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39
한제를 바라보는 이오의 눈빛에는 부드러움과 대견함이 섞여 있었다.
모든 상황이 명확해진 상태였지만 한제는 곧장 청상의 육신을 꺼내 보이는 대신 몇 걸음 물러나며 이오와 호연에게 물었다.
“두 선배님의 정체는 대체 무엇입니까?”
한제의 신중한 표정에 이오는 더욱 만족스러웠다. 그가 신중한 사람일수록 주일이 그 중요한 일을 상대에게 맡긴 것이 더 납득이 갔기 때문이다.
“좋다. 너와 주 형은 우리는 물론 선제 청림에게도 큰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니 더 이상 우리 정체를 숨기지 않겠다.”
이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더니 선부의 여섯 번째 층 중앙의 검은 안개로 뒤덮인 곳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는 슬픈 기색이 어려 있었다.
“나는 당시 선제 청림 좌하에 있던 첫 번째 호위였고 동시에⋯⋯ 은사님의 두 번째 제자이기도 하다.”
그 순간, 이오의 몸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세가 솟아올랐다. 그 기세에는 하늘과 땅을 뒤흔들 듯한 고고함이 배어 있었다.
“난 은사님의 일곱 번째 제자로 어렸을 때부터 청상과 함께 자랐지.”
호연도 입을 열었다.
“당시 선계가 엄청난 재난을 맞아 붕괴했을 때, 우리 부부는 외부에 있던 터라 그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은사님께서 죽지 않고 중상을 입은 채 폐관수련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우리는 수없이 많은 동굴들을 찾아 헤맨 끝에 결국 은사님께서 이 선령천경(仙靈天境)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제는 가늘게 떨며 말없이 운선 부부를 바라보았다.
호연은 한제를 바라보다가 한쪽의 금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순간 그 금제가 변화를 일으키더니 훨씬 강력해졌다.
“이 연단방 근처의 금제가 다른 금제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겠지? 은사님이 이 동굴을 만드셨지만 모든 건물과 금제는 내가 배치한 것이다.”
호연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한제의 귀에는 천둥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한제는 찬 숨을 들이마시며 쓰게 웃었다.
“선배님이셨군요. 저는 이오 선배님이 배치하신 줄 알았습니다.”
이오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내 금제술은 호연에 미치지 못한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은 한제는 저물대에서 선옥탑을 꺼냈다.
한데 바로 그때, 이오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고개를 홱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뒤이어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여섯 번째 층에 울려 퍼졌다.
그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온 순간 한제는 저 멀리서 머리가 벗어진 사람이 허공을 밟으며 빠르게 돌진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배이라!”
한제의 눈이 번득였다.
“청림의 훌륭한 제자로군. 금제로 나를 묶어놓다니!”
몇 걸음 만에 근처에 이른 배이라는 한제를 보더니 놀란 듯 웃었다.
“너도 여기까지 왔구나!”
배이라의 두 눈이 기이하게 번득였다.
그때, 이오가 서늘한 눈빛으로 차게 코웃음을 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결인을 그린 손을 뻗었다. 순간 비의 장막이 나타나 배이라를 향해 날아들었다.
동시에 호연은 옆쪽의 금제로 들어서더니 손가락 끝을 깨문 뒤 허공에 기이한 문양을 그렸다. 문양은 어스름한 빛을 발산했다.
그 순간, 선제의 동굴 여섯 번째 층의 모든 금제가 살아난 것처럼 동시에 빛을 번득였다.
금제는 어스름한 빛을 발하며 사방에서 떠오르더니 배이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온 하늘이 금제의 어스름한 빛으로 뒤덮였고 호연의 손짓에 따라 일제히 응집되었다.
“난 너희와 싸우고 싶지 않다. 너희의 목적은 청림을 살리는 것이고 내 목적은 고마(古魔) 타지아를 찾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서로 다르나 힘을 합칠 수 있지. 너희 둘의 힘이라면 타지아의 봉인을 풀기에 역부족일지 모르나 내 힘까지 더해진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겠는가?”
