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25
그 기억이 전부 일깨워진 순간, 요석설의 모든 기억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그녀의 육신에 존재했던 영혼이 가진 유일한 기억은 풍요의 기억뿐이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요석설의 기억은 한제에 대한 한뿐이었다. 풍요는 요석설의 기억 전체를 삼켜 없앨 수 있었지만 오직 그 한만은 제거할 수가 없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요석설은 새로운 풍요가 됐다.
사실 배이라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손 쓸 방법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요령은 이미 사라졌고 고요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한 채 요수(妖修)가 됐다. 그것은 고요가 아니었다.
풍요는 서늘한 눈빛으로 한제를 응시했다.
“사실 내게는 너와 요석설의 일에 끼어들 이유가 없다. 오히려 네 덕에 요석설의 존재를 삼킬 수 있었으니 우리는 서로를 도와준 셈이지!”
말을 마친 풍요는 입술을 핥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얼어붙었던 해수면은 곧장 녹아내렸고 녹아내린 얼음으로부터 피어오른 서늘한 기운이 줄기줄기 풍요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풍요는 지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수련자는 무척 위협적인 존재로 특히 그 육신에서 풍기는 기운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그가 요석설과 했던 약속은 그저 상대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사탕발림이었을 뿐, 이미 목적을 이룬 이상 약속을 지킬 이유가 없었다.
상대가 약해빠진 자였다면 모를까,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수준은 이전보다 훨씬 약해진 상태라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이곳은 선제의 동굴에 자리한 금제 중 하나다. 만약 이 금제를 잘못 건드리면 너나 나나 골치만 아파지지. 너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난 이만 물러가겠다.”
말을 마친 풍요는 물러났다.
한제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물러나고 있는 풍요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요석설의 모습이었으나 한제는 그녀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임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몸에 담긴 혼백 역시 요석설의 혼백인데도 불구하고…
그 순간, 한제의 눈에 살기가 어리더니 곧장 튀어나갔다. 그리고 그런 한제를 주시하고 있던 풍요는 망설임 없이 질주했다.
풍요인 그녀의 속도는 범상치 않아,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결코 도망치게 두지 않는다!”
한제는 싸늘한 얼굴로 고신의 솥을 소환한 뒤 오른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러자 한참 떨어진 전방에서 밝은 빛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저 멀리까지 도망쳤던 풍요가 밝은 빛에 휩싸인 채 끌려왔다. 두 눈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한제는 곧장 돌진해 오른손 검지로 풍요의 미간을 두드렸다.
쾅!
“크아악!”
풍요는 곧장 뒤로 떠밀려 나가면서 피와 함께 비참한 비명을 토해냈다.
“나의 도인 인과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혼란을 해소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완전히 녹아들어야 한다.”
한제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풍요를 향해 돌진했다.
풍요는 이를 갈며 뒤로 물러나면서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순간 짙은 요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바다가 다시 한 번 쩌적 소리와 함께 얼어붙었다.
뒤이어 풍요의 손짓에 반경 수만 리의 얼어붙은 바닷물이 갈라지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얼음 조각이 되어서는 한제에게로 날아들었다.
“너를 죽일 마음은 없었는데 멋모르고 덤비는구나!”
풍요는 세상을 가득 채운 듯한 그 얼음 조각들로 한제를 완전히 소멸시키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한데 그 얼음 조각들이 닥쳐온 순간, 한제는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불꽃이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작은 화염에 불과했지만 순식간에 증폭되더니 한제를 중심으로 사방을 향해 퍼져나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온 세상을 불바다로 뒤덮였다.
그 불바다와 충돌한 순간, 얼음 조각들은 녹아내리더니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이에 하늘은 온통 하얀 수증기로 가득 찼다.
풍요의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한제를 얕잡아본 것은 아니지만 상대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강력함을 실감하고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전성기 시절 수준을 회복한다 해도 자신할 수 없는 상대였다. 심지어 새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현재 그녀의 수준은 규열기 후기 정도에 불과했다.
