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43
한제는 중년 여인을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이분은 우리 곤허경(昆虛境)의 선배님이다!”
분홍 옷의 여인은 상대의 질문에 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제가 기포를 터뜨린다면 호신 법보를 가진 자신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이미 화독(火毒)이 퍼져 있는 중년 여인은 곧장 용암에 뒤덮여 소멸할 터였다.
“허공자와 너는 원한이 있는 관계일지 모르나 우리는⋯⋯ 우리는⋯⋯.”
분홍 옷의 여인은 말을 맺기도 전에 두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더니 몇 걸음 물러났다. 미간의 눈꽃 모양 표식이 순간 더욱 격렬하게 번득이며 떠올랐다.
한제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가볍게 기포를 통과해 여인의 맞은편에 섰다.
“법보를 거둬라.”
기포 안으로 들어온 한제는 기이한 눈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중년 여인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분홍 옷의 여인은 애초에 한제의 눈에 차지도 않는 존재였다. 저 눈꽃 모양의 표식이 있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뭐하는 짓이냐!”
분홍 옷의 여인은 심장이 쿵쾅대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제가 중년 여인의 미간에 오른손을 대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녀가 공격을 하려던 순간, 한제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왼손을 뒤로 뻗었다.
“시끄럽다!”
그 순간 정신술(定身術)이 발휘되며 분홍 옷의 여인은 우뚝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몸은 그대로 멎어버렸지만 앞쪽에 떠올랐던 눈꽃 모양의 표식은 수없이 많은 눈꽃으로 불어나 그녀의 몸을 맴돌며 보호막을 이루었다.
한제는 그녀를 무시한 채 오른손 검지로 중년 여인의 미간을 눌렀다. 이 여인은 화독에 중독되어 원신이 허약해지고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한제의 신식이 손가락을 타고 체내로 흘러 들어가 여인의 심신을 휩쓸었다.
여인의 기억들이 하나하나 한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여인의 수준은 한제보다 높았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사실 한제에게 이 여인의 목숨은 중요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여인의 기억뿐이었다.
그는 곤허경에 대해 파악하고 싶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수준이 규열기 후기 절정에 이르면서 심신이 온 우주로 펼쳐졌을 때 곤허경에서 그 사람을 보게 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의 신식은 여인의 기억 하나하나를 훑었고 곤허경에 대해 알아갈수록 표정은 점점 묵직해졌다.
하지만 이런 기억들은 한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여인의 몸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속눈썹도 살짝 떨리는가 싶더니 얼굴에 약간 붉은빛이 돌기 시작했다.
한제가 발휘한 수혼술(搜魂術) 때문에 체내의 화독을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화독의 위력이 폭발하려는 조짐에 분홍 옷의 여인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수준은 한제에 비해 너무도 낮았고 정신술에 걸린 상태라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중년 여인의 기억을 살피던 한제의 몸이 돌연 바르르 떨렸다. 드디어 그가 원하던 그 고고하고 도도한 여인의 모습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한제의 심신이 온 우주로 펼쳐졌을 때 곤허경에서 보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곤허의 성녀 모은미!’
한제는 복잡한 표정으로 중년 여인의 미간에서 손을 뗐다.
이 중년 여인은 그 곤허의 성녀를 숭배했기는 했지만 아는 바는 많지 않았다. 성녀들이 수련하는 공법은 매우 기묘하고 그 공법이 절정에 이르면 그녀는 곤허경 내의 최강자가 된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 공법들은 수련하기가 굉장히 어려워 첫 번째 성녀 이후로 다른 성녀들은 아무로 성공하지 못했다. 오직 일곱 번째 성녀인 모은미만이 소기의 성과를 이루어 낸 상태였다.
‘류미⋯⋯ 모은미⋯⋯.’
그 순간, 한제의 심신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천역주 안의 이평이 자신의 심신에서 기인한 파동으로 인해 깨어나려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평을 떠올리자 한제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평에게는 평생 단 하나의 소원이 있었고 딱 한 번 그것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허나 아무런 답도 듣지 못한 뒤로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그 소원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 소원이란 바로 자신의 어머니를 딱 한 번이라도 보는 것이었다.
한제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분홍 옷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한제는 중년 여인의 기억을 통해 분홍 옷의 여인이 류미의 사매이며 류미와 같은 공법을 수련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상태였다. 또한 그는 이 중년 여인이 그녀에게는 단순한 선배가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쭉 지켜봐 온 사람이라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한제는 싸늘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손을 쓰지 않는다면 저 여인은 2각 안에 죽을 것이다.”
그 무렵, 아름다운 중년 여인은 온몸이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기이한 붉은 빛으로 뒤덮인 그녀는 쉴 새 없이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 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증발해버렸다.
이대로 둔다면 여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쩍 마른 목내이가 되어 버리고 체내의 원신도 무너져 내릴 터였다.
한제가 추혼술을 쓴 탓에 그 시기가 더 빨라졌을 뿐, 그렇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거래를 하지. 이 여인을 살리고 너희 둘을 대전 안으로 데려가 8층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대신 너는 내게 네 기억을 살필 수 있게 해주겠느냐?”
한제가 덤덤하게 물었다. 만약 상대가 동의하지 않으면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둘을 살려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제의 굳건한 목소리에 이 사실을 눈치 챈 분홍 옷의 여인은 비참하게 웃었다.
‘저자는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가 내 기억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아마도 대사저와 관련된 기억인 듯한데… 허나 저항해봐야 소용없다. 나를 죽여서라도 내 기억을 헤집을 테니까.’
순식간에 생각을 정리한 여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제는 소매를 크게 휘둘러 두 여인을 데리고 앞으로 한 발 나서더니 그대로 기포를 관통하여 돌진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대전 안으로 진입했다.
