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30
허나 그 냉랭함 속에는 고귀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오만함에 가까운 그 고귀함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그녀를 우러러보게 만들었다.
“주은혜, 스승님을 뵙습니다.”
호랑이 곁의 여인이 조용히 인사했다.
해와 달마저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은 주은혜를 바라보면서도 냉랭한 눈빛을 잃지 않았다.
그녀가 막 입을 열어 무슨 말인가 하려던 그때, 한제의 심신이 그 두 여인을 목격했다.
그 순간,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확산되던 한제의 심신이 순간 우뚝 멈추고 말았다. 동시에 한제의 심신에서 모종의 힘이 폭발되어 나오면서 기이한 상태에 침잠되어 있던 그를 깨어나게 만들었다.
그 두 여인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 아름다운 여인을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제는 그녀를 본 순간 비할 데 없는 씁쓸함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이평의 혼백은 아직도 천역주 안에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한제가 어떻게 그 악독한 여인을 잊을 수 있겠는가?
지독한 아픔으로 인해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일도 세상에는 존재하는 법이었다.
한데 그가 기이한 침잠에서 깨어난 그때, 산봉우리 위의 그 아름다운 여인의 냉정함에도 순간 엄청난 변화가 일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냉정함이 무너져 내린 듯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곳에서 기억 가장 깊은 곳에 남아 있는 허상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류미⋯⋯.”
그때, 하늘에서 흘러온 흐릿한 목소리가 여인의 귓가에 닿았다. 이에 여인은 몸을 바르르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한제의 심신이 깨어난 순간, 천역주의 힘에 의해 퍼져 나갔을 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곤허경에서 벗어났다. 이어서 온 성역을 뒤덮을 듯 확산 되었던 고리 모양의 심신이 수축되었다.
한제의 존재를 처음으로 느꼈던 곤허경의 노인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깨어난 한제의 심신이 되돌아가던 순간, 연맹성역 북쪽의 전장에서 염뇌자를 비롯한 몇몇 사람이 급변한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한제!”
염뇌자의 얼굴에 좀처럼 보기 드문 놀란 눈빛이 떠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한제를 아는 이들은 모두 깜짝 놀란 상태였다.
수련자 연맹 본부의 보라색 회오리 위에 떠 있던 수련성 안 밀실의 중년 사내 또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자는 누구지?”
그리고 우주를 가로지르던 불바다 속의 주작도 다시 한 번 포효를 내지르더니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한편, 이때 우주 어딘가에서는 청의를 입은 비쩍 마른 수련자 하나가 냉랭한 얼굴로 수련자 연맹의 본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머리가 빽빽하게 뒤따랐고 그 머리들에서 풍기는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내다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한제⋯⋯ 수준을 돌파시켰구나. 이 기운은 분명 천역주의 기운일 터. 천역주를 이용해 깨달음을 얻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나도 안심하고 수련자 연맹에 갈 수 있겠어. 가서 당시 선계의 붕괴에 관한 비밀을 밝혀내고 그때 내가 광기에 빠져든 이유를 찾아낼 것이다!’
깊은 구덩이 아래
그 무렵, 한제의 심신이 되돌아와 체내로 스며들었다.
한제는 순간 몸을 바르르 떨었다. 눈앞에 둥둥 떠 있던 천역주가 천천히 다가와 미간으로 녹아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한제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규열기 절정의 기운이 체내에서 발산되었다. 수많은 규칙을 살피고 목격하면서 규열기 절정에 이른 것이다.
한참 뒤 한제는 냉랭한 기운과 더불어 복잡한 빛이 어린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동굴의 상공을 바라보았다.
천역주의 힘 아래 심신을 확산했을 때 수많은 광경을 목격했지만 침착했던 그의 마음이 복잡해진 이유는 단 하나, 바로 그 여인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류미는 분명 그녀의 분신이었겠지.’
“그리고 주은혜⋯⋯ 놀랍게도 그 아이가 류미의 제자가 되었구나. 틀림없이 모종의 비밀이 있을 터. 류미는 정말이지 너무도 교활하다.”
한제는 류미의 출현으로 인해 복잡해졌던 심신을 가까스로 가라앉힌 체내에서 끊임없이 맴도는 원력을 느끼며 감탄했다.
“규열기 절정!”
