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85
이오는 꾸짖듯 말했으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저이가 그 일에 꽤나 신경을 쓰고 있다. 자신의 신분으로 한참 후배를 습격한 일이 어지간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야.”
호연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웃자 한제도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 부부가 요령의 땅에서 겪은 일 뒤로 자신을 가깝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짐짓 심각한 척 이야기하고 있기는 해도 이오가 그 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한제는 둘러대듯 이유를 설명했고 이오는 역시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당시 요령의 땅에서 저는 선제 청림에게서 세 단어를 들었습니다. 우계(雨界)의 존전(尊殿), 원신의 결정, 청상의 피. 그중 뒤의 두 개는 가지고 있지만 우계의 존전은 가지고 있지 못했지요.”
여기까지 말을 이은 한제는 잠시 입을 다물고 이오를 바라보았다. 이오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나 역시 당시의 우의 선계를 떠올려 보았다. 분명 존전이 있었어. 그곳은 스승님께서 선제에 등극했던 곳이다. 한데 네가 지금 이곳에 온 것은⋯⋯?”
이오가 말을 끊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대 성황이 우계의 결정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 말에 이오는 감격했고 물에서 나온 호연도 흥분한 표정으로 곁에 섰다.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한제에게 말했다.
“주작성황의 은혜는 우리 두 사람의 마음에도 깊이 새겨져 있다. 청룡성황이 정말로 우계에 있다면 우리도 이번 일을 도울 것이다.”
한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오와 호연은 간단하게 짐을 꾸린 뒤 주일을 챙겨 한제와 함께 떠났다.
★ ★ ★
주작성종 주성 진이 배치된 곳. 돌연 하늘에서 네 갈래 빛이 쉭 하고 날아들더니 눈 깜짝할 사이 진 위에 이르렀다. 한제와 운선 부부, 주일이었다.
한제는 곧장 중앙 진에 들어서서 가부좌를 틀더니 낮게 호령하듯 외쳤다.
“개방!”
동시에 그는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어 균열에서 선기를 품은 결정을 꺼냈다.
가장 바깥쪽을 두른 수만 명의 제자들은 일제히 두 눈을 감고 체내의 원력을 깔고 앉은 진에 주입했다. 이에 빛기둥이 줄기줄기 진 안에서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밝기가 일정 정도에 이른 빛은 진을 따라 뻗어 나가 서른다섯 명의 장로가 깔고 앉은 곳에 응집되었고 뒤이어 장로들이 깔고 앉은 진에서도 밝은 빛이 발산되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결인을 그려 각자의 원력을 주입했다.
수만 제자들의 원력은 서른다섯 갈래로 합쳐지면서 중앙으로 몰려들더니 한제가 꺼낸 결정으로 흘러들었다.
그 순간, 그 결정은 엄청난 빛을 폭발시켰다. 상상을 초월하는 선력 한 줄기가 빛기둥이 되어 하늘의 구름을 꿰뚫더니 층층의 파문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끊임없이 퍼져 나갔다.
콰르릉!
하늘에서 거대한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우계의 대문이 느릿하게 주작성종 주성의 상공에 나타나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연맹성역 내에서 일정 수준에 이른 거의 모든 수련자들은 우주에서 일렁이는 파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 몇몇은 우의 선계가 열렸다는 것을 눈치채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우의 선정들이 연맹성역 곳곳에 나타났다. 허나 나천성역과 시음종 그리고 연맹 내 각 세력은 이미 주작성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갑작스레 열린 우의 선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우리가 저곳에 들어가면 우계는 곧장 불안정해지면서 무너져 내릴 터! 청룡성황을 최대한 빨리 구출하고 곧장 나와야 한다!”
그 말을 남긴 한제는 한 줄기 빛이 되어 우계의 대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뒤이어 서른다섯 명의 쇄열기 수준 장로와 사도환, 운선 부부 등이 움직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제조차 눈치 채지 못한 틈에 또 한 명이 은빛이 되어 우계로 들어섰다. 바로 은시였다.
★ ★ ★
같은 시각, 멀리 떨어진 연맹성역 북쪽 구역 구석진 곳의 황량한 수련성. 대지가 갑작스레 진동하면서 십(十)자 형태의 균열이 일어났고 그 안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성한 백발이 얼굴 전체를 가린 그의 앞에서 결정의 빛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우의 선정이 되었다.
“이한제. 넌 내 예측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순간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얼굴이 드러난 노인은 바로⋯⋯ 천운자였다.
★ ★ ★
이른 아침, 맑고 아름다운 햇빛이 내리쬐며 대지에 드리운 어둠을 몰아냈다. 부지런한 사람들로 도시는 점점 시끄러워졌고 상점들이 하나하나 문을 열었다. 가장 시끌벅적한 곳은 역시 먹을 것을 파는 거리였다.
떡을 찌는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광주리 가득한 찐빵과 땅콩 등의 주전부리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천수선이 파는 것은 술이었다. 이곳의 술은 청량해 마셔도 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신을 더욱 맑게 해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나이가 쉰에 접어든 천수선은 담뱃대를 쥔 채 옆에 앉아 바삐 움직이는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웠다.
방금 막 술을 주문한 중년 사내는 술주전자를 손에 쥔 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천 사장을 향해 활짝 웃었다.
