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08
여인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선배님은 누구십니까!”
한제는 궁금하지만 지금껏 묻지 못했던 질문을 드디어 던졌다.
“나는 선제의 여덟 비 중 하나인 화비(花妃) 함연이라 한다.”
여인은 아름다운 얼굴로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짙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앞으로 뻗어 휘둘렀다. 그러자 대전이 진동하더니 바닥에 깔려 있던 벽돌들이 하나둘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떠오른 벽돌들은 한제와 백의의 여인 사이에 기이한 진을 형성했다.
그리고 벽돌이 떠오르자 그 아래 가려져 있던, 우주를 나타낸 그림이 드러났다. 밝은 별들이 총총 떠 있는 어두운 우주였다.
허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그림 속 별들이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느릿하게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본 한제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 요령의 땅은 하나의 선부(仙府)로 아주 특수한 방식으로 우주에 떠 있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은 허상이 아니야. 이 전송진으로 들어서면 봉인된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여는 데 성공한다면 진정한 선부에 들어갈 수도 있겠지.”
“그 선부가 선제 청림이 폐관수련을 하고 계신 곳입니까?”
한제는 땅에 그려진 우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벽돌로 이루어진 진을 바라보았다.
백의의 여인은 말없이 선제의 조각상을 한참 바라보다가 작게 말했다.
“선제께서는 당시 돌아오셨을 때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심지어 오는 도중 하계(下界)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으셨지. 하여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그 선부를 활성화하셨다. 원래는 입구가 없는 곳이지만 선제께서는 네 개의 입구를 만드셨어. 만약 그 네 개의 입구를 동시에 열면 진정한 통로가 나타나 폐관수련을 하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지.”
여인은 조각상에서 시선을 돌려 한제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정신술(定身術)을 사용했고 청상의 시체를 가져왔다. 게다가 이 씨라니, 더 이상 너를 막지 않겠다. 전송진으로 들어간 뒤로는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바로 동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백의의 여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돌려 대전 깊은 곳으로 향했다. 한제의 눈에 들어온 그녀의 뒷모습은 무척 외롭고 슬퍼 보였다.
“이 씨라서 나를 더 이상 막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한제가 물었다.
“운이 따른다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여인은 조용히 답하고는 점점 그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런 수준을 가지고 계시면서 어찌 저와 같이 가지 않으십니까?”
한제는 어둠 속을 향해 물었다.
어둠 속에 반 정도 들어선 여인이 우뚝 멈춰서더니 한제를 등진 채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갈 수 없다.”
그 말만을 남긴 채로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게서는 하얀 빛이 번득였지만 그 빛은 어둠에 섞여 먼 곳까지 밝히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내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겨 이내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두 팔에서 푸른 빛이 나타나더니 빠르게 온몸으로 확산됐다. 그리고 이내 푸른 빛에 완전히 뒤덮인 그녀는 번쩍 하고 사라졌다. 그녀가 있던 곳에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만개한 채 놓여 있을 뿐이었다.
‘화비는 이미 죽고⋯⋯ 남은 것은 화선(花仙)일 뿐. 이 동굴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화선⋯⋯.’
그 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처연한 느낌이었다. 또한 그 꽃은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어둠 속에 피어 있었다.
여인이 사라진 쪽을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던 한제는 이내 결심을 굳힌 듯 곧장 전송진으로 향했다.
허나 전송진에 이르기 직전, 한제의 시선은 멀리 떨어진 대전의 어두운 곳으로 향했다.
한제가 들어서자 전송진은 밝게 번득였고 이내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한제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허상의 공간이었다. 거대한 진이 지면에 새겨져 있었고 그 중앙에는 검은 돌 조각이 있었다.
신중하게 사방을 살핀 한제는 그 거대한 진으로 들어가 검은 돌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끝에 저물대에서 당시 얻은 선부의 열쇠를 꺼냈다. 선부의 열쇠는 곧장 푸른 연기로 변해 그 돌조각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순간 지면의 거대한 진에서 밝은 빛이 번득이면서 문양이 하나하나 떠올라 주위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진이 느릿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제는 자신의 심신과 진이 기묘하게 연결되는 것을 느꼈고 눈앞이 이지러졌다. 그리고 시야가 다시 또렷해졌을 때는 네 번째 동굴의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마치 동굴이 그의 심신에 완벽하게 펼쳐진 것 같았다. 원하기만 한다면 한제는 그 동굴에 존재하는 모든 금제를 통제할 수 있었다. 대전만 제외한다면…
한제는 사도환을 보았고 지면을 채운 꽃잎에 뒤덮여 사라졌던 부풍자 등도 볼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리자 이들이 전부 사라졌다.
한제가 대전으로 들어간 뒤부터 경계심을 잔뜩 드높인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사도환의 표정이 돌연 바뀌었다. 매우 익숙한 누군가의 신식이 자신의 곁을 스쳐가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한제!”
그 자리에서 사라진 이들은 거대한 진 위에서 다시 나타났다.
“동굴은 이미 완벽하게 열렸다. 뇌길, 너는 들어가기 벅찰 테니 여기 남아서 기다리거라.”
한제의 말이 끝나자 지면의 진이 격렬하게 번득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요령의 땅에서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선령천경(仙靈天境)
요령의 땅 북쪽에는 넓고 탁 트인 평원이 있는데 지금 그 평원 상공에서 돌연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사방에서 몰려들었고 쉭, 쉭 하는 소리도 먼 하늘로부터 들려왔다.
