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74
“이 역오행기절시란, 진정한 시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수한 환경 아래 세상이 시작된 때에 태어난 것으로 오행에 의해 형성된 것이나 체외에도 오행이 갖춰져 있지요. 때문에 기이한 규칙의 변화가 발생합니다.”
한제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내 최근 어느 시체에 관한 소식을 들었는데 매우 진귀한 것 같아서. 이 도우가 날 대신해 좀 확인해줬으면 해.”
이옥지는 고혹적인 눈을 번득이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어떤 시체이기에 성황께서 그리 자신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한제는 대답 대신 소매를 휘둘러 옥패 하나를 건넸다.
옥패를 받아 든 이옥지는 사실 그 시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한제가 발견했다는 시체가 아무리 희귀한 것이라 해봐야 시음종의 온갖 희귀한 시체에는 비할 바가 아닐 터였다. 시음종은 역오행시까지 가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역오행시가 첫째가는 시체라는 것도 밖에서 떠드는 소리에 불과했다. 시음종에 저장된 역오행시만 해도 일곱 개가 넘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옥지는 별생각 없이 신식으로 옥패를 훑었다. 한데 그 순간, 그녀의 손은 바르르 떨렸고 얼굴은 금세 굳어버렸다. 이내 얼굴에는 충격의 빛이 드러났고 급기야 숨까지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시음종의 그 누라도 심지어 시음종의 종주라 해도 놀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건⋯⋯.”
그녀는 한제를 바라보았으나 너무 놀란 탓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주작성종의 사람이 가져다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 시체는 몇 번째나 가나?”
“이 시체는 성황께서 신식의 낙인으로 만들어낸 것 아닙니까. 진정한 시체를 보지 못해 등급을 매기기가⋯⋯.”
이옥지는 한참 망설인 끝에 마음속의 충격을 억누르며 답했다. 허나 머릿속에서는 옥패에서 본 그 시체를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었다.
“흠.”
한제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다시 찻잔을 기울였다.
“그렇다면 그냥 두지. 나도 이 시체에 큰 기대를 걸었던 건 아니니까. 이게 몇 번째나 가는 것인지 몰라도 크게 상관은 없어.”
순간 표정이 변한 이옥지가 얼른 물었다.
“혹시 성황께서 열운자 선배에게 건넨 옥패도 이것입니까?”
“그래.”
한제는 차를 마시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던 이옥지는 이내 공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소녀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7일 정도만 더 시간을 주시시겠습니까? 그 안에 반드시 답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급할 것 없어. 나도 어쩌다 발견한 시체인데 가지고 돌아올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이 도우에게 판별해달라고 부탁하는 거니까.”
이미 마음을 안정시킨 이옥지는 꾀가 많은 여인답게 한제가 이 옥패를 준 데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미리 옥패로 만들어뒀다는 것 역시 자신과 열운자에게 건넬 계획이었음이 분명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신중하게 말했다.
“성황 즉위식에 참석하지 못할까 걱정될 뿐입니다. 이만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한제는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고 이옥지는 빠르게 대전을 빠져나가 긴 빛을 그리며 멀어졌다.
그녀가 멀어지고 나서야 시선을 거둔 한제는 차분히 판을 읽었다.
‘미끼는 던져졌으니 이제 나천성역과 시음종에서 물기를 기다려야겠지. 허나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어서 한제는 묵지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그의 몸을 두른 갑옷과 피풍은 사라졌고 어느새 백의(白衣) 차림으로 돌아와 포권을 했다.
“묵 형, 정말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좋아 보이시는군요!”
묵지도 일어나 포권을 하며 감개무량하다는 듯 웃었다.
“거의 1천 년 만에 뵙는군요.”
한제 역시 기억에 잠긴 눈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묵 형, 그날 밤 나눈 대화는 여태 잊히지 않고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묵지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나란히 대전을 나섰다.
주작성종 주성에는 한제가 며칠 동안 호흡을 하던 화산 옆으로 약간 왜곡된 공간이 있었다. 한제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묵지도 그 뒤를 따랐다.
화산 입구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며 한쪽에 앉은 한제는 오른손으로 저물대에서 두 개의 술병을 꺼내 하나를 묵지에게 건넸다.
