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27
바다 거인의 거대한 입이 닥쳐온 순간, 한제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외쳤다.
“주작의 불!”
그 한 마디에 한제 상공에 떠 있던 주작이 날개를 펼치며 무궁무진한 불바다를 사방으로 확산시켰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불은 계속해서 확산되었고 이에 한제를 삼키려 들던 바다 거인은 고통에 가득 찬 포효를 내지르며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한제 가까이까지 접근해왔던 거대한 파도 장벽도 수증기가 되어 사라졌고 나머지는 끊임없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주작의 불은 끈질기게 그것을 추격했고 파도 장벽은 흩어져 사라지면서 다급하게 아래로 응집되어 다시금 바다 거인의 모습이 됐다.
허나 이제 바다 거인은 키가 많이 줄어들었다.
작아진 바다 거인이 나타난 순간 주작의 불이 달려들어 그를 맴돌았고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오른손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캬아아아!”
한제의 상공에 떠 있던 주작이 다시 한 번 소리를 내지르자 그 소리는 새빨간 화염이 되어 쏘아져 나가더니 순식간에 바다 거인의 체내로 뚫고 들어갔다.
“크아아아!”
바다 거인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지금 바다 거인은 온몸이 화염으로 뒤덮인 채로 체내에서부터 불바다에 휩싸인 상태였다.
안팎이 동시에 타오르는 상황에서 바다 거인은 몸부림치듯 두 팔을 휘둘렀지만 그의 몸을 이룬 바닷물이 끊임없이 증발하는 것을 멈추지는 못했다. 대량의 수증기가 그의 몸에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 무렵, 풍요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미 자신과 한제 사이의 차이를 실감했으나,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이 악독하게 번득였다.
그때였다. 끊임없이 수증기로 흩어지면서 몸이 계속해서 줄어들어 금방이라도 소멸될 것만 같던 순간, 바다 거인은 하늘을 뒤흔들 듯 거대하게 포효했다. 동시에 그의 온몸을 이룬 바닷물은 불길에 휩싸인 채 수축하더니 한 방울의 물로 변했고 이글거리는 화염을 뚫고는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캬아아!”
주작이 포효를 내지르며 한제를 향해 달려드는 물방울을 바짝 뒤쫓았다.
이는 바다 거인의 마지막 반격으로 물방울의 속도는 매우 빨라 눈 깜짝할 사이 한제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눈으로 조금의 동요도 없이 오른쪽 눈의 푸른빛을 번득였다. 그러자 그 물방울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 그의 앞에 청광순(靑光盾)이 나타났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청광순은 거대한 힘에 충돌하면서 몇 촌 정도 밀려났다. 하지만 조금의 깨진 흔적도 없이 그 물방울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와 동시에 물방울을 추격하던 주작이 하늘을 뒤덮을 듯 엄청난 규모의 불바다로 그 물방울들을 휩쓸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열기가 확산되었고 물방울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저항과 함께 울려 퍼졌던 거인의 포효는 메아리치듯 서서히 사라져갔다.
하늘은 조각났고 바닷물이 사라져 드러난 해저도 마디마디 갈라졌다. 그리고 갈라진 대지 아래로 녹색 빛이 드러났다.
바다로 가득했던 이 세상은 동굴 꽃밭의 어느 풀잎 위의 이슬 속 세상이었다.
풍경이 이지러지는가 싶더니 다시 또렷해졌고 한제는 눈앞에 꽃밭이 펼쳐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바다뿐이었던 세상이 붕괴하던 찰나, 전속력으로 튀어나간 풍요는 동굴 안에 나타났다. 그녀의 목적은 단 하나. 다른 금제로 들어가 한제를 피하는 것이었다.
한데 그녀가 몸을 날리기도 전에 돌연 한제의 모습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풍요가 방향을 틀려는 순간, 귓가에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定)!”
그 외침에 풍요는 그대로 우뚝 멈춰버리고 말았다. 멈춰 있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제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풍요의 얼굴 위에 드러난 흉터를 건드렸다. 그러자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 흉터는 사라져버렸고 요석설의 희고 깨끗한 피부가 드러났다.
