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23
“넌 나의 부비(符妃)가 된 뒤 화비(花妃)를 핍박하여 화혼(花魂)이 되도록 강요했다. 하여 그녀는 오직 화선(花仙)으로만 존재하게 됐지. 그녀가 너의 비밀을 알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내가 너를 몰락시킨 것은 네가 그동안 저지른 일을 후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를 계외로 데려가 네 아버지인 장존의 제자가 되도록 한 것 때문이기도 하다. 난 선계의 지존인 선제다! 봉계에서 태어난 내가 어찌 봉계를 배반하겠느냐!”
남자는 이제 분노인지 자조인지 모를 감정을 담아 흐느끼듯 웃었다.
“네 두 눈에는 분명 태초의 힘이 담겨 있었지. 너는 나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 태초의 힘을 활성화하려 했다. 그 태초의 힘은 장존이 선계를 파멸하기 위해 심어놓은 것 아니었더냐! 만약 그것이 발동된다면 선계의 모든 사람만이 아니라 수많은 일반인 역시 전부 붕괴할 수밖에 없었지. 너희는 봉계를 폐허로 만든 후 소위 말하는 통천문(通天門)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이제 남자의 목소리는 비통할 지경이었다.
“내가 너의 두 눈을 파내게 만들었을 때 네가 느낀 고통은 내가 느낀 것에 비하면 1만 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당시 나는 너에 대한 살의를 참을 수 없었다. 너를 장선지에 봉인하고 외부에는 네가 죽었다고 했지. 네가 나의 고통을 아느냐? 추요영, 넌, 나를 미워할 권리가 없다! 오늘도 너는 분신을 파멸시켜가면서까지 내게 이끌려 온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고 파멸적인 힘을 이용해 나의 생령등(生靈燈) 23개를 꺼트렸다!”
남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었고 체내에서 줄기줄기 검은 기운이 피어올라 눈 깜짝할 사이 마영이 되어 그를 집어삼키려 했다.
“넌 나를 미워할 자격이 없다! 문양 부족의 잔당들은 후에 우리 봉계를 위협할 존재들이다. 그런 그들을 어찌 가만둘 수 있겠느냐. 우리 봉계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남은 위험을 제거할 수밖에!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선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남겨둔 것은 후손들에게 계외 사람들의 그 짙은 살기를 절대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남자의 얼굴에 드리운 검은 기운이 더욱 짙어지면서 일제히 미간으로 모여들었고 밖으로 튀어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남자의 미간에서 열두 개의 반짝이는 빛이 나타나 그 검은 기운들을 단단히 옭아맸다.
“아직 내게 시간이 있는 것인가⋯⋯?”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 ★ ★
한제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곳은 끝없는 바다로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불규칙적으로 몰아치는 큰 파도뿐이었다.
그는 바다 위에 선 채 생각에 잠겼다.
‘이곳으로 전송되던 순간 그 꽃밭에서 다른 사람을 봤던 것 같은데…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쓰러졌어. 짙은 요기(妖氣)로 뒤덮여 있던 그 여인이었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던 그 여인.’
그 순간, 한제는 표정이 급변하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멀리 바다 끄트머리에서 성난 파도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짙푸른 바다 위에서 용솟음친 파도가 층층이 겹치고 합쳐지면서 마치 높이 솟은 파도의 장벽과도 같아 보였다.
콰르릉!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귓가를 먹먹하게 했다. 하늘의 위엄만큼이나 묵직한 파도 앞에 한제는 스스로가 보잘것없는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한제는 신중한 눈으로 전방의 파도를 살피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떨어진 곳은 꽃밭이었어. 금제를 건드렸다고 해도 이런 바다에 떨어지게 될 리는 없는데⋯⋯?’
포효하며 다가오는 거대한 파도는 매우 빨라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덮쳐들 듯 다가와 있었다.
‘장선지가 붕괴할 때 부상을 입고 원신까지 흔들렸다. 최대한 빨리 치료해야 해. 이 기이한 바다도 금제의 일부이니 분명 계속해서 변화할 텐데⋯⋯.’
파도 장벽이 가까워짐에 따라 짙은 수증기가 퍼져나갔다. 멀리서 보면 물안개가 거친 파도에 충돌해 산산조각 난 것만 같았다.
파도는 어느덧 하늘을 뒤덮을 듯 솟아올랐고 점점 높아져만 가더니 순식간에 한제를 매섭게 휩쓸었다.
한제는 발을 내딛어 바다 속으로 빠져들더니 아래쪽으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 순간, 파도가 해수면을 후려치면서 무형의 진동이 바다에 울려 퍼졌다.
