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62
한데 한제의 손에는 뭔가가 들려 있었다. 바로 천운자의 삼지창이었다. 지금 그에게는 약간의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심지어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만약 지난 1천 년 넘게 단련해온 강건한 의지가 아니었다면 진즉 쓰러지고도 남았을 터였다.
모은미는 멍하니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전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는 물론 여운도가 보았던 그 어떤 광경보다도 충격적이었다.
여운도는 모은미가 이전에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자는 일반적인 수련자가 아니야⋯⋯.”
수련자 연맹 수련자들 또한 두려움과 충격에 휩싸여 한제를 바라보았다. 사실과도 같았던 원고 시대의 전장, 그 끔찍한 장면들 그리고 거대한 인영은 그들에게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긴 상태였다. 지금 한제는 제대로 서 있을 힘도 없는 상태였지만 누구도 감히 그 앞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여운도는 한제를 바라보며 당시 사성종의 백호를 떠올렸다.
‘그는 저자처럼 자신의 힘으로 연맹과 곤허경의 강자들을 저지하고도 끝끝내 쓰러지지 않았지. 죽은 뒤에도 적들이 감히 나서지 못하게 했어.’
요령의 땅에서 펼쳐진 이 전투로 한제는 이름을 널리 알리고 연맹성역의 강자 반열에 오르게 됐다. 그보다 수준이 뛰어난 자들도 그를 쉽게 여기지 못할 터였다.
“이한제, 널 반드시 죽일 것이다!”
천운자가 한제를 노려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허나 그가 신통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하늘에서 강풍이 일더니 한 사람이 우주 공간에서 걸어 나왔다.
중년의 그는 원신의 상태였지만 짙은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뒤로는 수십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청룡성종의 사람들도 현무성종의 사람들도 그리고 백호성종의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그들 뒤로도 사성종 사람들이 빽빽했다.
그들의 등장에 모든 수련자의 이목이 집중됐다.
“누가 감히 내 앞에서 나의 차기 성황을 죽이려 하느냐!”
중년 사내는 바로 주작성황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으나 그 한 마디에 요령의 땅은 진동하기 시작했고 그 위에 서 있던 이들 대부분은 그 위엄을 견디지 못하고 픽 쓰러졌다.
“친구들도 와 있었군.”
그 중년 사내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주작성황⋯⋯.”
천운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작성황에 비하면 자신은 한참 후배였다. 이 연맹성역에서 손에 꼽는 몇 명 외에는 주작성황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다.
단숨에 한제 앞에 이른 주작성황은 한제를 자세히 살피더니 대견하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좋아!”
짧은 말이었지만 그가 한제를 보고 만족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실 일찍이 이곳에 와 있었던 그가 여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한제를 시험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제가 보여준 모습은 그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이제 끝낼 때로군!”
말을 마친 주작성황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는 하얀 돌조각 하나가 들려 있었다.
한데 그 돌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사방에 작열감이 훅 끼쳤다. 그 뜨거운 열기에 주위가 왜곡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이 세상에 나타나서는 안 될 존재가 나타난 것만 같았다.
돌은 곧 녹아내리더니 타오르는 핏방울이 되어 주작성황의 손바닥 위로 떠올랐다. 주위의 모든 이들은 그 핏방울을 본 순간 한 덩어리 화염을 집어삼킨 듯 심신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작성종 태고의 성물!”
여운도는 경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선홍빛 피가 나타난 순간, 그 안에서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화염이 한 줄기 발산되어 하늘을 휩쓸었다. 이에 온 세상이 붉은 빛에 뒤덮였다.
하늘로 솟은 화염은 남쪽에서 주작 형태로 응집되었다. 그 주작이 내지른 고귀한 울음소리에는 세상 모든 이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고고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때, 주작성황 곁에 있던 청룡성종의 노인 몇 명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중 아홉 마리의 청룡이 수놓인 옷을 입은 노인이 기합을 넣었고 노인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이에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옷자락이 녹아들며 피부가 드러났다. 그리고 푸른빛을 번득이는 그의 가슴팍 안쪽에서 뭔가가 떠올랐다.
그것은 한 조각의 푸른 나무였다.
그 나무 조각이 나타난 순간, 하늘에서는 날카로운 용의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하늘 위 끝없는 우주에는 몸길이가 수십만 척에 이르는 수많은 청룡들이 나타났다.
“우오오오!”
청룡들의 우렁찬 포효가 온 하늘과 땅을 울렸고 강력한 파문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광풍을 일으켰다.
청룡들은 하늘 동쪽에서 응집되더니 이내 한 마리의 비할 데 없이 큰 청룡이 되었다. 똬리를 튼 청룡의 무정한 눈이 이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을 슥 한 번 훑었다.
이번에는 백호성종에서 온 일곱 노인이 분분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하나의 진을 이루고 앉은 그들이 결인을 그리자 각각의 정수리에서 금빛이 번쩍였고 곧 일곱 개의 금 조각이 떠올랐다.
이 조각들은 곧장 한데 모여들어 불규칙적인 모양의 금 조각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 하늘에서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크르릉!”
호랑이의 포효가 세상을 뒤흔드는 듯했고 뒤이어 끝없는 살기가 퍼져나갔다. 수련자들 중 상대적으로 수준이 부족한 이들은 그 포효에 질겁하여 심신이 파괴되고 말았다.
뒤이어 거대한 백호 한 마리가 나타나 모든 생령을 삼켜버릴 것처럼 거칠고 흉폭한 사람들을 훑어보더니 몸을 훌쩍 날려 하늘의 서쪽에 안착했다.
