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26
고요족의 일원인 배이라는 비록 왕족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보통의 고요도 아니었다. 그의 봉신쇄마번(封神鎖魔幡)은 왕족 고요로부터 받은 것으로 왕족의 성물이 아니라 해도 막대한 신통력을 갖고 있었다.
완전한 고요였을 당시의 배이라는 진정한 봉신쇄마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사용하면 49개의 깃발이 나타났다.
깃발에는 그가 죽인 이들뿐만 아니라 봉신쇄마번의 이전 주인들이 죽인 사람들까지 봉인되어 있었다.
배이라는 그 법기의 일곱 번째 주인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 법기의 첫 번째 주인은 엄청난 힘을 가졌던 자로 고신과도 맞섰다고 했다. 보기 드문 네 번째 세대의 고요였다.
고대 일족은 하늘에 거역하면서 고신과 고요, 고마로 나뉘었다. 그렇게 갈라진 첫 번째 세대의 고신과 고요, 고마의 체내에는 고대 일족의 피와 유물이 많이 남아 있었다. 허나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세대를 거쳐 시간이 흐를수록 세 종족의 후손이 가진 피와 유물은 적어졌고 나중에는 희미해졌다.
그래도 소위 왕족은 세 종족 안에서도 고대 일족의 피를 가장 많이 이어받았다. 첫 번째 세대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이다.
배이라는 정확히 말하자면 79번째 세대의 고요였다. 하지만 그의 법기는 역사가 길었다.
다만 풍요는 고요로서의 정체성을 버린 상태였고 그 요체(妖體)는 일찍이 무너져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더는 진정한 법기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가 소환한 세 개의 작은 깃발도 온몸의 요기를 쥐어짜 만들어낸 것으로 한제가 멸신모(滅神矛)를 소환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풍요가 오른손을 앞으로 뻗자 세 개의 깃발에서 모습을 드러낸 고신과 고마가 곧장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한제는 망설임 없이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쾅!
세상이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균열이 나타났다. 마치 하늘에 거대한 고랑이 생겨난 것만 같았다. 그 균열 가장자리에는 번득이는 전광이 흐르면서 우렁찬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고 균열 안에서는 온 하늘과 땅을 뒤흔들 법한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풍요의 표정이 굳어갔다.
콰쾅!
다시 한 번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한 줄기 검은 빛이 하늘의 균열 안쪽에서 번득이며 튀어나와 한제의 손에 떨어졌다. 멸신모였다.
“고신 왕족의 성물!”
멸신모를 본 순간 풍요는 찬 숨을 들이마셨다.
“왕족 고신이란 말인가!”
한제는 오른손으로 멸신모를 세차게 휘둘렀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6성급 고신은 멸신모를 보더니 두 눈이 두려움에 물들었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는 보통의 6성급 고신으로 세대를 따지자면 배이라만 못한 존재였다. 그러니 눈앞에 나타난 고신족의 성물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봉신쇄마번의 본체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지금 풍요가 소환해낸 깃발의 위력은 본체의 그것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했다. 또한 그 깃발에 봉인된 고신과 고마의 위력 역시 진정한 봉신쇄마번의 고신과 고마보다 훨씬 약할 수밖에 없었다.
풍요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이렇게 끔찍한 존재를 화나게 한 요석설이 원망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일찍이 요석설이 원한을 품은 상대가 이런 자인 줄 알았더라면 그는 다른 수련자를 목표로 했을 것이다.
‘망할! 요석설의 기억 속 상대는 허약했다! 손짓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그런데 그런 자가 고신… 그것도 왕족 고신이었을 줄이야!’
세 종족 모두 남은 왕족은 이미 거의 멸종된 상태였다. 당시 배이라가 왕족 고요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저 우연한 결과였을 뿐이었다.
사실 풍요의 신통력과 수준이라면 상대가 사도환이라 해도 두려울 게 없었다. 허나 한제 앞에서 그녀의 수단은 하나도 통하지 않을 터였다. 자신감을 갖고 있던 빠른 속도도 신통력도 법보도 심지어 허상으로 불러낸 존재들도 한제가 가진 왕족의 법보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한제가 멸신모를 쥔 채 앞으로 달려들자 순간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했다. 온 세상은 격렬하게 진동했고 멸신모는 쉭 소리와 함께 덜덜 떨고 있는 두 고마의 허상을 향해 돌진했다.
