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84
그 순간, 폭풍에서 울려 퍼지던 허이국의 목소리는 우뚝 멈추었다. 동시에 화염 폭풍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거대한 틈이 하나 생겨났다. 그 너머로는 엉망이 된 허이국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한제의 목소리를 들은 허이국은 반사적으로 알랑거리는 표정이 떠올랐으나, 얼른 그것을 억눌렀다. 그러더니 이내 분통이 터진다는 듯 외쳤다.
“이 빌어먹을 살인마 놈아! 마침내 이 할아비가 생각났더냐? 오늘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수년 동안 수많은 생사의 위기를 맞닥뜨린 허이국은 살아남기 위해 원고의 검기를 깨우친 상태로 덕분에 수준도 무척 높아져 있어 어지간한 규열기 수련자와도 맞붙을 만했다.
분노를 품은 채 달려든 그는 길이가 수십 척에 달하는 살기 어린 검이 되었는데 그 형태는 선검과 똑같았고 심지어는 은연중에 금부의 느낌까지도 풍겼다.
한제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 검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순간 세상의 무궁무진한 원력이 응집되기 시작하더니 그 거대한 검에 맞섰다.
콰쾅!
화염 폭풍마저 멀리 물러날 정도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검이 무너져 내렸고 허이국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이를 갈더니 몸을 날려 이번에는 아홉 자루의 대검이 되어 검진을 이루었고 하늘을 뒤덮을 듯 거친 검기를 발하며 다시 달려들었다.
한제는 만족한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몸을 살짝 날려 검진 안으로 들어가더니 전방을 가볍게 쥐었다. 그러자 어느새 그 손에는 거대한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펑! 펑!
강력한 폭발음이 울려 퍼지는 사이 나머지 여덟 자루의 검은 전부 와해되었다. 하지만 검기는 흩어지지 않고 여덟 개의 거대한 두개골이 되어 한제를 집어삼킬 듯 돌진했다.
“재미있군!”
한제는 오른쪽 눈으로 전광을 번득이며 우렁찬 천둥소리를 퍼뜨렸다.
“히익!”
이 천둥번개가 은빛 뱀처럼 사방을 휘젓자 여덟 개의 거대한 두개골은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터져나갔다. 이어서 한제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검에서는 쩌적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뒤이어, 허이국의 비굴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 주인님!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고고하고 용맹하고 지혜로우시며 세상에 다시없을 신통술의 소유자이신 우리 주인님이 너무도 오랫동안 찾지 않으시자 더 이상 저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그만… 부디 용서하십시오!”
태생적으로 겁이 많은 허이국은 크게 놀란 와중에도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한제조차 잠시 멍해질 지경이었다.
또 한 번 죽음이 가까워진 느낌에 허이국은 바들바들 떨었다. 한제의 오른손은 그의 생명줄을 쥔 상태였다. 그 손에 조금이라도 힘을 더 준다면 검 내부에 숨겨진 그의 혼은 곧장 부서져 버릴 터였다.
“닥쳐라!”
한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일갈하자 허이국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는 검이 덜덜 떨릴 정도로 불안해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끝났구나, 끝났어! 요 몇 년 사이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 이 살인마를 공격하다니, 허이국, 용감하고 똑똑한 마혼이라면 어찌 이렇게 충동적으로 굴 수 있단 말이냐!’
그때, 한제의 냉랭한 목소리에 허이국의 귀가 번쩍 열렸다.
“이번 제련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마. 허나 앞으로 지켜보겠다. 한 번만 더 내게 반기를 든다면 그때는 곧장 네 혼을 말소시켜 버릴 것이다.”
그 냉랭하고 살벌한 말이 허이국에게는 달콤한 노랫소리와 다를 것 없었다. 그는 얼른 입을 열었다.
“주인님, 주인님께서는 정말이지 현명하시고⋯⋯.”
그러나 그가 말을 끝내도 전에 한제는 큰 검을 균열 공간에 집어넣었다. 더 이상 허이국의 헛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이어서 한제는 곧장 한 걸음을 내딛어 사라졌다.
★ ★ ★
타산은 시종일관 가부좌를 튼 채 곁에 놓인 짐승 가죽들에 문양을 그려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한데 그가 갑자기 움직임을 우뚝 멈추더니 오른손을 바르르 떨었고 이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느새 한제가 나타나 덤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님⋯⋯.”
타산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상대를 불렀다.
한제는 시선을 거두고 먼 곳을 바라보더니 한참 뒤 조용히 말했다.
“넌 이미 의식을 되찾았으니 더 이상 나를 주인님이라 칭하지 않아도 된다.”
타산은 더욱 씁쓸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인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한제는 타산을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언제 떠날 것이냐?”
타산은 몸을 바르르 떨며 한제를 바라보다가 쓰게 웃었다.
“어찌 알아보셨습니까?”
“넌 이곳에 온 이후 매일 부적을 만들었다. 뭔가 계획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그러겠느냐?”
