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87
“저 소리⋯⋯ 들었나?”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계(雨界)의 상공은 짙은 먼지로 뒤덮인 듯 먹먹해 대지도 흐릿하게 보였다. 게다가 줄기줄기 균열이 수시로 나타나 번득였으며, 그때마다 주변의 먼지 안개가 그 안으로 빠르게 흡입됐다.
그 외에는 고요했다.
한제의 말에 앞으로 나아가던 청룡성종 장로들은 우뚝 멈춰 섰다.
“주작성황 폐하, 무⋯⋯ 무엇을 들으셨습니까?”
백발이 성성한 장로 한 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들려오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살려달라는 소리는 바람에 실려 어렴풋이 들려오고 있었다. 허나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때 사도환이 다가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환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한제를 고개를 저으며 신경을 돌리려 했다.
장로들은 서로를 돌아보다가 다시 말없이 전방의 산봉우리로 향했다. 그 뒤로 더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한제는 시종일관 굳은 얼굴로 점점 가까워지는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만약 청광순에 남아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면 이곳에 갇힌 것이 청룡성황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산봉우리에 가까워질수록 어째서인지 마음속에서는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때, 앞장선 어느 청룡성종 장로가 흥분해 외쳤다.
“성황 폐하다! 이 손자국을 보아라. 우리 청룡성종의 신통술인 청목인(靑木印)이야!”
허공으로 떠오른 노인은 감격한 눈으로 산봉우리 중턱의 말라붙은 풀로 뒤덮인 곳을 바라보았다.
다른 장로들도 재빨리 다가가 그 손자국을 살폈다.
“어서 성황을 구하자!”
노인들이 흩어져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자 우계의 조각은 거대한 힘에 뒤덮여 진동하기 시작했다.
노인들이 쇄열기 수준을 폭발시키자 여러 마리 청룡이 허상이 나타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달려들어 산봉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마치 산봉우리를 그대로 뽑아버릴 듯한 기세였다.
“올려!”
한 장로가 외치자 콰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대지와 산봉우리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돌조각이 굴러 떨어졌다.
흙먼지가 일어나는 가운데 거대한 산봉우리를 휘감은 청룡의 허상들이 이내 산봉우리를 몇 촌 들어 올렸다.
현무성종과 백호성종 장로들도 얼른 동참해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면서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했다.
현무성종 장로들의 뒤에 나타난 현무의 허상은 아래쪽으로 달려들어 산을 떠받치며 산봉우리를 조금 더 들어 올렸다.
백호성종 장로들은 땅에 내려서 각자 신통력을 발휘했다. 이에 산봉우리는 점점 떠올랐고 대지의 진동은 더욱 격렬해졌으며, 하늘에서는 먹먹한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주작성종 장로들도 나섰다. 그들도 신통력을 발휘한 덕분에 산봉우리는 금방이라도 대지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갈 듯했다.
한데 그때였다. 한 줄기 금빛이 산봉우리에서 피어오르며 사방은 눈부시게 밝아졌다.
금빛은 순식간에 셀 수 없이 많은 갈래로 나뉘었다. 길이가 10만 척에 달하는 금빛의 갈래들로 인해 산 위에 태양이 솟아오른 듯했다.
금빛이 발산된 순간 거대한 금색 자물쇠 하나가 서서히 산봉우리 위로 나타났다.
높이만 해도 수십만 척에 달할 것 같은 이 자물쇠는 복잡한 금색 문양들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의 위엄 한 줄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렇게 형성된 금빛 파장이 사방을 향해 퍼져 나가자 사성종 장로들은 순식간에 산봉우리 저 멀리로 밀려났다.