그의 두 눈이 번득였다. 다른 생각은 필요 없었다. 지금 그는 선제의 동굴에 있고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세상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지. 천(天), 지(地), 오행(五行)을 비롯한 그 모든 것에 자체적인 규칙이 있어. 이 규칙들을 또렷하게 파악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지. 평생을 들여도 그 모든 규칙을 또렷하게 파악할 수는 없을 거야. 그래서 정열기와 쇄열기 수련자마다 각자가 가장 잘 파악한 규칙의 힘이 있었지. 예컨대 염뇌자에게는 불의 규칙이었어.’
한제의 오른쪽 눈에서 빛이 번득이더니 넓게 확산되었다가 반짝이는 번개 공이 되었다.
그 안에는 흐릿한 허상이 하나 떠 있었는데 한제의 원신과 같은 태고의 뇌룡 형태였다. 원신의 허상이 번개 공 안에 녹아 든 것만 같았다.
번개 공의 모양도 은연중에 변해가면서 약간 투명해졌지만 이전처럼 규칙의 선 형태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내가 얻은 태고의 뇌룡은 반쪽일 뿐이었어. 나머지 반은 심연 안으로 사라졌지. 그래서 내 천둥번개의 힘도 완전치는 않아. 당연히 그 안에 함유된 규칙도 그럴 테지.’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번개 공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수없이 많은 곡선의 전광이 되어 흩어져 사라졌다.
그 순간, 한제의 왼쪽 눈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이 짙어지는가 싶더니 튀어나와 전방에서 불바다를 이루었다.
불바다 안으로 주작의 모습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한제는 주작을 응시했다. 주작은 금세 흐릿해졌고 불바다는 붉은 곡선이 되어 더욱 또렷해졌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정열기에 이르려면 한 종류 이상의 규칙을 완벽하게 파악해야 해. 그래야만 그 규칙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자연적인 힘을 얻어 체내의 원력을 끊이지 않게 할 수 있어. 게다가 정열기 수련자의 힘 자체도 규칙과 큰 연관이 있지.’
한제가 손을 휘두르자 불바다는 흩어졌고 그의 두 눈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천둥번개와 불의 규칙이지. 허나 불은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힘이라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어. 이를 계속 수련하고 깨달으면 규열기에서 정열기로 돌파할 수 있겠지. 허나 그랬다가는 천둥번개의 힘이 줄어들 테지. 그렇다면… 천둥번개의 힘과 불의 힘을 융합해 그것으로 정열기에 이른다면 그 위력은 만만치 않을 거야!’
한제는 고민에 잠긴 채 몸을 훌쩍 날려 깊은 구덩이 안으로 들어선 뒤 내벽의 동굴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본체 옆에 이르렀다.
은시는 여전히 그 곁을 지키고 앉아 있었는데 한제의 분신을 보고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한제는 본체와 융합했고 가부좌를 튼 채 온몸으로 발산했던 살기(煞氣)를 거두며 눈을 떴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 천역주의 힘으로 우주에서 보았던 주작은 내 몸의 문양과 똑같았어. 분명 무슨 연관이 있을 거야.’
한제는 균열이 일어난 동굴의 입구로 향했고 은시는 묵묵히 뒤를 따랐다. 한제의 등을 힐끗거리는 그녀의 눈에서는 혼란스러운 듯한 빛이 드러났다.
“음?”
동굴 입구에 이른 한제는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물러났다.
한 줄기 어스름한 빛이 구덩이 저 아래에서 번득이며 나타나더니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 빛은 도착하기가 무섭게 한제에게 다가오더니 옷자락을 물고는 마치 그네를 타듯 매달린 채로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한제는 이토록 작고 귀여운 녀석에게 놀랐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어버렸다.
빛은 헝클어진 검은 털로 덮인, 눈만 영민하게 빛나는 성흔(星痕) 담비였다.
담비는 한제의 어깨 위에 내려앉더니 두 발로 자기 얼굴을 몇 번이나 비벼댔고 한제의 목에 축축한 코를 박고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서사의 기억에 따르면 성흔 담비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고신의 기운이었다.
