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94
“그녀의 말을 믿느냐?”
청림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한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계외와 봉계의 전쟁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됐다. 모든 것은 나중에 다 알게 될 것이다.”
청림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맺었다.
“가서 네 가족들과 벗들을 데려오너라. 이 우계 안에 내가 있는 이상 그들의 평안은 보장해줄 수 있단다.”
한제를 보는 청림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한제는 고개를 숙여 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그 순간 무언가 생각난 듯 망설이다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그의 전방에 한 줄기 균열이 일었고 그 안에서 반짝이는 관 하나가 떠올랐다.
“스승님, 혹시⋯⋯ 이 관을… 알아보시겠습니까?”
한제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 사실 그가 청림에게 부탁하려 한 것 중에는 사도환의 독과 주일의 바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관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순간, 청림의 눈빛이 굳어졌고 그 관을 자세히 들여다본 끝에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피천관(避天棺)이다.”
한제는 흠칫 놀랐고 호흡까지 가빠지기 시작했다.
“이 피천관은 4대 선계의 물건이 아니라 원고 시대 선역에서 내려온 것으로 소문에 의하면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다고 하나 그저 소문일 뿐이다. 허나 만약 피천관을 가동할 수 있는 구결을 알고 있다면 잔혼을 되살리는 것은 분명 가능할 게야. 다만 나는 그 구결을 알지 못한다.”
청림의 말은 한제에게 희망을 안겼지만 동시에 그 희망을 흩어버리기도 했다.
묵직한 망치로 가슴팍을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한제의 창백한 얼굴에는 절망이 드러났다. 청림이 모른다면 세상 어느 누가 그 구결을 알고 있겠는가!
“그런데⋯⋯.”
그때, 청림이 한제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한제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청림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다시 희망의 불꽃이 타올랐다.
“이 피천관이 가장 먼저 선계에 나타났을 당시에는 선제 자하(紫霞)의 물건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지. 자하의 수준은 그때 나보다는 약간 낮고 백범보다는 약간 높은 정도였다. 섬계(閃界)가 무너진 뒤에도 그녀나 제자들이 살아남았을지는 알 수가 없어. 그녀를 찾아낸다면 그녀에게서 그 구결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허나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걱정할 것은 없다. 수준을 회복하고 나면 내가 반드시 널 도와줄 것이다!”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이 정도의 정보라면 그로서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이제 가서 네게 소중한 이들을 데리고 와라. 지금의 내가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뿐이니.”
피곤한 기색으로 말을 마친 청림은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한 줄기 문양이 번쩍이며 나타나 한제의 손바닥에 떨어지더니 체내로 녹아들었다.
“돌아올 때는 그 문양을 이용하거라.”
고개를 끄덕이며 포권을 한 한제는 피천관을 거두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주은혜
연맹 성역에서는 이제 더 이상 곳곳을 쏘다니는 수련자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각 세력에 속한 거의 대부분의 수련자는 멀리 떨어진 주작성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한제는 한 줄기 긴 빛이 되어 우주를 가로질렀다. 청림의 소생과 새로운 우계의 출현이 자신의 위기를 해결해주지는 못했지만 뒷날에 대한 걱정은 없애준 상태였다.
특히 자신의 친한 이들을 우계로 들이는 데 허락을 받은 덕에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청림이 자신을 위해 탁삼과 맞서주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다면야 일시적으로는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청림은 탁삼을 죽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위협은 더 큰 위기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결국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해.”
세상에는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었다.
한편, 가족이 없는 그에게 굳이 가족 같은 사람을 꼽자면 딱 한 명뿐이었다. 당시 요령의 땅에서 심신이 천역을 따라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을 때 곤허경에서 주은혜를 봤던 것이다.
한제는 발아래에 파문을 일으키더니 순식간에 수없이 많은 우주를 건너뛰어 평범해 보이는 한 황량한 수련성 근처에 다시 나타났다.
이 수련성은 멀리에서 볼 때는 아무런 특징도 없었지만 한제는 이곳이 곤허경으로 통하는 전송진임을 알고 있었다.