두 고마 역시 허상에 불과한데다가 봉신쇄마번의 진정한 위력을 갖지 못한 상태였기에 왕족 고신의 성물인 멸신모 앞에서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멸신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눈 깜짝할 사이 고마 하나의 몸을 관통했다. 관통당한 고마는 경련을 일으키며 마기로 흩어지더니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 엄청난 위기의 순간, 풍요는 피를 한 움큼 토해내더니 오른손으로 그 위에 기이한 문양을 그렸다.
“기멸(旗滅)!”
그러자 허상의 고신과 고마를 소환해냈던 녹색 깃발이 격렬하게 회전하면서 풍요의 손짓 아래 콰르릉 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러더니 강력한 힘이 되어 한 마리 녹색 용처럼 곧장 멸신모를 향해 돌진했다. 또한 작은 깃발이 무너져 내리자 고신과 고마의 허상도 순식간에 와해되더니 그 거대한 녹색 용의 체내로 흘러들면서 용의 힘을 배가시켰다.
쾅!
멸신모와 녹색 용이 엄청난 속도로 충돌한 순간, 지름이 1천 척에 달하는 거대한 구가 그 두 법기 사이에 나타났다.
그 구 안에서는 검은색과 녹색의 기운이 끊임없이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고리 모양 빛이 그 구 밖에서 줄기줄기 번득이며 흐르는 동안 안쪽에서는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고 파멸적인 위압감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고신과 고요의 법기가 정면으로 벌이는 싸움, 왕족 고신의 멸신모와 네 번째 세대 고요의 법기가 벌이는 싸움이었다.
두 법기 모두 본체가 아닌 허상이었지만 그 위력은 강력했다. 구 안에 깃든 포악한 검은 기운은 모든 것을 파멸할 듯했고 녹색 기운은 끊임없이 저항했지만 상황을 뒤집지는 못했다.
바다 거인
녹색 기운이 끊임없이 뒤로 물러나면서 결국 구의 내부는 검은 기운으로 가득 차게 됐고 그 순간 구는 펑 하고 터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꽈르릉!
순간 온 세상을 뒤흔들 법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바다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몰아쳤다.
구가 무너져 내리면서 형성된 충격에 녹색 용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사라졌고 멸신모는 곧장 풍요를 향해 돌진했다.
“큭! 쿨럭!”
파괴된 법기가 비록 허상에 불과하다고 하나 요기로 이어져 있었기에 중상을 면할 수 없었던 풍요는 피를 토했다. 허나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달려드는 멸신모 때문에 하얗게 질린 풍요는 재빨리 후퇴해야 했다.
한제는 싸늘한 표정으로 곧장 그녀를 추격했다.
“그놈의 인과가 뭐기에 아무 관련도 없는 나를 이리 핍박하느냐! 너와 요석설 사이의 일에 난 관여한 적 없단 말이다!”
풍요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넌 본디 이 인과 밖의 존재였으나 스스로 그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당장 요석설의 몸을 떠난다면 놓아주마!”
“헛소리! 난 그저 한 자락의 기억일 뿐인데 어찌 이 몸을 떠난단 말이냐!”
풍요는 이를 악물었다. 요석설과 융합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인과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요석설과 융합함으로써 이 상황에 끼어들었고 벗어날 수 없게 됐다는 사실만은 파악할 수 있었다.
멸신모는 어느덧 풍요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한데 갑자기 한제의 표정이 변하더니 지체 없이 몸을 훌쩍 날렸다.
펑!
그 순간 해수면에서 바닷물로 이루어진 손바닥 하나가 쑥 빠져나와 방금까지 한제가 있던 곳을 휩쓸더니 멸신모를 움켜쥐었다.
멸신모는 이에 저항하듯 검은 빛을 내뿜었다.
바다로 이루어진 손이 멸신모를 잡아끄는 것을 본 한제는 싸늘한 눈빛으로 낮게 외쳤다.