‘요석설의 일은 내가 깨우친 인과의 도를 완성시키는 데 필요한 마지막 관문이다. 수백 년간 나는 그 안에서 인과의 일부분으로 갇혀 있었다. 오직 그 인과에 완전히 녹아들어야만 내게 필요한 경지를 깨우칠 수 있어!’
한제는 불바다에 뒤덮인 채 앞으로 나아갔다. 이에 따라 더욱 짙어진 불바다에 휩싸인 채 한제는 풍요를 향해 달려들었다.
심신이 뒤흔들리는 것을 느낀 풍요는 이를 악물더니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낮게 외쳤다.
“바람의 규칙!”
그 순간, 요풍(妖風)이 나타나 풍요의 주위를 맴돌았다.
쾅!
격렬한 폭발음과 함께 요풍은 셀 수 없이 많은 바람으로 갈라지더니 풍요의 손짓에 따라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하면서 요풍에 뒤덮였고 심지어 바다까지 격렬하게 요동쳤다.
끝없는 요풍에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하늘에는 수많은 미세한 균열이 나타났다.
갈라진 바람들이 하나하나의 칼날처럼 사방을 휩쓰는 와중에 불바다는 꺼질 듯이 약간 어두워졌다.
하지만 한제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불어닥치는 바람을 오롯이 몸으로 받아내며 한 걸음씩 내딛었다.
‘이제 나는 이 인과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이것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야만 인과의 도를 완성시킬 수 있고 나의 도심 역시 돌파된다!’
한제는 오른손을 움켜쥐어 매섭게 주먹을 휘둘렀다.
쾅!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고신의 허상이 나타났다. 머리는 하늘에 닿고 발은 바다에 닿을 정도로 커다란 고신의 허상은 한제와 마찬가지로 주먹을 휘둘렀다.
세대
풍요는 찬 숨을 들이마셨다. 한제의 몸에서 풍기는 그 끔찍한 기운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것을 망각해버렸던 탓에 명확히 알아채지는 못했다. 허나 지금 눈앞에 나타난 허상을 본 순간, 잊고 있었던 당시의 그 끔찍함이 떠올랐다.
“고신!”
머리가 저릿해진 풍요는 두 말 않고 곧장 몸을 물려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도망쳤다.
‘내가 이전에 했던 모든 행동은 이 인과의 도 아래에서 틀리지 않은 것들이다! 인과의 도가 여태 완성되지 못했던 것은 나의 도심에 지난 1천 년 동안의 살육으로 인한 흠이 나 있었기 때문이야!’
한제의 주먹이 수많은 요풍들과 충돌한 순간, 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요풍들은 갈기갈기 찢겨 사라져갔다.
한제는 저 멀리 도망치는 풍요를 힐끗 보더니 저물대에서 고부(枯符)를 꺼내 자신의 몸에 붙였다.
그 순간, 한 줄기 검은 바람이 한제의 체내에서 흘러나왔다. 이 회오리가 나타나자 해수면에도 강력한 기세의 소용돌이가 나타났고 하늘을 꿰뚫을 듯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와 동시에 온몸이 새카만 새 한 마리가 그 검은 바람 안에서 나타났다.
새가 날개를 쫙 펼치자 수십 척 크기에 불과했던 몸집이 끝도 없이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수십만 척에 이르러 하늘을 다 가릴 듯했다.
한제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고 그 순간 바람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전방의 바람은 마치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장벽 같은 힘도 고신의 육신 앞에서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인데도 한제는 세상에서 분리된 것 같은 모습이 되더니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허나 축지성촌은 아니었다.
풍요는 심지어 체내의 요기가 소모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망쳤다. 그녀의 몸을 뒤덮은 요기가 거대한 요영(妖影)의 허상을 소환해냈다.
풍요는 자신의 속도에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다.
한데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한 순간, 뒤에서 하늘이 갈라지는 듯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지?”