한제는 결인을 그린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러자 대전을 가득 채운 용암이 용솟음치면서 바깥으로 밀려났고 잠시 후 전부 흩어져 사라졌다.
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대전의 문이 닫혔다. 그럼에도 여전히 열기는 남아 있었다.
한제가 소매를 휘두르자 두 여인은 그의 곁에 착지했다. 이어서 한제는 한 손을 뻗어 중년 여인을 앞으로 끌어오더니 거친 손길로 그녀의 몸 곳곳을 두드렸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여인의 피부는 한층 더 붉어졌다. 그리고 1각쯤 지났을 때, 그녀의 몸은 거의 불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여덟 번째 층
한제가 오른손을 정수리에 얹은 채 숨을 강하게 들이마시자 그녀의 체내를 가득 채웠던 화독은 그의 손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중년 여인은 점차 안색을 되찾았지만 무척 허약해진 탓에 옆으로 픽 쓰러졌다.
“이제 네 차례다.”
한제가 분홍 옷의 여인을 향해 말했다.
아랫입술을 깨문 그녀는 말없이 가부좌를 틀더니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눈꽃들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그녀는 그 상태로 자리에 앉아 두 눈을 꼭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제는 곧장 오른손 검지를 여인의 미간에 대고는 신식을 펼쳐 그녀의 기억을 훑기 시작했다.
분홍 옷의 여인은 두려웠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상대에게 기억을 내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한제는 최소한 약속은 지킬 사람이었다.
실제로 한제는 자신이 기억을 훑는 동안 저항만 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여인의 기억을 열거나 겁박할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제는 모은미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알아가게 됐다.
허나 한참 후에 손을 뗀 한제의 표정은 전보다 더욱 복잡해졌다.
‘천혼도(天魂道)⋯⋯. 천도에 혼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수련하면서 수없이 많은 분신을 만든다. 그 수많은 분신들을 통해 수많은 경험을 쌓고 또 수많은 공법을 익힘으로써 수없이 많은 경지와 도를 얻게 되지. 최종적으로 그 모든 분신들을 합치면 천혼도를 완성할 수 있는 거야.’
이 천혼도는 곤허경에서 최고의 신통술로 분류됐으나 지금껏 첫 번째 성녀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하면서 본심을 잃고 소멸된 상태였다.
7대 성녀인 모은비는 뜻밖에도 무정의 도를 통한 지름길을 발견했다.
그녀는 분신들에게 본체의 기억을 갖게 하는 대신 각자 알아서 살아가게 만들었고 이에 모든 분신은 각각 새로운 의식을 가진 채 본체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일정 조건을 달성한 분신은 기억을 전수받고 본체와 융합하게 되었다.
천도가 무정하니 그를 통해 만들어진 분신들 역시 무정해져야 했다.
또한 그녀는 역대 성녀들처럼 분신을 수없이 만들어내는 대신 단 아홉 개만 만들어냈다.
이 분신들은 그녀가 선택한 수련성으로 보내졌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중 여덟 개는 조건을 달성한 채 처녀의 몸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주작성으로 보내진 아홉 번째 분신에게 뜻밖의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다만 이 분홍 옷의 여인은 그 사건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저 모은미의 아홉 번째 분신의 이름은 류미이며 대사저가 그 분신 때문에 굉장히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분홍 옷의 여인은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의 몸은 순간 허약해졌지만 큰 해를 입지는 않았기 때문에 잠시 쉬면 금방 회복될 터였다.
한제는 대전을 훑어보며 여덟 번째 층으로 이어질 입구를 찾았다.
“이 진을 열면 여덟 번째 층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후에는 알아서 하도록 해.”
한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전송진을 활성화한 뒤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중년 여인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기억을 살피는 동안 자신의 비밀과 관련한 부분에 몰래 금제를 남겨둔 상태였다.
만약 이 여인이 또 다시 자신에게 나쁜 마음을 품거나 자신을 방해하려 든다면 곧장 그 금제를 활성화하여 여인의 심신을 무너뜨릴 수 있을 터였다.
여덟 번째 층은 어둠에 뒤덮여 있었고 신식을 펼칠 수도 없어 먼 곳을 살피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데 저 멀리서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원력의 파동이 울려 퍼졌다.
요란한 소리는 점점 더 다급하게 들려왔고 성난 포효도 어렴풋하게 섞여 있었다. 이 포효는 능천후의 소리인 것 같았다.
한제는 신중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전방에서 용솟음친 검은 안개 속에서 능천후가 튀어나왔다.
능천후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두려움이 드리워져 있었고 가슴팍에는 새카만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자국은 옷을 뚫고 그의 피부에 찍혀 있었는데 대량의 검은 안개가 그 손자국을 향해 몰려들었다.
뒤에서 그를 쫓아오고 있는 검은 안개 속에서 검은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 인영은 검은 안개로 거대한 마혼의 얼굴 형상을 이루더니 다급하게 도망치는 능천후를 한입에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능천후의 얼굴에 드리운 두려움이 한층 짙어졌다. 그러나 그는 검은 안개에 삼켜지려던 순간 몸을 홱 돌리더니 입을 쩍 벌려 원신의 기운을 분출하고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쩌적!
순간 전방의 허공에 한 줄기 균열이 일었고 그 안에서 한 줄기 붉은 빛이 번득이더니 기린이 튀어나와 낮게 포효하며 그 마혼에게 달려들었다. 기린 역시 온몸에 부상을 입어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능천후는 안타까운 듯 기린을 바라봤지만 지금은 감정에 젖을 틈이 없었다.
“혈기(血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