배이라는 두 팔을 뻗어 사방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체내에서 발산된 요기가 하늘을 꿰뚫을 법한 기세로 뿜어져 나와 회오리를 형성하며 퍼져나가 그를 뒤덮었다.
요기로 인해 뒤틀린 듯한 배이라의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바르르 떨려올 정도였다.
허공자의 식은땀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한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곧장 단약을 꺼내 연거푸 복용했고 그것들이 미처 흡수되기도 전에 허공을 바라보며 체내의 원력을 가동했다.
“우리가 계속해서 싸운다면 너희도 선제를 구하지 못할 것이고 나 역시 고마 타지아를 죽일 수 없다. 그럼 타지아에게만 좋은 일이 되겠지!”
배이라의 목소리에는 요기가 잔뜩 어려 있었다.
배이라는 장선지를 떠나온 후 선제의 동굴 네 번째 층에서 운선 부부를 맞닥뜨려 격렬한 싸움을 벌였으나 끝내 누구도 죽이지 못했다.
오히려 호연의 뛰어난 금제술에 몇 달이나 그곳에 묶여 있어야 했다. 그러니 그로서도 이 부부와의 싸움은 가능한 피하고 싶었다.
지금 이들을 찾아온 것도 싸움의 결말을 내려는 것이 아니라 협력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호연과 이오는 서로를 바라본 후 잠시 배이라를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오는 손을 흔들어 물의 장막을 거두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좋다!”
배이라는 그제야 한시름 놓고는 바닥에 착지했다. 운선 부부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사방을 훑어보던 그는 한제를 보고 활짝 웃었다.
“동생,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군. 다만 부상이 심각해. 최대한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후에 문제가 될 거야. 자 그 부상을 입힌 자가 누군지 내게 말해보게. 동생 도움으로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보답을 하고 싶은데 상처를 치료해줄 수는 없으니 그자를 죽이는 것으로 대신하겠네.”
한제는 배이라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그렇다면 미리 감사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제게 이 부상을 입힌 자를 만나게 된다면 꼭 알려드리도록 할 테니 약속을 꼭 좀 지켜주십시오!”
“물론일세. 내 꼭 약속을 지키겠네.”
배이라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배이라의 등장으로 청상의 시체를 꺼내기는 어려워진 상황이었기에 한제는 이오에게 눈짓을 했고 이에 이오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품에서 푸른 밀랍으로 포장된 단약을 꺼냈다. 내심 아까워하는 눈빛으로 그 단약을 잠시 보다가 한제에게 건넸다.
“이것은 당시 은사님께 받은 청단(靑丹)이다. 네가 수련한 것이 선력이든 원력이든, 그것이 이 세상의 기운이기만 하다면 이 단약을 복용하는 것만으로 모든 부상이 곧 회복될 것이다. 내게도 남은 것이 많지 않아 매우 아끼는 것이지. 지금 복용하든 나중에 복용하든 네 마음대로 하거라.”
그의 말대로 이 단약은 총 세 개뿐으로 그중 하나는 호연이, 두 개는 그가 가지고 있었다.
청단을 본 순간 배이라의 눈이 탐욕으로 번득였다. 그에게는 익숙한 단약이었다. 그가 고마와 함께 청림을 습격했을 당시 청림의 심각한 부상도 이 단약을 복용한 순간 상당부분 회복되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고마와 배이라의 습격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저 단약을 넘긴다는 것은 운선 부부와 이한제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다는 뜻이겠군. 그리고 운선 부부에게 아직 그 단약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해. 저들과 싸우게 된다면 골치가 아파지겠군.’
배이라는 단약으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제는 청단을 곧장 복용하지 않고 저물대에 집어넣고는 이오에게 포권을 했다.
호연의 안내에 따라 이들은 여섯 번째 층의 중앙으로 향했다.
