준 역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분신 (2)
숨을 깊게 들이마신 한제는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결인을 그린 두 손을 양 무릎에 올려놓고 원신의 기운이 어린 숨을 뱉어냈다.
순간 그 숨은 검은 석상을 뒤덮고 하나하나의 표식이 되어 끊임없이 석상에 찍혔다.
자신의 심신과 통일시켜야 석상을 두 번째 분신으로 삼을 수 있다.
마음대로 통제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원신에 거역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필요한 경우 자신의 원신이 저 석상에 쉽게 녹아들 수 있어야 했다.
말로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려웠다. 억지로 강행했다가는 성공한다 해도 꼭두각시밖에 될 수 없다.
자신보다 약한 존재라면 분신으로 만들어봐야 큰 의미가 없고 반대로 자신보다 약하지 않은 존재라면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분신을 제련하는 데 따르는 첫 번째 난관이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만 성공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라도 생기고 심지어 성공한다 해도 분신이 배반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는다.
허나 그런 흠 따위 한제에게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이 고요는 이미 자신이 한제라 여기고 있으므로 많은 제련도 필요 없다. 유일한 문제는 신식을 녹여내 이 고요에게 누가 본체고 누가 분신인지 알게 하는 것뿐이다.
허나 이 작업 역시 한제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수준 자체가 이 고요보다 훨씬 높은 데다가 그의 본체는 고신이므로 본체와 분신의 우선순위를 분간하지 못하는 일 따위는 없을 터였다.
다만 한제는 워낙 신중한 성격인지라 며칠간 제련을 진행해 자신의 신식과 고요를 완전히 융합시켰고 심지어 분신의 낙인까지 찍어놓았다. 여기에 대량의 표식까지 준비해뒀으니 만약 언젠가 이 분신이 배반하더라도 명령 한 마디로 당장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선제(仙帝) 청림의 꼭두각시 통제 법술까지 발휘해 이 두 번째 분신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한제는 마음을 놓았다.
“이 두 번째 분신에 육신이 없다는 점이 안타깝군. 석상에 완전히 깃들어 있으니 당분간은 분리할 수도 없겠어. 공격할 때에도 요식을 위주로 하겠군. 비록 문정기 후기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요식이야. 만약 충분한 요기만 갖는다면 언젠가 고요와 같은 수준에 이를 수 있겠지.”
한제는 급하다고 재촉하기보다는 천천히 진행해야 하는 일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한제는 연혼종(煉魂宗)에 상황을 설명한 후 두 번째 분신을 데려가지 않고 그저 강력한 금제들만을 배치해놓았다. 그리고 그는 연혼종 제자들에게 매일 그 석상에 기도할 것을 당부한 뒤 떠났다.
“두 번째 분신은 하나의 씨앗이다. 지금은 큰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성장한다면⋯⋯?”
한제는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 ★ ★
천요군(天妖郡)은 수백 년 전 화요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타격과 손실이 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인구는 당시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수도도 수백 년 전만큼 북적거리지는 않았다. 길가의 상점들은 여전했지만 행인들은 많지 않았고 이따금 발길을 멈추는 이들도 물건들을 흘깃 살피다 이내 떠나가곤 했다.
이곳에는 긴 강이 하나 있는데 수도 바깥쪽에서 흐르는 강과 이어져 순환했다.
한제는 강변에 가만히 앉아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당시 한제가 앉아 거문고 소리를 듣던 곳과 달라진 바가 없었다. 다만 당시 강 위를 떠가던 놀잇배나 그 배 위에서 거문고를 듣기 좋게 연주하던 사람이 지금은 없을 뿐이었다.
한제는 문득 쓸쓸해졌다.
텅 빈 강을 바라보던 한제의 귓가에는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거문고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그의 곁을 오랫동안 맴돌았지만 너무나 작고 약해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만약 그때 배에 올라 황제와 술을 나누지 않았다면 그 눈먼 여인의 얼굴조차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제가 기억하는 것은 그저 그 여인의 고독해 보이는 뒷모습과 슬픔에 찬 거문고 소리뿐이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옛 기억에 잠겨 있던 한제는 세월의 존재를 느꼈다. 눈 깜짝할 새 연기처럼 흩어진 수백 년의 세월은 모든 것을 씻어버렸지만 그의 기억만큼은 씻어내지 못했다.
“당시의 모력해는 여태 살아 있을는지⋯⋯.”
곁에는 술주전자가 하나 있었다. 이 술을 산 곳은 수백 년 전 술을 샀던 바로 그곳이었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듯 가게의 간판은 그대로였지만…
한제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맛이 변했군.”
그는 쓰게 웃으며 술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때 한제의 뒤쪽에서 약간의 피로감이 어린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변했지요. 그 가게 사장의 후손들은 조상들만큼 손맛을 내지 못하더이다. 그 당시의 맛을 재현해 내지를 못해요.”
한제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백 년 만입니다. 황제께서도 이전만큼 소탈하시지는 않군요!”
뒤쪽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손선이 다가와 앉았다. 잘생긴 이 사내에게서는 예전의 그 모습이 언뜻 보이기도 했다. 다만 지금은 귀밑머리가 약간 세어 있었고 얼굴에도 주름이 진 상태였다.
“대신 이걸 드십시오.”
손선은 자신이 들고 온 술주전자를 건넸다.
한제는 그것을 받아들고 한 모금 들이키더니 감탄했다.
“그때 그 술이로군요!”
“반드시 돌아오실 것이라 믿었지요. 그래서 적지 않게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돌아오면 다시 한 번 나눠 마시려고요.”
손선은 술주전자를 하나 더 꺼내 반절 정도를 들이키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크게 웃었다.
“크하하! 취한다! 이 형, 거문고 연주가 없어 슬퍼하고 있던 참입니까?”
그때 멀리서 흐릿한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고독과 슬픔이 어린 소리는 사방을 맴돌았고 잠시 후 강에 둥둥 떠가는 커다란 배가 한 척 나타났다. 배 위에서는 한 여인이 이쪽을 등진 채 뱃머리에 앉아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한제는 술주전자를 들고 강 위를 느릿하게 떠가는 배를 바라보았다. 귓가에 울리는 거문고 소리에 수백 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거문고 소리는 그럴듯하기만 할 뿐, 당시와 같은 운치는 없었다. 거문고를 뜯는 여인 역시 그때의 그 눈먼 여인이 아니었다.
한 모금 술을 들이켠 한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세심하시군요.”
손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강변에 앉아 묵묵히 술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그리고 또…
해가 서쪽으로 지면서 곧 어둠이 깔렸다. 달도 없는 밤이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강 위에 멈춰 있는 배로부터 이어지는 거문고 소리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흔들리며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등불뿐이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 동쪽에서 여명이 터오기 시작하면서 어둠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강변에 앉은 한제의 곁에는 텅 빈 술주전자가 가득 널려 있었다.
“배이라님께서도 이미 이 형이 온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 형께 말을 전하라고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지요.”
손선은 술주전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