“붕괴!”
그러자 멸신모에서 발산되던 검은 빛이 끝도 없이 확대되면서 마치 검은 태양처럼 보였다. 심지어 멸신모를 쥔 거대한 손까지 그 검은 빛에 물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빛이 한계치에 달한 순간…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파멸적인 힘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바닷물로 이루어진 팔은 무너져 내렸고 팔을 이루었던 바닷물은 수증기로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한제의 표정은 더욱 신중해졌고 ,풍요 역시 굳은 얼굴로 바다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때, 묵직한 포효가 바다 안에서 울려 퍼졌다. 하늘과 땅을 뒤흔들 정도로 우렁찬 그 소리는 음파의 폭풍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해수면이 격렬하게 용솟음쳤다.
한제는 두 눈동자가 바짝 졸아든 채 찬 숨을 들이마셨다.
위로 솟구쳐 오른 것은 바닷물이 아니었다. 바닷물이 응집되면서 이루어진 사람의 형상이 상체를 일으킨 것이었다.
크기를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의 거인이었다. 앉아 있는데도 머리가 하늘에 닿을 듯했고 바닷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몸집을 일으키자 바다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 그곳에 바다는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바닷물로 이루어진 거인뿐이었다.
이목구비가 흐릿했으나 두 귀가 거대한 바다 거인은 냉랭한 눈으로 한제와 풍요를 응시하더니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오른손을 뻗었다. 그 손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콰르릉 하는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제는 곧장 뒤로 물러나 그 손을 피했다.
“고작 이슬로 이루어진 금제 따위가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한제의 두 눈에서 화염이 이글거렸고 그의 몸에서는 주작의 문양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그는 두 팔을 양옆으로 펼쳤고 그 순간 불바다가 그의 체내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불바다는 한제의 원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순식간에 온 하늘을 뒤덮었다.
하늘을 가득 뒤덮은 불바다 아래에 바다 거인이 서 있는, 놀라운 상태였다.
“하앗!”
바다 거인이 뻗었던 두 손을 거둬드리려는 찰나, 한제는 불바다 안에서 낮게 기합을 내질렀다. 그 순간, 하늘을 뒤덮은 불바다가 하강하면서 곧장 바다 거인에게로 달려들었다.
불바다가 다가오기도 전에 뜨거운 열기가 먼저 훅 끼쳐왔다.
멀리 떨어져 있던 풍요는 이 광경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자를 건드리는 게 아니었어!’
그때, 눈 깜짝할 사이 불바다가 사방에서 바다 거인의 몸으로 응집되면서 대량의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하얀 증기는 고리 형태로 멀리까지 확산됐다.
“우오오오!”
바다 거인은 다시 한 번 포효했다. 이 포효에 그의 전신을 이룬 바닷물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마치 바닷물이 하늘을 집어삼키는 듯한 광경이었다.
바닷물이 하늘을 뒤덮은 불바다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한 파도의 장벽이 하늘과 이어진 듯한 모습으로 이 장벽은 고리 형태를 이룬 채 사방에서 중앙을 향해 응집되었다.
콰르릉! 쾅!
거대한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하늘과 땅을 연결한 거대한 파도 장벽이 수축하면서 불바다가 꺼져버렸다. 그러나 그 장벽 또한 한제로부터 1천 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불바다와 충돌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때, 하늘과 땅을 연결한 파도 장벽에 순간 거대한 얼굴이 하나 떠올랐다. 바로 그 바다 거인의 얼굴이었다.
장벽 위에 떠오른 얼굴은 곧장 포효했고 입을 쩍 벌린 채 한제를 삼키려 들었다.
한제의 두 눈에서는 화염이 이글이글 타올랐고 옷에 가려진 주작의 문양에서 발산된 붉은 빛이 드러났다. 그 순간, 주작의 소리가 한제 체내에서 울려 퍼졌다.
“캬아아아!”
높고 강력한 주작의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한제의 온몸은 불에 타오르는 듯했고 한 마리 붉은 주작이 그의 체내에서 튀어나와 두 날개를 펼쳤다.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바다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