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24
“선조의 성부(聖符)는 아직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지만 고부술을 깨우친 지는 한참 됐지. 허나 내 기억 속 주인님의 모습은 어찌 지워지지 않는 것인지⋯⋯.”
남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두 눈을 감았다.
★ ★ ★
한제는 검에서 시선을 거둔 뒤 손짓을 했다. 그러자 검은 순식간에 그의 손에 돌아왔다. 한제는 그 위에 붙은 고부를 떼어내고는 다시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이 고부를 이용한다면 위험한 순간에 목숨을 건질 수 있겠군. 정말 현묘해. 요령의 땅에서 나가면 고부를 만들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이 푸른 기운에 기록된 대로라면 가장 좋은 고부의 재료는 마수의 미간 가죽이다. 고부의 위력은 재료와 막대한 연관이 있고 사나운 마수일수록 좋다고 했지. 또한 신통력을 이용해 마수의 혼백과 정혈을 미간에 응고시킨 뒤에 가죽을 뜯어내야 한다.’
이번에는 저물대에서 노란색 결정을 꺼낸 한제는 한층 신중해졌다. 선제의 동굴에서 본 것들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이 결정이었다. 심지어 이 결정에서 두려운 파동의 존재까지도 어렴풋이 느껴졌기에 신식으로 살필 수도 없었다.
‘그 신비의 인물이 청림이라면 그가 내게 이것을 준 목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제는 말없이 그 결정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결정을 아무리 살펴도 그 안에 녹아든 청림의 분신에 대해서는 실마리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 후에야 한제는 신식으로 관찰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 결정을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신식을 결정에 녹여 넣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좋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저 직감에 불과했지만 이 직감은 1천 년이 넘는 세월의 경험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군.’
자리에서 일어난 한제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딛더니 마치 한 마리 용처럼 위로 솟아올랐다. 기포는 시종일관 한제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데 해수면에 다다르기 직전, 한제는 표정이 급변하더니 두 손을 양옆으로 빠르게 뻗었다.
순간 그를 감싸고 있던 기포가 폭발하면서 강한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다가 한제의 통제에 따라 위로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그 충격은 뭔가에 충돌한 듯 콰르릉 하는 거대한 소리를 냈다.
한제는 주위의 바닷물이 엄청난 힘에 의해 아래로 짓눌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바닷물에서 튀어나오는 대신 몸을 훌쩍 날려 그 강력한 힘에 짓눌리는 구역을 벗어났다.
그렇게 한참을 벗어난 후에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요기(妖氣)가 한 마리 한 마리의 용처럼 사방을 휩쓸고 있었다.
그 요기의 중앙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온몸이 요기로 뒤덮인 터라 용모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자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 한제가 해수면에 가까워진 순간, 한 줄기 신통력이 해수면으로부터 튀어 올랐다. 한제가 기포를 터뜨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한제, 썩 나와라!”
깊은 원한이 서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바다가 포효하면서 거대한 파도가 사방으로 몰아쳤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한제는 단박에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표정이 차게 굳어갔다.
“요석설!”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요석설 사이에는 복잡한 원한이 얽혀 있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을 이용하려 했다. 그리고 자신을 해하려 하는 자에게는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는 한제는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그는 수준이 높지 않았고 혈혼단(血魂丹)과 혈조가 두려워 요석설을 금제로 봉인해두기만 했다.
한제는 혈조에게 적대심을 품고 있었지만 동시에 상당한 존경심도 갖고 있었다.
그자가 했던 모든 일은 사실 모두 딸을 위한 것뿐으로 한제는 자신도 누군가가 자신의 아들 이평을 해하려 했다면 상대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자신이었다면 상대와 이평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를 먼저 파악할 터였다.
한제는 요석설을 곱게 돌려줄 생각도 했다. 수백 년간 그녀를 봉인해두었던 것에 대한 책임감도 느꼈다. 만약 혈조의 요구가 지나치지만 않았다면 한제는 상대의 제안에 동의했을 것이다. 어쨌든 당시의 그는 혈조에 비하면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허나 혈조는 앞뒤를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일방적으로 한제를 핍박했다. 한제에게 상황을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고 결국 그런 결말을 맞게 됐다.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제는 은혜와 원한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혈조에 대한 존경심도 있었기에 그는 혈조의 혼백을 거둘 때 그 상태로나마 딸과 다시 만날 기회를 주겠다 약속했다. 그리고 요령의 땅에 왔을 때 요석설을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허나 당시 요기로 뒤덮여 있던 요석설은 한제가 알고 있던 요석설과 너무나도 달라 결국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요석설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시 요석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한제, 나와라! 당시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
요석설은 말을 마치며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요기를 뿜어냈다. 순간 수많은 요기의 용들이 일제히 포효하며 해수면으로 달려들었고 연달아 폭발음이 울려 퍼지며 성난 파도가 몰아쳤다.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 순간, 요석설을 두른 요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 안에서 그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한제는 눈앞에 선 여인에게서 이전의 완벽한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상처 가득한 몰골에 원한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흉측한 여인이 서 있었을 뿐이었다.