“하늘에서 태어나 땅에서 죽는 비에게는 그 사이 떨어져 내리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말입니다.”
술병을 받아 든 묵지는 한제의 곁에 앉아 추억에 젖은 얼굴로 웃었다.
“당시 저는 수련자 연맹의 일원으로 스승님의 지시에 따라 주작성에 머물던 중이었죠. 그 비 오던 밤 깨달음을 얻었는데 마침 그때 이 형을 만난 겁니다. 당시 이 형은 생사의 경지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 대화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깨달음을 얻었겠지요.”
한제는 고개를 저었다. 깨달음이란 때로는 가만히 있다가도 문득 깨우칠 수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아무리 애를 쓰고 고민을 해도 깨치지 못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두 번째로 만났던 주작묘에서 저는 이 형이 주작성의 주작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허나 그것은 제가 이 형의 웅대함을 몰라본 탓이었군요.”
묵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이렇게 세 번째 만남에서 주작성황이 된 이 형을 보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두 사람은 서로 술병을 기울이며 지난 1천 년간의 회포를 풀었다. 꼭 비 오던 그날 밤의 낡은 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형의 생사의 경지는 이미 절정에 이르러 변화가 일어났군요. 이제 저로서는 간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세상 모든 경지는 마음과 관련 있는 것이니 경지 역시 마음이 향하는 대로 변한다 하셨지요. 어쩌면 이 말이 이 형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엄청난 비밀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동이 터올 무렵 묵지는 작별을 고했다. 해야 할 일이 있던 그는 한제가 준 네 개의 옥패와 그가 부탁한 일을 떠안고 먼 길을 떠났다.
한데 네 개의 옥패에 기록된 것들은 연맹성역을 뒤흔들 만큼 충격적이었다. 이에 묵지는 최대한 빨리 돌아가 연맹성역의 세 세력에게 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한제가 출운국에 넌지시 보낸 암시를 파악한 묵지는 스승이 이 일에 관여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축하 인사를 하러 온 이들은 속속 도착했지만 한제는 성황 즉위식 당일이 될 때까지 그중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이날, 주작성종의 모든 사람들은 잔뜩 흥분한 채 모여들었고 나머지 세 성종에서도 새로운 성황의 즉위식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
전통에 따른 번거로운 절차를 밟으며 진행된 즉위식은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제야 나머지 세 성종 사람들은 작별을 고하며 떠나갔고 주작성종은 천천히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수련자들은 각자 수련에 전념했고 장로들은 청룡성황과 관련된 일들을 알아보거나 폐관수련에 들어섰다. 청룡성황을 구해내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 ★ ★
연소성역 가장자리에 선 한제 앞에는 원신이 하나 떠 있었다. 중년 사내의 모습을 한 그 원신은 따스한 얼굴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잘했다. 넌 내가 본 이들 중 천부적 자질이 가장 뛰어난 이는 아니지만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다. 주작성종을 네게 맡기고 갈 수 있어 안심이야.”
한제는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구나. 30년만 더 주어졌어도 네게 모든 것을 전수해줬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중년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이번에 수련자 연맹 본부에 가게 되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우계(雨界)의 선정을 찾아올 것이다. 지금 나는 9할의 원신을 나누어 보내 내가 퍼뜨려놓은 분신들에 흡수시켰다. 선정을 손에 넣는다면 그것을 나머지 1할의 원신이 남아 있는 육신이 있는 곳으로 보낼 것이다. 이후는 네게 맡기마. 청룡성황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면 구하되 힘에 부칠 것 같다면 네 안전부터 살펴야 한다. 그걸 명심하거라.”
중년 사내는 신신당부했다.
“내 육신은 백화석(白火石) 위에 있으니 3천 년간은 썩지 않을 것이다. 그 안에 남아 있는 내 평생 모은 불 속성 원력을 1백 년마다 한 번씩 흡수하도록 해라. 네 수준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허나, 만약 죽음의 위기가 코앞에 닥친다면 구현변(九玄變)을 통해 내 육신을 폭발시켜라. 그러면 너나 주작성종은 그 위기로부터 한 번은 벗어날 수 있을 게야.”
중년 사내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눈으로 연소성역을 둘러보았다. 슬픈 기색이 느껴졌다.
“한제야, 나는 간다. 네 사형 청수의 소식도 알아보도록 하마.”