“요석설, 난 너를 죽이지 않는다. 널 구해줄 것이다. 그것으로 너와 나의 인과를 끝내고 네가 너의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주겠다. 이후 너와 나는 서로 간섭하는 일 없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
한제는 계속해서 풍요의 몸을 건드렸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손의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정신술의 효력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정신술을 발휘하여 풍요의 몸을 붙들어 놓았다. 풍요의 눈에는 점점 두려움이 어렸다. 그는 한제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풍요의 몸에 드러난 흉터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모든 흉터가 사라지자 요석설은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았다.
백옥처럼 희고 깨끗한 피부는 내쉬는 숨결만으로도 흩어질 것처럼 부드러워 보였고 아름답게 빛났다. 마치 요령의 땅에서 처음 만났을 당시의 요석설을 마주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한제는 다시 풍요의 미간을 건드렸다. 그러자 풍요는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 위기의 순간, 풍요는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제의 손가락이 재차 미간을 두드려 온 순간, 어렴풋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손짓은 융합된 너와 요석설의 기억에 틈을 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야만 그녀를 구할 수 있을 테니까.”
한제는 기이한 눈빛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지막으로 또 한 번 풍요의 미간을 두드렸다.
풍요는 그런 상대의 눈빛에 한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네가 요석설과의 약속대로 그녀의 복수를 도왔다면 너는 이 인과에 난입한 것이 아니라 그 일부가 되었을 테니 나도 너를 방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너는 그리하지 않았다. 네가 요석설을 속인 것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나 그로 인해 내 생사윤회의 경지와 인과의 경지가 진화할 가능성이 파괴됐지. 게다가 네가 그녀에게 전수한 것은 기억일 뿐이므로 사실상 너는 진즉 죽어 없어진 상태다. 지금의 너는 풍요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여전히 요석설이다. 넌 기억에 불과한 존재이니 죽을 수도 없지.”
한제의 두 눈에서 번득이는 기이한 빛이 더욱 짙어졌다. 뒤이어 입을 벌린 그는 깊게 들이마셨다.
청수의 선술 중 가장 포악한 탄서(吞噬)가 한제에 의해 처음으로 발휘된 순간이었다. 한제는 요석설의 체내에 존재하는 요기를 삼키고 있었다.
풍요의 눈에 담긴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그녀는 자신의 체내에서 요기가 빠져나가 눈앞의 수련자에게 흡수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만남
풍요의 몸을 뒤덮은 요기는 끊임없이 한제의 입안으로 녹아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요석설의 혼백 아주 깊은 곳에 새겨져 있던 풍요의 기억 역시 한제의 원신으로 흡수되었다.
“네 기억을 요석설의 혼백에 남길 수는 없다. 허나 너와 나는 본디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이였으니 너를 위해 다른 매체를 찾아주마.”
잠시 후, 요석설은 몸을 바르르 떨며 흐릿한 눈을 떴다. 그녀는 매우 허약해진 상태로 정신을 차리자마자 뒤로 물러났다. 눈빛은 여전히 흐릿했다.
“당신은⋯⋯?”
요석설은 멍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에 요석설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네 이름은 요석설이다. 그리고 나는… 네 친구지.”
“요석설⋯⋯.”
요석설은 멍하니 제 이름을 중얼거리면서도 경계심 어린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한제는 입을 벌려 한 줄기의 어스름한 빛을 뱉어냈다
“꺄악!”
그 광경이 두려웠는지 요석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모든 기억을 잃고 일반인과 다를 것 없는 처지가 된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선인의 술법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18지옥의 봉선인(封仙印)이 나타나자 한제는 말없이 오른손으로 열네 번째 층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단 하나의 혼백밖에 없었다. 바로 핏빛 안개로 뒤덮인 채 수시로 하늘을 뒤덮을 듯 짙은 원한을 드러내는 혈조의 혼백이었다.
봉선인에서는 붉은 빛이 빠르게 번득였다. 이어서 봉선인의 열네 번째 층에서는 붉은 안개가 확산되었고 그 안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한제를 죽일 듯 노려보는 혈조의 모습이 나타났다.
허나 그 순간, 요석설의 존재를 감지한 혈조는 몸을 돌려 딸을 바라보았다. 날카롭고 거칠었던 표정이 눈 녹듯 사라지더니 부드러움이 떠올랐다.
반면 요석설은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나 핏줄에는 본능적으로 끌리는 듯했다.
“혈조, 내가 약속했지. 당신과 당신의 딸을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이제야 그 약속을 지켰군.”