한편, 이오와 호연은 멍하니 그 금색 자물쇠를 바라보다가 서로를 돌아보았고 이내 자신들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알게 되자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때, 사성종 장로들의 신통력에서 벗어난 산봉우리는 다시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고 허약하고도 초조한 목소리가 그 아래에서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한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성종의 힘을 모아라! 이 산봉우리를 파괴할 필요는 없다. 그저 70척 정도만 들어 올려라! 이 금색 자물쇠는 당시 선제 청림이 남긴 것으로 이에 봉인된 것은 나만이 아니다. 허나 나 외의 존재들이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청룡성종 장로 중 가장 노련해 보이는 한 노인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감격에 겨운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성황 폐하다! 성황 폐하의 음성이다.”
한제는 뒤로 물러난 이오와 호연에게 포권을 했다.
“두 선배님께서도 도와주시지요!”
이오는 잠시 망설인 끝에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진에는 분명 스승님의 기운이 어려 있다. 할 수 없지!”
말을 마친 그가 소매를 휘두르자 그의 발아래에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나더니 그를 태우고 곧장 금색 자물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호연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남편의 뒤를 따랐다.
“우리 두 사람은 이 자물쇠를 한 호흡 동안만 열 수 있다. 그러니 그 안에 일을 마쳐라!”
말을 마친 호연의 주위에 어스름한 빛을 발하는 대량의 금제가 나타나더니 곧장 자물쇠를 향해 돌진했다.
그 무렵, 손을 크게 휘두른 이오의 앞에는 수막이 형성되더니 잘개 쪼개져 호연의 금제들을 하나하나 뒤덮었다.
주위의 사성종 장로들도 망설임 없이 나섰다.
청룡성종 장로들은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각종 신통력을 발휘했고 동시에 나머지 세 성종의 장로들은 사방을 에두르며 신통술과 법보를 이용했다.
이곳의 서른다섯 명 쇄열기 수준 수련자들의 신통력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힘은 이 산봉우리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상태의 우계 자체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고 이제 자물쇠가 열릴 그 찰나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선 부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허공에 가부좌를 틀더니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금색 자물쇠를 가리켰다.
순간 주변에 퍼져 있던 금제와 수막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이들 전방에 무궁무진한 빛을 내는 거대한 열쇠를 형성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물쇠 근처에 이른 열쇠는 금빛 섬광을 층층이 파괴하며 파고 들어가 그 자물쇠에 녹아들었다. 순간 금색 자물쇠에서는 눈부신 빛이 발산되었고 다음 순간 모든 금빛은 완전히 사라졌다.
“빨리!”
이오가 낮게 외쳤다.
한 호흡이란 일반인에게는 눈 깜짝할 시간에 불과하지만 쇄열기 수준 수련자들에게는 각종 신통력을 발휘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신통력의 빛이 줄기줄기 쏘아져 나가 일제히 돌진한 순간, 산봉우리는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허나 이 산은 선제 청림이 제련했던 것인 만큼 간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금색 자물쇠의 압박은 사라졌지만 산을 들어 올리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10척, 20척, 30척…
눈 깜짝할 사이 산봉우리는 50척 정도 들어 올려졌고 산봉우리에서 발산되는 압력은 점점 커졌다.
거의 70척 가까이 들어 올렸을 때 시간이 모두 지났는지 금빛이 다시 나타났고 거대한 금색 자물쇠 또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 녹아들었던 열쇠는 무너져 내렸고 호연과 이오는 일제히 뒤로 밀려났다.
금색 자물쇠가 다시 나타나자 산봉우리에서 발산되던 흘러넘칠 듯한 압력은 몇 배로 강해졌고 사성종 장로들은 어떻게든 버티려 했다.
한데 그때, 길고 날카로운 소리가 산봉우리 아래쪽에서 들려오는가 싶더니 한 줄기 푸른빛이 청룡처럼 솟구쳐 오르며 벗어나려는 듯 몸부림을 쳤다. 그 빛 안에는 넝마가 된 옷을 입은 끔찍한 몰골의 노인이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감격의 빛이 가득했다.