자애로운 눈으로 자신의 후계자를 바라보던 그는 한제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네게 넘겼다고 나를 너무 원망하지는 말았으면 좋겠구나.”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이내 몸을 돌려 멀리 떠나갔다. 수만 년간의 압박에서 벗어난 듯 가벼운 움직임으로 그는 천천히 멀어져갔다.
“내 이름은 노운. 아주 오래 전 연기사들의 시대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4대 성황의 곁에서 약동(藥童)으로 살다가 성황으로부터 연기술을 배웠다. 1372살이 되던 해, 수련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성황을 보필하며 우리 주작성종의 가장 빛나는 때를 보았지. 2945살에는 주작성종의 장로가 되었고 4760살에는 대장로 중 하나가 되어 첫 번째 천쇠를 겪었다. 6215살, 주작의 표식을 얻어 처음으로 주작을 각성시켰고 다른 각성자와의 결투를 통해 후보 중 일인자에 등극했으며, 7912살에 4대 성황의 도움 아래 두 번째로 주작을 각성시킴으로써 차기 성황 후보로서 주작의 주인이 되었다.”
그 목소리는 한제의 뇌리에 직접 전달되는 듯했다.
“그리고 11463살이 되었을 때 계외에서 들어온 부문족(符文族)이 세상을 어지럽히자 우리 주작성종은 선계와 함께 맞서기도 했지. 전쟁이 끝난 뒤 4대 성황은 나머지 세 성황들과 함께 계외로 나간 뒤 종적을 감췄다. 그전에 나를 5대 성황으로 임명했고 난 두 번째 천쇠마저 무사히 넘겼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우리 사성종과 관련한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되었어. 사성종은 이 봉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 계외에서 온 이들로부터시작되었음을⋯⋯.”
한제는 마치 아버지 또는 스승의 유언이라도 되는 듯 그 이야기에 집중했다.
“동시에 주작성종을 포함한 사성종의 초대 성황과 사람들이 원고 선역이 아직 존재하던 때, 4대 선계가 분리되기 전의 작은 수련성에서 왔다는 것도 알게 됐지. 주작성종과 나머지 세 성종의 근원이자 고향으로 통하는 길인 그 수련성은 처음부터 우리 주작성종이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세 성종에서도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또한 이는 우리 사성종의 가장 깊은 비밀로 선제 청림조차 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
선제 청림의 이름까지 거론되자 한제는 더욱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후에 사대 성황들은 이 곤허 성역을 점유한 후 그와 비슷한 수련성들을 여러 개 만들었다. 초대 성황들은 그 외에도 여러 수를 써서 태초의 수련성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게 했지. 또한 당시 네 명의 성황은 오직 주작성종의 계승자만이 그 구체적인 위치를 알고 있도록 했다. 이후 긴 세월이 흐르던 중 선계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온 세상은 혼돈에 빠지게 되었지.”
“나 역시 그 상상을 초월하는 힘 앞에 정신을 잃었다. 한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무려 100여 일이나 지나 있었지. 정신을 차렸을 때, 선계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새로운 청룡성황은 내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선계 깊은 곳으로 향했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어. 그로부터 또 수백 년이 흐른 후, 선계의 붕괴로 곤허경은 혼란스러워졌고 그 틈에 수련자 연맹이라는 조직이 생겨났지. 한데 그 배후에는 곤허경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선대 성황의 이야기에는 한제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뒤섞여 있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련자 연맹은 우계(雨界)의 유물 대부분을 손에 넣었어. 난 청룡성황의 행방을 물으러 가려 했으나 그때 세 번째 천쇠가 찾아오는 바람에 결국 폐관 수련을 하는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수련자 연맹이 사성종을 공격했다. 현무성황의 배반으로 나는 엄청난 중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허나 백호성황은 결국 죽었고 그 시체마저 그들에게 빼앗겼지.”
선대 성황, 노운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침통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한데 우습게도 수련자 연맹 역시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 더구나 그들은 여태까지도 그것이 곤허 성역의 패주를 놓고 벌어진 전쟁이라 알고 있지. 허나 그 전쟁이 일어난 원인은 곤허경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현무성황이 배반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우리 사성종의 비밀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곤허경도 태초의 수련성이 어디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지.”
노운은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