사성종 중 마지막으로 성물을 꺼내든 것은 현무성종이었다. 이들은 당시 성황의 배신 때문에 반으로 나뉜 데다가 수련자 연맹의 공격까지 더해져 세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그동안 많이 성장했음에도 다른 성종에 비하면 구성원의 수가 한참 적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앞으로 나선 노인은 세 명뿐이었다. 노인들이 눈을 감자 한 줄기 파도가 그들의 몸을 감싸더니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치솟았고 동시에 허공에서 한 마리 검고 거대한 현무가 나타나 땅에 내려섰다.
“캬오오!”
표정이 약간 어두워 보이는 현무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자 녀석의 발아래에서 일어난 파도가 그를 북쪽으로 떠밀어 주었다.
하지만 현무는 나머지 세 신수에 비하면 무언가 뒤떨어져 보였다.
네 마리 신수가 각자 자리를 차지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하늘을 에워쌌다. 동쪽은 청룡, 서쪽은 백호, 남쪽은 주작, 북쪽은 현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천운자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의 곁에 있는 타지아도 신수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주작성황은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그가 오른손을 앞으로 휘두르자 그의 손바닥에 떠올라 있던 피가 휙 날아가 남쪽의 주작에게 녹아들었다.
“쿠오오오!”
긴 울음소리를 낸 주작은 더욱 강력하고 짙은 화염을 뿜어내면서 천운자와 타지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청룡과 백호, 현무 역시 움직였다.
네 마리 신수가 포효를 내지르며 돌진한 순간, 하늘의 기색이 변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천운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결인을 그려 크게 휘두르며 외쳤다.
“천운칠채호령(天運七彩虎靈)!”
그러자 그의 앞에서 일곱 빛깔의 광채가 번득였고 그 안에서 일곱 빛깔의 호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성종의 백호와 크기가 거의 비슷한 이 호랑이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포효를 내지르며 백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천운칠채용령(天運七彩龍靈)!”
“천운칠채현령(天運七彩玄靈)!”
천운자의 외침이 이어지자 곧바로 일곱 빛깔 광채의 용과 현무도 모습을 드러내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뒤이어 천운자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한편, 사성종의 신수를 응시하고 있던 타지아의 눈에 두려움이 드러났다. 사성종의 성물은 그에게 낯익은 존재였다.
기억 깊은 곳에서 언젠가 본 것만 같았다. 청림의 기억이 아니라 그 자신의 기억이었다.
타지아는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킨 뒤 낮게 외쳤다.
“일, 월, 성, 삼장술(三葬術)!”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사성종이 점거했던 하늘에서 한 줄기 별빛이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별빛은 곧장 사성종의 신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뒤를 이어 달빛도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세상의 모든 혼돈을 헤치고 강림한 듯한 이 달빛은 허상처럼 형태도 갖추지 않았고 어떠한 내력도 없었다.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그가 삼장술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는, 가장 강력한 햇빛이었다.
타지아가 일장술(日葬術)을 발휘한 순간, 요령의 땅 너머 우주에서는 수없이 많은 빛이 번쩍이면서 한곳으로 응집되었다. 빛들은 점점 강력해져 우주를 뒤덮고는 눈부시게 빛났고 갈수록 몸집을 불려가다가 휙 소리와 함께 요령의 땅으로 달려들었다.
한편, 천운자는 소매를 휘두르며 사성종의 신수들을 향해 돌진했다.
주작성황은 고개를 저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잘 봐라, 우리 주작성종이 가진 태고의 성물은 단 세 가지 술법만 발휘할 수 있지만 그 세 가지 술법만으로도 우리 사성종을 영원히 존재하게 할 수 있다!”
그의 말은 한제를 향한 것이었다. 이때의 한제는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어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동쪽 청룡 갑을목(甲乙木), 서쪽 백호 경신금(庚辛金), 남쪽 주작 병정화(丙丁火), 북쪽 현무 임계수(壬癸水)!”
주작성황은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려 휘두르며 덤덤하게 외쳤다.
“병령(丙靈)!”
그와 동시에 나머지 세 개의 성종에서도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령(甲靈)!”
“경령(庚靈)!”
“임령(壬靈)!”
순간 네 마리의 신수가 포효와 함께 네 개의 법기로 변했다. 청룡은 푸른색의 창이, 백호는 금빛의 칼이, 주작은 붉은 자루가 달린 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무는 검은색 도끼가 되었다.
네 개의 성물
법기로 변한 네 마리 신수는 곧장 아래쪽으로 돌진했다. 천운자가 소환한 일곱 빛깔 영혼 중 용의 영혼은 긴 창에 꿰뚫려 그대로 붕괴해버렸다. 나머지 두 영혼도 뒤를 이어 사라졌다.
타지아가 소환한 별빛 또한 사성종의 성물에 관통당하면서 완전히 와해되었고 달빛 역시 약간 저항하는 듯하다가 쾅 하고 흩어져 버렸다.
이어서 사성종의 성물은 눈 깜짝할 사이 타지아와 천운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하늘 위에 눈부신 빛이 나타났다. 타지아가 소환한 햇빛이었다.
그 엄청난 빛은 요령의 땅으로 뚫고 들어와 순식간에 사방을 빛으로 뒤덮어 버렸다. 이것은 청림의 가장 강한 신통술 중 하나였다. 비록 타지아는 그의 위력을 완벽히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놀라울 정도로 강력했다.
햇빛은 순식간에 사성종의 성물까지 뒤덮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성종의 성물은 광기 어린 힘을 폭발시키며 그 빛과 충돌했다.
쾅! 쾅! 쾅!
별 하나가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지던 그때, 주작성황이 결인을 그린 손을 앞으로 뻗으며 낮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