한제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해갔다.
‘당시의 일이 어느 쪽의 잘못인지 어느 누가 확실히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지금 혈조의 혼은 내 봉선인(封仙印) 안에 있고 그녀의 몸은 복수를 위해 저렇게 바뀌었다. 정녕 내가 잘못한 것인가?’
한제는 평생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다. 한데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이한제, 너는 이 요석설을 수백 년 동안 봉인했다. 허나 그 일은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먼저 너를 해코지하려 한 것은 나였으니까. 그러나 너는 나의 아버지를 죽였다. 부모를 죽인 원수와 어찌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겠느냐! 내게 너를 죽일 힘은 없지만 나를 대신해 너를 죽여줄 사람은 있다!”
요석설은 찢어 죽일 듯한 눈빛으로 한제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한제의 심경은 무척 복잡했으나, 요석설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1천 3백여 년 동안 그의 수준은 끊임없이 높아졌고 세상에 대한 깨달음이 점점 깊어졌으며, 삶은 계속해서 쌓여 갔다. 그 과정에서 한제는 그간 자신이 저지른 살육을 돌이켜보며 성찰을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요석설은 그 성찰의 배출구가 되었다.
사도환과 함께 취했던 그날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한제는 그때 지난 1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수련이 정말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인지 감히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토록 고된 수련의 대가는 두 손에 가득 배인 피비린내였고 1천 3백 년이라는 세월동안 자신의 손에 죽은 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살인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 많은 살육이 한제에게 준 것은 극심한 피로감일 뿐이었다.
허나 이 잔혹한 수련계에서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기 십상이었다. 죽거나, 죽이거나. 그 선택지 앞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 경우 선택은 보통 하나였다.
한제는 어두운 눈으로 바다의 끄트머리를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수백 년간 봉인하고 저급한 방법으로 나의 심신을 불안정하게 만든 것까지는 참을 수 있다. 허나 아버지까지 해쳐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한제를 노려보는 요석설의 눈에 담긴 한은 온 세상을 불태울 화염 같았으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만이 배어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깊은 원한과 함께 눈물도 고여 있었다.
인과의 종결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천 년이 넘는 수련자로서의 삶은 그의 마음을 단단한 강철처럼 만들어 놓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는 악마가 아닌 사람이었다. 남이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자신도 남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철칙 또한 그런 인간성의 산물이었다.
요석설은 먼저 자신을 건드렸고 혈조와의 싸움에서는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허나 요석설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말대로 자신을 수백 년이나 봉인한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아버지의 죽음까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앞에 두고는 일의 앞뒤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에 맞지 않더라도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어찌 보면 그녀 역시 틀린 것이 아니었다.
‘이 역시 모두 인과로구나. 모든 과정은 그녀도 나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어. 일단 생겨난 원인은 꺼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커지게 된다. 마치 하나의 거짓말이 보다 더 많은 거짓말을 불러오는 것처럼… 수백 년간 나는 원인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지. 당시의 나는 인과를 깨닫지 못했고 나 역시 이미 그 원인의 일부였음을 알지 못했다. 이후 혈조가 추격해왔을 때, 나는 그것이 그 원인의 결과라 여겼다. 허나 혈조 역시 결과가 아닌 원인의 일부였구나! 진정한 결과는 혈조도 요석설도 아닌 바로 나의 도심이다!’
한제의 눈에 깨달음의 빛이 어렸다.
‘내 인과의 경지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진전 속도 역시 매우 느리다. 진정한 인과가 무엇인지 체득하지는 못했지. 인과를 완벽히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인과를 완성시켜야 함을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지만 이제 보니 당시의 깨달음도 일부분에 불과했던 모양이군.’
한제의 눈에 담긴 깨달음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
요석설은 악에 받친 눈빛으로 한제를 응시했다. 한제가 침묵하면 침묵할수록 그녀의 원한은 더욱 깊어졌다.