고신의 기운은 성흔 담비에게는 훌륭한 자양제와도 같았다. 고신 곁에 오래 머문다면 훨씬 빨리 성장할 수 있고 탈변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탈변할 경우 성흔 담비는 고신의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다. 다만 성흔 담비의 탈변은 매우 어려워 오랫동안 고신의 기운을 흡수한다 해도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서사의 기억에서 탈변한 성흔 담비의 모습을 확인한 한제는 어깨 위의 담비를 바라보았다.
‘서사의 기억에 따르면 고신들은 성흔 담비를 매우 아껴 상대가 누구라도 자신의 담비에게 손을 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지.’
한제의 냄새와 기운을 느끼던 담비는 영민한 두 눈이 흥분으로 번득였고 아예 그 어깨 위에 자리를 잡은 채 내려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제가 손으로 잡았을 때는 죽어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옷자락을 꽉 잡고는 불만에 가득 찬 울음소리를 냈다.
두 손에 성흔 담비를 든 한제는 한참이나 녀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담비는 그가 천운성에 갔을 때 처음으로 봤던 녀석이었다. 당시에도 녀석이 자신을 꽤 좋아하기는 했지만 수백 년이 흐른 후에 이렇게 조우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담비가 피하지 않고 귀엽고 영민한 두 눈으로 한제를 빤히 바라보면서 둘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게 됐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담비가 슬쩍 눈을 피하면서 몸을 꼬는 모습에 한제는 피식 웃으며 손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담비는 곧장 그의 어깨 위로 돌아가 또 다시 몇 번이고 냄새를 맡더니 그제야 안정을 찾은 듯했다.
한제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옥패에 새겨진 지도를 따라 선제의 동굴을 살펴볼 작정이었다.
한데 그가 두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성흔 담비가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구덩이 저 아래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한제와 아래쪽을 몇 번 번갈아보더니 우는 소리를 냈고 느닷없이 몸을 날려 아래쪽으로 향했다.
한제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결심한 듯 성흔 담비의 뒤를 따랐다.
‘성흔 담비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고신의 기운이야. 그런 녀석이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이 장선지(葬仙池) 아래에 고신의 물건이 묻혀 있는 것인지도 몰라!’
한제는 한참이나 담비의 뒤를 따라 내려갔지만 깊은 구덩이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음산한 기운이 끊임없이 피어올라 사방의 벽을 뒤덮어 심지어 서리가 앉은 상태였다. 마치 이 구덩이 아래에는 끝없는 심연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한제는 침착한 모습이었지만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허나 앞서나간 성흔 담비는 이곳이 익숙한 듯 내달려 이제는 종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느껴지는 한기가 더해져 입김조차 순식간에 얼어버릴 듯했다. 벽에 내려앉은 얼음층은 점점 두꺼워졌고 뾰족한 얼음송곳들이 곳곳을 뒤덮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아래에서 한 줄기 어스름한 빛이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성흔 담비가 기다렸다는 듯 한제의 어깨 위로 튀어 올라왔다.
한데 성흔 담비가 다가온 순간, 한제는 끝없는 저 아래에서 어렴풋이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제는 우뚝 멈춰 서서 시선이 느껴진 쪽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체내의 원력을 가동했다. 그의 눈에서 두 갈래 화염이 나타나 불바다를 이루더니 아래로 퍼져나갔다. 불바다의 일렁이는 빛 덕분에 신식으로도 살필 수 없었던 저 아래의 어둠이 순식간에 밀려났다.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아래로 향했다. 아까의 그 눈빛에서 뭔가 짚이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사방의 벽을 뒤덮은 얼음은 점점 더 많아졌고 1각쯤 지났을 무렵에는 거의 바닥에 이르러 있었다.
생생히 드러난 아래쪽의 광경은 마치 얼음 세계인 듯 형태와 크기가 각양각색인 거대한 빙하가 사방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각 얼음 안에는 살아 있는 듯한 시체가 한 구씩 들어 있었다. 죽기 직전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채 얼음에 갇힌 그 시체들의 모습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더 아래쪽에 사방의 빙하가 교차한 정중앙에 있는 작은 틈 안의 저 존재였다. 그 존재는 아까 느낀 그 눈빛의 근원이기도 했다.
빙하 틈을 통해 그 아래쪽을 들여다본 한제의 두 눈이 바짝 졸아들었다.
그곳에는 키가 약 수천 척에 달하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머리, 바로 고신의 머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