주일은 시종일관 한제 곁에 붙어 있었다. 지금 한제는 허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검은 안개로 뒤덮인 중앙에 이르렀다.
그 검은 안개를 바라보는 배이라의 눈에는 분노와 한탄이 뒤섞여 있었다. 만약 당시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고마 타지아에게 기회를 빼앗길 일은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마냥 나쁜 일은 아니었어. 당시의 청림이 어디 그렇게 쉽게 처리할 만한 상대였던가? 타지아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공했다면 일찍이 이곳을 떠났겠지.’
검은 안개 속의 궁전 앞에는 거대한 비석이 있었다. 높이가 20척에 달하는 비석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았고 대신 손자국만 하나 있었다.
“앞으로 이어질 세 개 층은 은사님께서 폐관수련을 하고 계시는 침궁이다. 그 안에 다른 변화가 있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어. 다른 이들이 더 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하는 편이 더 안전하겠지. 이한제, 그동안 너는 치료부터 해라. 그래야 앞으로의 여정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테니까.”
이오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배이라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한제의 눈빛이 굳어졌다. 자신으로서는 감히 간파할 수조차 없는 수준의 운선 부부가 안전을 위해 다른 이들이 더 오기를 기다리겠다는 말에 놀란 것이다.
“다른 걱정 말고 일단 치료부터 해라. 저 두 사람의 기색이 이상하긴 하지만 너나 나를 해하려 하지는 않을 거야.”
주일이 검령의 특수한 방식으로 한제에게만 소리를 전했다.
한제는 가부좌를 튼 채, 이오에게서 받은 단약들을 꺼내 삼킨 후 눈을 감은 채 상처를 치료하는 데 집중했다. 허나 치료를 하는 와중에도 신식을 봉인해 두지는 않았다. 치료가 약간 더뎌지더라도 이곳에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눈 깜짝할 사이 7일이 지났다. 그동안 이오와 호연은 물론 배이라도 좌선을 했다.
한제는 탁한 숨을 깊게 토해냈다. 체내의 상처는 어느 정도 치료됐으나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단약이 충분해서 다행이었다.
한제는 남은 단약을 꺼내 다시 삼켰다. 그러면서도 줄곧 신식을 펼쳐 입구 쪽을 주시했다. 그는 허공자를 비롯한 세 사람이 이곳에 가장 먼저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다.
★ ★ ★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그리고 27일째 되던 날 정오 무렵, 줄곧 좌선하고 있던 이오와 호연은 거의 동시에 눈을 뜨더니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보다 조금 더 빨리 눈을 뜬 배이라도 그쪽을 살피고 있었다.
대전의 입구에서 한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주위에서는 온몸을 뒤덮을 정도로 수많은 눈꽃이 춤을 추듯 날리고 있어 퍽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곤허의 성녀일 것으로 보이는 분홍 옷의 여인이었다.
‘저 여인은?’
한제는 그녀로부터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덤덤한 눈으로 대전 안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제를 유심히 살피던 그녀는 말없이 대전의 한쪽 구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다시 1각쯤 지났을 때, 한제의 신식으로 또 하나의 파동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이어서 세 개의 인영이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허공자와 아름다운 중년 여인, 그리고 흑의의 사내였다.
세 사람이 대전에 들어선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때, 한제를 발견한 허공자의 두 눈에 하늘을 뒤덮을 듯 강렬한 살기가 드러났다. 그리고 때를 같이해 한제 역시 그를 보았다.
한제는 서늘한 눈빛으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고요님, 저자가 바로 저를 다치게 한 그자입니다!”
한제의 말이 떨어진 순간 이오와 호연 두 사람도 허공자에게 향했고 배이라 역시 미묘한 표정으로 허공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주일이 살기가 번득이는 눈으로 기척 없이 허공자와의 거리를 좁혔다.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는 방금 수련한 불멸의 영각(靈覺)으로 허공자를 저승으로 보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