날카롭게 웃던 요석설은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미간을 매섭게 두드렸다.
“이한제, 오늘 모든 것을 끝내자. 이 요석설은 혼백과 육신을 모두 바쳐서라도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할 것이다!”
요석설의 눈에 담긴 원한이 적개심으로 전환되면서 그녀는 더욱 흉측하고 매섭게 변해갔다.
결인을 그린 그녀의 두 손이 미간에 닿은 순간,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은 흩어져 사라졌고 대신 음산하고 서늘한 요화(妖火)가 나타났다.
“요존(妖尊), 이 요석설은 마지막으로 남은 한 줄기 의식마저 포기하고 육신을 완전히 바치겠다. 그러나 저자를 죽이겠다고 약속하라!”
요석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요석설의 몸에서는 하늘을 뒤덮을 듯 짙은 요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고 이에 그녀의 모습은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열 개의 손톱은 순식간에 길고 예리하게 변하더니 서늘하게 빛났다. 머리카락 역시 두 발에 닿을 정도로 자라났을 뿐만 아니라 피처럼 붉게 변했다.
그녀의 얼굴을 뒤덮은 소름끼치는 흉터는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면서 기이하게 연결되더니 복잡한 문양을 이루었다.
뒤이어 엄청난 요기가 그녀의 몸에서 분출되면서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었고 눈 깜짝할 사이 이 세상의 절반이 그 요기로 가득 찼다.
쩌적!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 찬 요기가 확산되면서 얼어붙는 소리와 함께 발아래 바다의 절반 정도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몰아치던 파도 역시 그대로 얼어 버렸고 심지어는 저 멀리 떨어져 있던 파도의 장벽 또한 얼음으로 봉인되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뜻대로 하지!”
음산한 목소리가 요석설의 입에서 흘러나와 서늘한 바람처럼 사방을 휩쓸었다.
육신과 혼백을 바친 요석설의 몸에는 순간 아홉 개로 나뉘었던 고요(古妖) 중 하나가 깃들었다. 이제 그녀의 육신을 조종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니라 아홉 개로 나뉘었던 고요 중의 하나인 풍요(風妖)였다. 이것이 바로 한제에게 복수하기 위해 요석설이 들인 대가였다.
고요는 적응력이 뛰어났다. 당시 아홉 갈래로 나뉘었을 때 각각의 고요는 독자적인 능력을 갖게 되었는데 그중에는 다시 융합되려 하는 쪽도 있었지만 따로 떨어져 살기를 원하는 쪽도 있었다.
지난 수백 년간 배이라는 일곱 개의 고요를 흡수하여 완전한 고요였을 당시의 8할 정도 수준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머지 2할에 해당하는 힘은 바로 이 풍요가 가지고 있었다.
다른 고요의 령들과는 달리 풍요는 다시 뭉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사람과 융합하려는 시도를 해왔고 수도 없이 많은 실패를 겪은 후 최종적으로 그가 고른 것은 바로 요석설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원한과 집념을 이용해 마침내 그녀와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이것은 단순히 상대의 몸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풍요는 일단 자신의 기억을 요석설에게 전수했고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면서 요령으로서의 자신의 몸을 붕괴시켜 의식이 없는 요기가 됐다.
이는 고요의 령인 자신의 존재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를 통해 풍요는 배이라가 자신을 삼킬 수 없게 해버린 것이다.
배이라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고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는 풍요가 이미 붕괴한 상태였다.
요석설은 풍요의 기억을 전수받긴 했지만 그것을 전부 활성화하지는 못하고 일부만을 열어 요기를 흡수했다. 그렇게 수백 년간 흡수해온 끝에 그녀의 체내에는 상당한 요기가 응집되었다. 만약 그녀가 영원히 그 전수받은 기억을 일깨우지 않았다면 풍요 역시 쉽게 깨어나지는 못했을 터였다.
사실 이는 요석설이 복수를 위해, 더 강한 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라 믿은 풍요의 도박이기도 했다. 허나 잘못된 쪽에 걸었다 해도 풍요는 상관없었다. 요석설이 끊임없이 요기를 흡수해 그 요기가 일정 정도에 이르게 되면 그녀에게 전수된 기억은 자동으로 일깨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엄밀히 말해 진정한 풍요는 이미 사라진 상태로 남은 것은 그의 기억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석설은 그 기억의 전승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