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73
시음종의 이옥지 역시 말없이 묘한 얼굴로 열운자를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편, 열운자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는 자신의 수준으로는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한제는 굉장히 악독한 자였다. 자칫하면 나천성역과 주작성종의 전쟁이 될 수도 있었다.
“제 불찰입니다. 허나 이는 제 개인적인 일이었을 뿐, 나천성역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한참 후, 열운자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한제를 향해 포권까지 해야만 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굴욕감에 심신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마지막으로 만났을때 상대는 자신의 눈치를 봐야 했고 자신이 부른 것만으로도 즉시 달려와 목숨을 걸고 전(戰)자 족자를 살펴야만 했던 자였다.
한제 지금 그는 상대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청수가 없었더라면 자신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자에게 허리를 숙여야 하다니, 견디기 힘든 치욕이었다.
허나 견뎌야만 했다. 성황을 모독한 이상 한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은 이곳에 갇히거나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한편, 한제는 열운자의 말을 들은 체도 않은 채 자신의 오른손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더욱 분노가 치민 열운자는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한제 곁의 쇄열기 수준 노인들로 인해 심신이 더더욱 흔들린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한 후 한층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황께서 이 늙은이의 무지의 소치를 용서해주셨으면 합니다. 분명 제 실수이긴 하나 성황을 모욕할 의도는 전혀⋯⋯.”
“실수? 분명 좀 전에 물었을 텐데? 이 일이 너 혼자만의 뜻인지, 아니면 나천성역의 뜻인지. 그에 대한 답변 역시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천성역 뇌선전의 일 중 내가 연루된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아니!”
열운자는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가 겨우 분노를 억눌렀다. 본래대로라면 자신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을 경우 나천성역이 대신 복수를 해주겠지만 지금은 묵지와 이옥지라는 증인이 있는 상황이었다. 저들이 증언한다면 나천성역에서도 자신의 방만함 때문에 사성종과 척을 지려 하지는 않을 터였다.
열운자는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성황 폐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열운자는 포권을 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생전 처음 겪는 굴욕이었다.
“전가의 모든 족자를 내놓아라. 그럼 없던 일로 해주마. 생각할 시간을 1각 주지.”
말을 마친 한제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그의 앞에서 한데 응집된 불 속성 원력이 실체를 갖추더니 향이 되어 허공에 떠올랐다.
열운자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향이 거의 타 없어지기 직전에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허공에 균열을 내더니 그 안에서 세 개의 족자를 꺼냈다.
열운자
전(戰)자 족자!
한제가 허공을 움켜쥐자 세 개의 족자는 빠르게 그의 손에 들어갔다. 이미 이 족자를 잘 알고 있던 그는 신식으로 훑는 순간 그것이 진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열운자는 한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신의 손으로 가보인 족자를 넘기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넘기지 않는다면 한제는 자신을 죽이고 뺏어갔을 것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족자를 넘기지 않는다 해도 한제가 자신을 죽이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자신의 뒤에는 나천성역이 있지 않은가!
허나 이내 이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이한제는 거칠고 자비가 없으며 대담하고도 과감했다. 저자라면 상대가 나천성역이라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그로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족자를 손에 넣은 한제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다, 네가 이 성황을 모욕한 일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 허나 개인적으로 네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열운자는 심장이 덜컥했다.
“제게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었다.
“너는 분명 내가 전가의 가보를 가져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느냐?”
사실 한제에게는 열운자를 몇 번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나천성역과 척을 지게 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면 탁삼에 대항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기란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사성종과 나천성역의 관계가 악화되면 시음종과 연맹성역에만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청수는 연맹성역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고 선대 성황에 대한 은혜도 갚아야 했다. 그렇기에 한제로서는 아직 열운자를 죽일 수 없었다.
“그냥 말씀하십시오.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열운자는 또 한 번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
“나부(羅浮) 열 개!”
한제의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열운자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의 체내에서는 펑 하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고 열운자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후에야 겨우 평정심을 되찾았다.
“지난번에 성황께 드린 후 제게 남은 나부는 여섯 개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제는 분노로 눈이 시뻘게진 열운자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개라… 좋다. 그것을 통제하는 옥패 또한 내게 넘겨라.”
열운자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나타난 균열에서 여섯 개의 혈구(血球)와 옥패 하나가 튀어나왔다.
한제는 소매를 휘둘러 여섯 개의 나부와 옥패를 저물대로 거두었다.