끊임없이 가라앉으며 전해져오는 진동을 피하던 한제는 해수면에서 솟구치는 파도를 무시한 채 해저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허나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던 한제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하나의 생명체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이건 진짜 바다가 아니야.’
한제는 몸을 우뚝 멈추더니 결인을 그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순간 회오리가 나타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확산되면서 그 길이가 1백 척에 달할 정도로 커졌다. 이에 따라 바닷물이 밀려나면서 반경 1백 척 안에는 마치 거대한 기포와도 같은 공간이 생겨났다.
한제는 그 안에서 손을 뻗더니 가볍게 움켜쥐었다. 순간 그 기포 앞쪽의 가장자리로부터 주먹만 한 바닷물 덩어리가 다가와 그의 오른손에 떨어졌다.
한제는 그 물 덩어리를 코앞으로 가져와 냄새를 맡더니 입가로 가져와 살짝 핥아보기까지 했다.
‘역시 예상대로야! 비린내도 없고 짠맛도 없어! 절대로 바닷물이 아니야!’
그는 손을 꽉 움켜쥐어 바닷물 덩어리를 흩어버린 후 생각에 잠겼다.
‘이슬이다! 일찍이 천역주에 의지해 수련을 해봤으니 알 수 있어! 이곳은 바다가 아니라 그 꽃밭의 어느 꽃잎이나 풀잎에 맺힌 이슬 속 세상이야!’
한제의 눈빛은 밝아졌다가 이내 감탄으로 물들었다.
‘이슬 한 방울로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사람을 가두다니, 대단한 금제다!’
이어서 한제의 표정은 더욱 신중해졌다.
‘금제는 보통 감금과 공격을 동시에 한다. 이곳은 선제의 동굴이고 문양 부족의 성조(聖祖)의 말대로라면 선제 청림은 무자비한 자야. 그런 사람이 단지 감금만을 위한 금제를 배치했을 리가 없어.’
한제는 말없이 저물대를 힐긋 바라보았다. 이 안으로 전송되던 순간 청림의 분신으로 이루어진 반짝이는 빛이 저물대의 노란색 결정으로 녹아드는 것을 그는 분명해 확인했다.
‘당시 상황에서 추요영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허나 한쪽 말만으로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지. 흑과 백 또한 따로 놓고 보면 전혀 다른 두 색이지만 한데 섞으면 회색이 되지 않던가?’
한제는 누군가의 말만을 듣고 완전히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는 1천 년이 넘는 삶을 통해 얻은 철칙이기도 했다.
‘그 말이 진실인지는 상관없다. 어찌됐든 청림이라는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곳의 금제는 절대 다시 건드려서는 안 되겠군!’
생각을 정리한 한제는 자신의 몸을 감싼 기포를 조심스럽게 통제하여 점점 더 가라앉았고 한참 뒤에야 해저에 닿았다.
해저의 대지는 잿빛이었고 약간 흐릿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제는 눈을 감고 부상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신식으로 반경 1백 척을 살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 7일이 지났고 8일이 흘렀다.
번쩍 뜬 한제의 두 눈에서는 화염의 빛이 이글거렸다.
그는 그동안 상처를 치료하면서 선제의 동굴로 진입하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주작의 각성, 병중계를 뚫고 나온 일, 배이라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그림 족자…
‘주작의 각성은 좋지 않은 시기에 일어났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버렸지. 이제 그들 모두 내가 사성종(四聖宗)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허공자의 표정을 보니 꼭 내 등에다 칼을 꽂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 그뿐만이 아니야. 그 중년 여인은 나를 선량하게 대하고는 있지만 한 줄기 적대감이 숨겨진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어. 그녀의 제자이자 곤허의 성녀일지도 모른다는 여인도 마찬가지지. 선제의 동굴에서는 더욱 신중해야겠군.’
자신의 몸에 새겨진 주작의 문양을 만지작거리던 한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뒤이어 추요영과의 만남을 떠올린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타산⋯⋯ 이제 더 이상 나의 선위가 아니군. 허나 그 만남이 타산에게는 행운이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나를 기억이나 할는지…’
한제의 생각은 곧 자연스레 추요영이 준 푸른색 기운으로 옮겨졌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오른팔에서 맴돌던 푸른 기운이 손바닥에 응집되었다. 그것은 불꽃이 일렁이듯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한 줄기 신식을 분리해 그 푸른색 기운으로 보냈다. 그러자 그의 신식은 순식간에 그 안으로 녹아들었다.
한제는 흠칫 놀라더니 그 푸른 기운의 덩어리를 살폈다. 그리고 이내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이 됐다가 다시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한참 뒤, 그가 오른손을 움켜쥐자 푸른 기운의 덩어리는 흩어져 사라졌다.