한제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혈조의 몸을 뒤덮은 붉은 안개가 흩어져 사라졌고 그를 통제하던 금제도 해제되었다.
혈조의 혼은 붉은 빛을 번득이며 점차 응결되더니 마침내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눈앞의 딸을 보고 있는 그의 눈에는 감격과 행복이 가득했다.
“이렇게 끝나는군. 나를 이용하려 했던 요석설은 수백 년간 봉인됐고 나를 죽이려 했던 당신은 죽음을 맞았지. 요석설은 내게 복수하기 위해 기억을 잃은 채 풍요의 꼭두각시가 되었어. 나는 그녀를 살려주는 것으로 이전의 일을 청산하기로 했지. 이제 당신 부녀와 나 사이에 남은 빚은 없어. 이 인과는 끝이 난 셈이야. 만약 계속해서 나를 해하려 한다면 그때는 당신 부녀를 죽이고 그 혼이 영원히 윤회의 굴레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막겠어.”
한제의 목소리는 덤덤하면서도 냉랭했다. 뒤이어 그는 소매를 휘두르며 몸을 돌렸다.
“혈조, 이제 당신은 자유야. 딸과 함께 남은 생을 살도록 해. 이곳은 요령의 땅, 선제의 동굴이니 이곳이 완전히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떠나면 될 거야.”
요석설의 멍한 눈빛은 멀어지는 한제의 뒷모습에 닿아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으나 어쩐지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마치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과거는 바람처럼 사라졌으니 떠나가도록 놓아줘도 상관없다고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요석설은 그 목소리가 자신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 기억할 수 없는 이전의 그녀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었다.
혈조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점점 멀어지고 있는 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금제의 봉인에서 풀려난 뒤 그의 지능은 이미 완전히 회복되었고 비록 혼체(魂體)에 불과한 상태라고는 하나 당시의 수준으로 계속해서 수련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제 그의 눈에서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깊은 원한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혈조는 자신과 자신을 딸을 죽이는 것이 지금의 한제에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그렇게 하는 대신 자신에게는 자유를 딸에게는 새로운 삶을 주었다.
혈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한은 더 이상 남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딸의 평안이었다. 기억을 다 잃은 상태이기는 했지만 이는 어쩌면 그녀에게 더 나은 일인지도 몰랐다.
모든 것을 겪고 난 지금 혈조는 자신이 심적으로 많이 늙었음을 느꼈다. 그가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딸의 평안한 여생일 뿐이다.
혈조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요석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가 이 아비와 가자꾸나.”
요석설은 비록 기억을 잃었지만 혈연에게 느끼는 본능적인 친근함에 혈조 옆에 붙어 함께 걸었다.
“⋯⋯아버지, 방금 그자가 한 말, 진실인가요?”
“그건 더 이상 중요치 않단다.”
말을 마친 혈조는 고개를 돌려 멀리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한제의 수준도 꿰뚫어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전에는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녀석이었는데 수백 년 만에 저렇게 성장했다니⋯⋯.’
한편, 한제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이번 선택에 대해 어쩌면 누군가는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한제가 이렇게 해결해야 겠다고 생각한다면 이 인과는 이렇게 정리될 것이다.
한 걸음, 두 걸음… 한제의 체내에서 흘러넘칠 듯 강력한 기운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강력해졌고 결국 하늘을 뒤덮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한제의 두 눈이 점점 밝게 빛났다.
요석설과의 일을 해결하면서 그 인과에서 빠져나온 한제의 도심은 원만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순간, 한제는 오랫동안 진전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던 자신의 수준이 돌파할 조짐을 보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은 장선지(葬仙池)의 붕괴로 인해 폐허가 된 상태였다. 멀지 않은 곳에 생겨난 거대하고 깊은 구덩이에서는 음산한 기운이 발산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던 한제의 시선이 전방에 닿았다. 이곳은 선제의 동굴 외부에 불과할 뿐, 그는 아직 그 안쪽으로는 들어서지도 못한 상태였다.
저 멀리 여러 누각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건물들의 배치는 불규칙적인 도안을 이루고 있었고 한제의 시선 끝자락은 검은 안개로 뒤덮인 그 누각들의 깊은 곳을 향했다. 너무나 짙은 안개 속에서 어느 거대한 대전의 뾰족한 꼭대기가 보일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