구름이 빽빽하게 모여들 무렵 한 줄기 빛기둥이 평원으로부터 돌연 불쑥 솟아올랐다.
하늘을 떠받칠 듯한 그 기둥이 계속해서 솟아오르면서 대량의 파문이 일어났고 엄청난 힘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구름을 떠밀었다.
빛기둥은 곧장 구름을 뚫고 솟아올라 하늘 꼭대기에 이른 뒤부터는 수많은 빛의 고리가 되어 느릿하게 확산됐다.
또한, 그 빛기둥이 나타난 순간, 그 안에서는 짙은 선기(仙氣)가 확산되면서 순식간에 요령의 땅 3할 정도를 뒤덮었다.
구름층 안에서는 검은 새 몇 마리가 날아가고 있다가 마침 그 선기에 휩쓸렸다.
순간 몸을 바르르 떠는 검은 새들의 체내로부터 대량의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그대로 흩어져 사라지더니 이 새들은 돌연 하얀 두루미가 되었다. 두루미로 바뀐 새들은 맑고 청아하게 울며 우아한 날갯짓으로 저 멀리 날아갔다.
요령의 땅은 무형의 요기(妖氣)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요기는 이 땅 사람들의 수련에 필요한 원천이었다. 한데 빛기둥으로부터 흘러나온 선기가 퍼져나가면서 요기와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고 불과 물이 만난 듯 기이한 변화를 일으켰다.
이곳의 요기는 너무나 짙어 한 줄기 빛기둥에서 흘러나온 선기로는 당해낼 수 없었으나, 빛기둥에서는 끊임없이 대량의 선기가 발산됐다. 그러자 결국 그 기둥을 중심으로 반경 1백 리는 요기로도 뒤덮을 수 없을 만큼 짙은 선기로 가득찼다. 즉, 반경 1백 리는 선기로 그 밖은 요기로 찬 채 평형을 이루어 서로의 자리를 넘보지 못했다.
★ ★ ★
한편, 세 번째 선부(仙府) 안에는 능천후와 손선 그리고 허공자가 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능천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허공에 한 줄기 균열이 나타나더니 그 안에서 대량의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고 뒤이어 선부의 열쇠가 모습을 드러냈다.
‘난 단 7일도 걸리지 않아 네 번째 선부를 열었다. 그동안 내가 이한제를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군. 당시 이 세 번째 동굴을 여는 데에는 거의 한 달의 시간을 들였지.’
능천후는 말없이 오른손으로 진의 중심에 놓은 검은 돌을 가리켰다. 그러자 푸른 연기가 그 검은 돌 안으로 스며들었다.
검은 돌은 진동했고 진이 활성화되었다.
★ ★ ★
영요군(靈妖郡)의 관할인 요령의 땅 서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북쪽에서와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빛기둥이 솟아오르더니 선기를 발산했고 요기와 선기가 맞붙는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두 번째 선부에 가부좌를 튼 채 활성화된 진을 바라보고 있던 천운자는 그 덤덤한 표정 위로 두 눈에 기이한 빛이 찰나의 순간 번득였다.
‘7일이라⋯⋯.’
한편, 연달아 나타난 세 개의 빛기둥은 요령의 땅에 있는 수많은 강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수만 년간 별다른 변고가 일어나지 않았건만 그 세 개의 빛기둥이 나타난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동쪽을 제외한 요령의 땅 전역의 상공은 오색찬란한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요기는 수만 년간 축적된 것이었다. 세 개의 빛기둥이 발산하는 선기로는 요령의 땅 전역을 뒤덮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한편, 첫 번째 선부 안에서는 운선 부부가 거대한 진 위에 서 있었다. 이오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두 눈에서는 억누르기 힘든 흥분의 빛이 드러났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날이⋯⋯ 드디어 왔군.”
호연은 그의 곁에 서서 남편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이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계획해 왔으니 반드시 성공해야지!”
두 사람의 뒤쪽에는 보라색 허상이 한 덩어리 있었다. 그 안에서는 날카로운, 하지만 한제라면 무척 익숙하게 여길 기운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요령의 땅⋯⋯ 이곳이 그 당시에는 선령천경(仙靈天境)이라 불렸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겠어?”
이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들어 진 안에 놓인 검은 돌의 허상을 내리쳤다. 순간 그 검은 돌은 빛을 번득였고 거대한 진이 가동됐다.
“요기는 독과 같아. 오늘 이곳의 진면모가 드러날 거야!”
이번에는 요령의 땅 동쪽에서도 한 줄기 빛기둥이 솟아올라 하늘과 맞닿았고 뒤이어 짙은 선기를 발산했다.
그 순간, 요령의 땅 사방을 차지한 네 개의 빛기둥은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며 서로 교차하더니 거대한 진을 형성했다.
전보다 훨씬 더 짙은 대량의 선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었고 그 짙은 선기는 이내 폭풍이 되어 요령의 땅 전체로 퍼져나갔다.
선기가 사방을 휩쓰는 사이 암적색이었던 대지는 검은색의 풍요로운 진흙이 드러났고 곳곳의 요사스러운 식물들에서 연녹색의 어린 새싹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