노인이 산봉우리에서 막 벗어나려던 그때, 이 우계 조각의 상공에서는 바람이 강하게 몰아치면서 먹먹하게 하늘을 뒤덮고 있던 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의를 입은 채 온 세상을 담은 듯 깊은 눈을 가진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우계의 붕괴는 더욱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때맞춰 온 모양이군!”
그 노인은 다름 아닌 천운자였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내딛어 산봉우리 쪽으로 다가온 순간, 한제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함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나서지 못했던 것은 그 불안이 산봉우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운자를 본 순간, 한제는 두 눈을 번득여 왼쪽 눈으로는 불빛을 오른쪽 눈으로는 전광을 번득여 전방에 번개 공과 화염 공을 하나씩 소환해냈다.
이어서 그가 손을 휘두르자 이 두 개의 공은 곧장 돌진해 눈 깜짝할 사이 전광이 흐르는 불바다를 이루더니 천운자에게로 향했다.
이오와 호연 역시 천운자를 향해 신통력을 발휘했다.
천운자는 소매를 휘둘러 돌풍을 일으킴과 동시에 세 개의 분신을 내보냈다. 전방으로 달려든 세 분신 중 하나는 이오와 호연이 발휘한 신통력에 뛰어들어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파멸적인 힘을 발산하더니 자폭해 버렸다.
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천운자 분신의 자폭으로 형성된 광기 어린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와중에 천운자의 나머지 두 분신 역시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동시에 자폭을 했다.
천도의 피
세 분신의 자폭은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을 일으켰고 순간 이 대지는 대대적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붕괴하는 지면에는 하나하나의 거대한 균열이 일었고 이 우계의 조각 역시 갈라졌다.
“이한제, 나도 청룡성황을 구하는 것을 도와주겠다.”
길게 웃던 천운자는 세 분신이 자폭으로 형성한 힘을 이용해 이오와 호연을 떠밀어 한제가 나설 기회를 봉쇄했다. 이어서 한 발 내딛은 그는 서른다섯 명의 쇄열기 수준 수련자가 포위한 곳으로 진입하더니 그 장로들이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이 틈을 타 긴 빛을 그리며 산봉우리 아래로 뚫고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이 산봉우리는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단번에 30척 위로 들어 올려졌다. 덕분에 산봉우리와 지면의 거리는 무려 1백 척 정도로 벌어졌다.
푸른빛 안에서 몸부림치던 노인은 고개를 번적 들어 천운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지만 그 이유를 물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푸른빛에 휩싸인 채 산봉우리에서 빠져나온 노인은 곧장 호령하듯 외쳤다.
“사성종의 모든 이들이여, 저 산봉우리를 파괴하라!”
말을 마친 그는 오른손을 들었다가 매섭게 후려쳤다. 그러자 길이가 수십만 척에 달하는 청룡 한 마리가 뒤에서 나타나 거친 기운을 풍기며 입을 쩍 벌리고는 푸른 기운을 분출해 산봉우리를 공격했다.
주위의 사성종 노인들은 곧장 신통력을 발휘했고 이렇게 형성된 무궁무진한 힘 역시 산봉우리 쪽으로 돌진했다.
한편, 대지에는 균열이 점점 더 많아지더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사방에 나타난 공간의 균열도 계속해서 불어나면서 이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이 청룡성황과 장로들이 공격을 이어가자 산봉우리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큼직한 바위들이 떨어져 내렸다. 심지어 그 위에 나타난 금색 자물쇠도 흩어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럴수록 청룡성황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바로 그때, 긴 웃음소리와 함께 산 위의 균열 하나가 벌어지면서 천운자가 튀어나왔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격한 감정을 드러낸 그는 손에 주먹만 한 검은색 핏덩어리를 쥔 채 곧장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허상으로 나타난 금색 자물쇠는 한 줄기 금빛이 되어 천운자를 뒤쫓다가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검은색 핏덩이를 봉인하려는 듯 그곳에 떨어졌다.
하지만 천운자는 이에 신경도 쓰지 않고 붕괴하는 대지를 향해 오른손을 세차게 내리쳤다.
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