‘고부(枯符)는 오직 문양 부족 사람들만 제작할 수 있는 문양이로군. 그렇지 않다면 문양 부족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활성화할 수 있어. 그 위력은 봉인, 붕괴, 탈출, 그리고 해제의 네 종류로 나뉘어 있다.’
고민하던 한제는 저물대에서에 노란색 종이 하나를 꺼냈다. 꽤 오래된 것인 듯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 종이에는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이런 부적을 두 장 가지고 있었다. 나천성역에서 얻은 것인데 이후 아무리 연구를 해봐도 효과를 알아낼 수가 없었고 요가 사람들과 싸울 때 한 번 사용하는 데 그쳤다.
한데 푸른색 연기 덩어리를 본 뒤 한제는 이 부적이 그 고부임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고부(枯符)
부적에 그려진 문양을 자세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왼손 검지를 깨물어 피를 낸 뒤 휘저었다. 손가락은 푸른색 덩어리에 기록되어 있던 결인을 그렸다.
선혈이 허공에 문양을 그려냈고 그 위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미세한 돌기가 돋아났다. 이내 그것으로부터 픽 하고 터져 나온 피처럼 붉은 연기가 고부를 향해 돌진했다.
엄청난 속도로 돌진한 붉은 연기가 고부 안으로 녹아드는 모습을 한제는 눈도 떼지 않은 채 응시했다. 그가 그려낸 문양은 방금 막 푸른 연기에서 배운 것으로 해당 고부가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사용해본 것이다.
그때, 부적에서 검은 회오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순간, 사방의 바닷물이 변화를 일으켰다.
회오리에서 거대한 새의 허상이 어렴풋이 나타났고 온몸이 새카만 새는 번개처럼 번득이는 두 눈으로 회오리 안을 한 번 휩쓸더니 이내 그 회오리와 함께 흩어져 사라졌다.
‘탈출용 고부로군!’
한제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저물대를 두드렸다. 그러자 한 자루의 커다란 검이 튀어나왔다. 살역계에서 얻은 99자루의 검 중 하나였다. 이미 열 자루 이상이 파괴됐지만 그의 저물대에는 아직 많은 검이 남아 있었다.
한제는 고부를 그 검에 붙인 후 오른손으로 기이한 결인을 그린 뒤 위쪽을 가리켰다. 순간 그 거대한 검이 바르르 진동하더니 돌풍을 일으키면서 눈 깜짝할 사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워낙 순식간에 사라진 바람에 한제는 그 움직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 검은 1백 척 떨어진 곳에 다시 나타났다. 한제는 감탄하며 그 검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감싼 회오리는 흩어져 사라진 상태였고 검에 붙어 있던 부적의 문양도 약간 어두워져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군! 이 정도라면 내가 전속력을 발휘해도 따라잡지 못하겠어. 어쩌면 쇄열기 수련자의 속도와 맞먹을지도 몰라! 여기에 축지성촌을 더한다면⋯⋯?’
한제의 눈이 놀라움과 기쁨으로 번득였다.
★ ★ ★
선제의 동굴 안. 장선지의 붕괴로 인해 모든 사람이 뿔뿔이 흩어졌고 각기 다른 곳으로 떠밀려 나감과 동시에 금제를 건드리면서 사라져 버렸다.
이들이 전송된 곳 중에는 울창한 숲도 있었는데 그곳은 몇 사람이 손에 손을 잡아야만 두를 수 있는 거대한 나무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그 풍성한 가지와 잎에 가려져 몇 줄기의 햇살만이 겨우 뚫고 들어올 수 있었다.
바닥에는 썩은 나뭇잎이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었고 여기에 마수들의 시체가 썩는 냄새까지 섞여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나뭇잎과 가지가 점점 빽빽해 햇빛은 갈수록 줄었고 축축하고 음습한 기운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이 숲의 깊은 곳, 허리 높이까지 쌓인 썩은 나뭇잎 위에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탑처럼 꼿꼿한 자세의 그는 반쯤 벗은 상태였는데 미간에서는 피처럼 붉은 문양이 수시로 번득였다. 근처에는 흉한 마수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한데 기이하게도 주위의 마수들은 거의 다 미간의 털이 깎여나가 있었고 그 너머로는 피가 낭자한 살이 다 드러날 정도로 파헤쳐져 있었다,
그렇게 뜯겨 나간 마수들의 미간은 가부좌를 튼 사내의 두 다리 위에 쌓여 어스름하게 빛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내는 두 눈을 번쩍 뜨고는 덤덤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