한제로서는 수년 만에 타산을 처음 보는 것이었으나, 그 옛날의 선위를 보는 그의 심경은 퍽 복잡했다.
다시 열린 우계(雨界)
타산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천성역으로 돌아가 부족원들을 보고 싶습니다. 주인님, 이 부적들 중에는 제가 쓸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주인님을 위해 만든 부적도 세 장이 있습니다. 고속, 붕괴, 봉인의 효과를 내는 부적이지요!”
그는 품에서 짐승 가죽으로 만든 부적 세 개를 꺼내 한제에게 공손히 건넸다.
이 세 장의 부적은 가장 희귀한 짐승 가죽으로 제작한 것으로 정성을 기울여 만든 것인 만큼 보통의 부적보다 효력이 몇 배는 강했다.
한제는 타산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세 장의 부적을 받은 뒤 몸을 돌렸다.
“지금 연맹성역은 매우 혼란스럽다. 조심히 돌아가거라!”
타산은 한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청령성에서 당시 내가 거두었던 제자를 보게 되거든 날 대신해서 잘 살펴주도록.”
말을 마친 한제는 이내 떠나갔다.
묵묵히 꿇어앉아 있던 타산은 한제의 모습이 사라진 곳을 향해 머리를 찧으며 절을 했다. 그리고는 굳은 결심이 어린 얼굴로 짐승 가죽들을 거두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몸을 날렸다.
★ ★ ★
우(雨)의 선계에서 청룡성황을 구하는 이번 작전에는 당연히 사도환도 함께하기로 되어있었다. 그의 체내에 퍼진 독은 아직 완전히 배출된 것이 아니라서 해독약을 구하지 못한다면 결국 골칫거리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찾으러 갈 필요도 없이 사도환은 이미 서른다섯 명의 장로들 중 한 명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지난 몇 년 동안 사도환 체내의 독을 억제하도록 도와주었던 사람이었다.
사도환의 표정은 엄숙했으나 그는 속으로는 얼른 독소를 완전히 배출한 다음 한제와 함께 봉란성으로 찾아가 복수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자신이 지난 몇 년 동안 겪은 고통의 열 배, 백 배를 봉란성 사람들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주작성종 내에는 수련자들이 머물기에 적합하지 않은 황량한 수련성들이 있었다. 이 수련성들은 독기로 가득 뒤덮여 있었고 사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화염 때문에 그 독기는 더욱 강해졌다.
한제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그런 황량한 수련성 중 하나였다. 풀 한 포기 없이 모든 생령이 끊어진 이 별에 있는 것이라고는 황량하고 시커먼 사막과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뿐이었다.
검은 사막을 딛고 서자마자 줄기줄기 독기가 뜨거운 열기를 타고 지면을 뒤덮는 것이 느껴졌다.
“두 분 선배를 뵙습니다!”
한제는 전방의 새카만 골짜기를 향해 포권을 하며 외쳤다.
그 순간, 골짜기 안에서 한 줄기 검광이 휙 튀어나오더니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제는 미소를 띤 채 그쪽을 바라보았다.
검광은 한제 앞에 다가와 한 사람의 인영으로 바뀌었다. 준수했지만 낯빛은 창백한 중년 사내로 그 역시 미소를 지으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한제, 두 선배님은 이미 네가 올 것을 알고 계셨다. 내려가봐.”
사내는 주일이었다.
한제와 주일은 한달음에 골짜기 아래쪽으로 들어갔다. 그들 사이에 많은 이야기는 필요 없었다.
깊은 골짜기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쳐왔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괜찮다. 한제야, 이번에 청룡성황을 구하러 간다던데 사실이냐?”
주일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한제는 고개를 저으며 주일을 향해 공손한 얼굴로 말했다.
“청룡성황을 구하러 가는 건 맞지만 선제 청림의 일 때문이기도 합니다. 청림이 소생해야만 청상 선군도 부활할 수 있을 테니까요.”
주일은 그 말에 환하게 웃었다.
“고맙다!”
한제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흠칫 놀란 주일은 뭔가를 떠올린 듯 어두워진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처지가 비슷하다. 한데 난 너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너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지. 내가 무능해 네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구나.”
한제는 묵묵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골짜기 바닥에 이르렀다.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작은 개울,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몇 채의 나무집, 땅에 자라난 푸른 풀과 활짝 핀 꽃. 이곳은 신통력으로 독기나 열기와 분리되어 마치 도원경 같은 느낌마저 풍겼다.
이오는 개울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 개울가에 있는 호연을 바라보았다. 호연은 아이처럼 두 발을 개울에 담그고 잠방거리면서 이따금 물을 튀겼고 그때마다 두 사람은 깔깔댔다.
“두 선배님을 뵙습니다.”
주일과 떨어져 안으로 들어온 한제는 한쪽에 서서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어찌 내게 열운자를 습격하라 했느냐? 그 이유가 석연치 않다면 결코 간단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