“천 씨 아저씨! 술맛이 이전만큼 좋지는 않은데 뭐 빼먹은 거 아닙니까?”
천수선은 눈을 부릅뜬 채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헛소리, 우리 천 씨 집안의 술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중년 사내가 껄껄 웃었다.
“1천 년 전부터 이어져온 비법으로 만들었다고요? 초창기에는 어떤 선인조차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죠? 아저씨, 그 이야기는 이제 지겹네요. 어휴, 전 이만 동 씨 집안에 일을 해주러 가렵니다. 아저씨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은 없어요. 많이 파십시오. 하하하!”
중년 사내는 술주전자를 쥔 채 웃으며 가게를 떠났다.
“쪼그만 녀석이 뭘 안다고 떠들어? 우리 천 씨 집안의 술은 1천 년 전부터 전해져 오는 비법으로 만든 것으로 일찍이 한 선인께서도 무려 60년이 넘도록 즐겼다고!”
천수선은 입에 물고 있던 담뱃대를 세차게 뽑아 든 채 중얼거렸다.
그의 집안에는 1천 년도 더 된 나무조각이 여러 개 있었다. 이 유운성(流雲城)에 자리를 잡은 첫 번째 선조와 얼굴 부분이 흐릿해진 선인의 조각이었다.
천가 대대로 전해진 이야기가 있다. 사실 천가는 유운성 출신이 아니라 한 차례 재난 때문에 이곳에 이주해 왔고 그들의 선조가 어느 선인과 60년이나 함께 지냈으며, 그 선인의 도움으로 이곳에 이주해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선조 천대우께서는 137살까지 장수하셨고 이 이야기를 대대손손 전수하셨다. 한데 그 이야기가 어떻게 거짓일 수 있겠어!’
천수선은 가늘게 뜬 눈으로 담뱃대를 탁탁 털어낸 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한데 다음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입이 쩍 벌어졌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에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파문이 파도처럼 일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르릉!
천둥이 포효하듯 울려 퍼지면서 시끌벅적했던 거리가 순간 고요해졌다. 모든 사람은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끝없는 파문이 사방을 훑고 지나간 뒤에는 줄기줄기 긴 빛이 마치 별똥별처럼 하늘을 가르며 스쳐갔다. 그 긴 빛들은 가볍게 하늘의 가장 끝, 강한 바람이 부는 그 층을 가로지른 뒤 각각 수련자로 변했다.
“서⋯⋯ 선인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몸을 바르르 떨었고 몇몇은 다급히 집으로 들어가 감히 밖을 내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일반인들은 건드리지 말고 빨리 수마해로 집합하라!”
위엄어린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고 하늘에서 내려온 수련자들은 곧장 저 먼 곳을 향해 질주했다.
탁삼
같은 시각, 주작성 전역에서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급작스러운 변화에 일반인들은 어찌할 줄 몰랐다.
다행히도 이 선인들은 일반인들에게는 어떠한 위해도 끼치지 않고 곧장 먼 곳으로 향했다.
주작성 본토의 수련자들 역시 이 상황을 알아챘으나 감히 나서지 못했다. 자신들은 기껏해야 화신기나 영변기 정도에 불과한 반면 하늘을 가로지르며 나타난 수련자들은 그 수준이 너무나 높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심지어 눈빛만으로도 주작성 본토를 붕괴시킬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준에 이른 자도 있었다.
주작성의 많지 않은 문정기 수련자들 역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떨었다.
주무태는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빛들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대항할 수 있는 자가 몇 되지 않을 정도였고 나머지는 그 기운만으로도 자신의 심장을 멎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이 수련자들이 다른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수마해를 향해 달려갔다는 것이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들이 하늘에 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 하늘 끄트머리의 태양마저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 주작성은 거의 반 정도가 어둠에 잠겨 버렸다.
그림자들은 뇌선전의 대전으로 그들은 주작성 밖의 우주를 감싸고 있었다. 반쯤 폐허가 된 주작성에 뇌선전이 강림했다가는 상당한 여파에 휩쓸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뒤, 이번에는 수많은 관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크고 작은 이 관들 주변에는 수많은 수련자들이 붙어 있었다.
한데 수마해로 향하던 수련자들은 천운종에 놓인 거대한 조각상을 보게 됐다. 나천성역 수련자 하나는 이 작고 보잘것없는 수련성에 그토록 큰 조각상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 자세히 살폈다. 어째서인지 낯이 익은 조각상이었으나, 별다른 관심이 생기지 않은 그는 손을 휘둘러 그 조각상을 파괴하려 했다.
한데 그때, 음산하면서도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
조각상을 파괴하려던 수련자는 뒤를 돌아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자봉, 내게 한 소린가?”
사내를 저지시킨 것은 서자봉이었다. 그녀는 냉랭한 눈으로 상대를 한 번 훑어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저 조각상이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겠어?”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잠시 복잡한 눈으로 조각상을 돌아보더니 속으로 한숨을 폭 내쉬고는 발길을 재촉했다.
괴팍한 성격의 수련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조각상을 집중해 살폈다. 보면 볼수록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 무렵, 그의 머릿속에 번개가 스치듯 무언가가 번쩍했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뜬 그는 찬 숨을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저… 정뇌선 허목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