고개를 돌린 풍요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한제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순식간에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다가옴에 따라 해수면에서 나타난 소용돌이 역시 따라붙었고 그 격렬한 속도에 바다에서는 커다란 포효가 울려 퍼졌다. 바닷물 전체가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이 일의 결과는 나의 도심에 있다.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는 너와 나 사이의 인과를 완성시켜야 해!”
“인과라니, 무슨 소리냐?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겠다! 계속 나를 따라온다면 나 역시 온힘을 다하겠다! 그럼 넌 이곳에서 죽음을 맞게 될 것이야!”
풍요는 날카롭게 외치며 우뚝 멈추었다. 어차피 상대에게서 도망칠 수 없음을 알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였다.
더구나 요석설의 기억을 삼켜 없앴지만 끝까지 지우지 못한 한제에 대한 원한이 이 순간 폭발했다.
이에 그녀의 흉터로 가득한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고 흉터로 이루어진 문양이 녹색 빛을 번득였다.
“고요의 법기, 봉신쇄마번(封神鎖魔幡)!”
풍요는 크게 외치며 두 손으로 하늘을 떠밀었다. 온몸의 요기가 순간 그녀의 체내에서부터 발산되어 두 손으로 빠르게 응집됐다.
이내 무궁무진한 요기가 사방을 휩쓸었고 세상은 음산한 한기에 뒤덮였으며, 모든 것은 우우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 요기 안에서는 녹색 전광이 번득였고 이내 녹색의 작은 깃발 세 개가 나타났다.
콰르릉!
세 개의 녹색 깃발이 나타난 순간, 바람의 기색이 변하면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해수면이 기이한 힘에 의해 갈라졌다. 이어서 그 깃발들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허상이 나타났는데 개중에는 고신 하나와 뿔 달린 고마 둘이 포함되어 있었다.
허나 그보다 두려운 것은 그 깃발들로 인해 이 공간 전체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거친 파도가 몰아치면서 이 공간 안의 금제가 모두 활성화된 결과였다.
바다에서는 거센 파도가 몰아치면서 서로 모여들었고 눈 깜짝할 사이 갈라진 해수면에는 수많은 고랑이 나타났다. 이 고랑들은 파도를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허나 가장 끔찍한 것은 응집된 바닷물로 이루어진 한 사람의 인영이었다.
바닷물로 이루어진 인영은 잠든 듯했지만 끊임없이 응집되면서 점차 잠에서 깨어날 조짐을 보였다.
풍요는 거친 표정으로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고대 일족의 언어로 기이한 주문을 외웠다. 그 소리는 노련하게 느껴지기는 했으나 고신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처럼 위엄이 있다기보다는 날카롭고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풍요가 오른손을 앞으로 뻗자 앞서 나타난 세 개의 깃발이 순식간에 사방에서 회전하면서 짙은 녹색 안개를 피워 올렸다. 그리고 곧 그 안개 속에서 거대한 허상이 하나 나타났는데 키가 1만 척에 달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 같았다.
이 거대한 허상의 미간에서는 여섯 개의 반점이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 고신의 허상 양쪽에서는 그보다 약간 작지만 거칠어 보이는 인영 두 개가 나타났다. 거대한 두 인영은, 왼쪽 눈에서 여섯 개의 반점이 회전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난 순간, 녹색 안개의 속박에서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듯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짙은 마기가 폭발했다.
한제의 동공이 바짝 졸아들었다.
풍요는 이 허상들 앞에 서더니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한제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네가 고신이든 아니든 오늘 너는 우리 고요족의 성물인 깃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풍요는 살기 어린 눈빛을 번득이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순간 그녀의 뒤에 있던 세 개의 허상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를 내질렀고 그중 6성급 고신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한제에게 주먹을 매섭게 휘둘렀다.
동시에 두 고마의 허상은 몸을 훌쩍 날리더니 양옆에서 피비린내 어린 마기를 풍기며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