“그럼 이만!”
열운자는 몸을 홱 돌렸다. 한시라도 더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조심히 가시게. 가는 김에 이것 좀 염뇌자 선배에게 전해 주면 고맙겠군.”
한제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옥패 하나가 열운자를 향해 휙 날아갔다.
미간을 구기며 옥패를 받아 들고는 신식으로 살피던 열운자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건⋯⋯?”
“염뇌자 선배에게 뜻이 있거든 주작성종으로 날 찾아오라고 말씀드리고!”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운자는 조심스럽게 옥패를 챙겨 넣고 한제를 힐끗 돌아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이내 떠나갔다.
‘우리 전가의 가보를 빼앗아가다니⋯⋯. 언젠가 되찾고야 말겠다. 그때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이 열운자는 열운자가 아니다.’
열운자는 수련성 밖으로 튀어나가 한 줄기 빛이 되어 우주를 가로질렀다.
‘허나 그자가 건네준 옥패는 최대한 빨리 염뇌자에게 전해야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두가 놀랄 일이지!”
생각을 정리한 그는 속도를 높였다. 어서 빨리 이 치욕적인 곳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손을 휘둘러 전방에 균열을 내더니 그 안에서 새카만 돌 한 조각을 꺼내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것은 한 줌 가루가 되더니 빠른 속도로 한데 뭉쳐 한 줄의 긴 선이 되어 열운자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 순간, 열운자의 속도는 전보다 몇 배나 빨라졌다.
★ ★ ★
며칠 뒤, 열운자는 마침내 연맹성역 동쪽 구역의 사성종에서 벗어나 나천성역이 장악하고 있는 연맹성역의 북쪽에 이르렀다.
하지만 열운자가 연맹성역의 북쪽 구역에 이른 이튿날, 돌연 저 먼 곳에서 서늘한 빛 한 줄기가 번쩍이더니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왔다.
“헛!”
안색이 급변한 열운자는 곧장 피하려 했으나, 벗어나기는커녕 신통술이나 법보를 사용할 틈도 없었다.
쾅!
거의 순식간에 다가온 빛은 열운자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쿠웩!”
피를 토해낸 그의 육신은 곧장 무너져 내렸고 기겁한 원신은 빠르게 빠져나왔지만 그때 서늘한 빛이 다시 달려들었다.
열운자는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길이가 1백 척 정도 되는 혈구가 하나 나타났다.
나부였다.
“폭발!”
열운자의 외침에 나부가 폭발하며 엄청난 충격을 일으켜 달려들던 서늘한 빛에 저항했다. 열운자는 그 틈에 전속력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원신에는 가슴팍을 중심으로 한 줄기 붉은색 가는 선이 몸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고 두 눈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독이다! 시음종 욕선욕사(欲仙欲死)의 독이야!’
열운자는 단박에 독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나천성역은 그 강대함으로 수많은 정보를 그러모았고 시음종에 대한 정보 역시 많았기 때문이다.
혼비백산한 그는 사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열운자가 멀리까지 도망간 후, 그곳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남색 옷을 입은 준수한 외모의 사내는 열운자가 도망친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몸을 돌려 떠나갔다.
‘사도환의 체내에서 뽑아낸 독으로 저자를 기습하라니, 이한제는 왜 이런 일을… 아니, 됐다. 우리 부부는 이한제에게 너무도 큰 빚을 졌으니⋯⋯.’
남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곧 사라졌다.
★ ★ ★
며칠 전, 열운자가 떠난 뒤 주작성종 주성의 후전(後殿)에서는 이옥지가 선물을 바치며 사성종과 연맹을 맺고 싶다는 뜻을 전한 뒤 떠나려 했다. 한데 한제가 그녀를 붙잡더니 며칠 후의 즉위식에 참여해달라고 했다.
“이 도우, 시음종이라면 알 것 같은데 세상의 온갖 시체들 중 가장 좋은 시체는 무엇인가?”
한제의 질문에 이옥지의 눈빛이 변했다. 원래도 새로운 성황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그가 열운자를 대하는 모습에 더욱 관심이 커졌다.
그녀는 유혹이라도 하듯 아랫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작게 웃었다.
“성황께서 물으시니 상세히 답을 올려야지요. 세상의 온갖 기이한 시체 중 첫째가는 것은 당연히도 역오행기절시(逆五行奇絶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설명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