선대 성황이 준 옥패를 보내기 위해서든, 주은혜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든, 한제는 반드시 곤허경을 한 번은 방문해야만 했다. 아무리 모은미를 다시 마주하기 싫다고 하더라도…
속으로 한숨을 내쉰 한제는 곧장 그 수련성의 가장 바깥층을 뚫고 들어갔다. 그는 한 줄기 긴 빛이 되어 전송진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한데 심신을 통해 보았던 전송진이 있던 곳에 이른 순간, 네 갈래의 강력한 기운이 달려들어 사방을 맴돌면서 앞길을 막아섰다. 그와 동시에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곳은 금지(禁地)다. 한 발짝만 더 들어선다면 네가 어디에서 온 자든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한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멈춰 서서는 포권을 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전투를 위해서가 아니라 선대 주작성황께서 곤허경에 보낸 옥패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그의 주위를 맴돌던 네 갈래의 신식은 즉각 누그러졌으나 아까 나타났던 냉랭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렇다면 옥패만 넘기고 꺼져라!”
그 순간, 한제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그 네 갈래의 기운에서 그는 규열기 수준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규열기 수준의 수련자가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곤허경의 깊이가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이곳은 연맹 성역의 어느 세력보다도 그 기세가 약하지 않은 것이다.
허나 이 네 명의 수련자는 너무나 방만했다. 한제가 정열기 수준의 수련자임을 알아보았을 텐데도 이토록 오만하게 구니 더욱 심기가 불편했다.
더구나 그는 본래 곤허경에 호감이 없었다.
다만 이곳에 온 목적이 주은혜를 데리고 가기 위함인 만큼, 그는 화를 억누르고는 침착하게 포권을 했다.
“옥패를 전달하기 위해서 온 것이기는 하나 모은미를 만나 나눌 이야기도 있다.”
그 순간, 사방에서 큰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냉랭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곤허경에 들어오려면 초대장이 필요하다. 초대장을 가지고 있느냐?”
한제는 미간을 찡그린 채 침착하게 말했다.
“초대장은 없다. 허나⋯⋯.”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냉랭한 목소리는 그의 말을 끊었다.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올 수 없다!”
한제의 눈빛이 한층 서늘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화를 참아내고는 포권을 하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를 대신해 말을 전해줬으면 한다. 그녀에게⋯⋯.”
“듣기 싫다! 누구를 심부름꾼으로 아느냐? 옥패만 넘기고 꺼져라!”
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말을 끊고 들어온 순간, 한제의 눈에 살기가 담겼다. 허나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끝끝내 그 분노마저 참아냈다.
“이한제가 왔다는 말만 전하면 된다.”
“다시 말해야겠느냐? 나는 심부름꾼이 아니다! 배짱이 있다면 어디 직접 들어와 봐라!”
그 오만하고 냉랭한 목소리에 한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허! 원한다면 그리해주지!”
그는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성큼 나서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세상에 불바다가 일며 하늘을 시뻘겋게 불살랐다.
타오르는 하늘에서는 비처럼 불똥이 떨어져 내렸다. 몸을 훌쩍 날린 한립은 1천 척 밖에 나타나 전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불바다는 곧장 튀어나가며 그가 가리킨 허공을 왜곡시켰다.
순간 왜곡된 허공에서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어두운 얼굴로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허공들도 왜곡되면서 나머지 세 사람 또한 모습을 드러냈다.
“금지(禁地)에 난입하려 하다니!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백의의 노인은 낮게 호령하듯 외치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고 나머지 세 노인들과 사방으로 흩어져 한제를 포위했다. 동시에 노인은 저물대를 내리쳐 옥패를 하나 꺼내더니 꽉 움켜쥐어 깨뜨리려 했다.
그때, 한제가 서늘한 눈빛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 순간 파문이 일었고 한제는 눈 깜짝할 사이 노인의 뒤에 나타나 오른손 검지를 노인의 미간을 향해 뻗었다. 규열기 수준 수련자를 죽이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노인의 두 눈동자가 빠르게 졸아들었다. 그는 기겁한 표정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한제에게서 도망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한제가 뻗은 손가락은 번개처럼 뒤쫓아 노인의 미간에 떨어졌다.
“크헉!”
노인은 피를 토해냈고 체내에서는 펑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육신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원신마저 한제의 손에 붙잡혔다. 뿐만 아니라 노인이 부수려 했던 옥패도 한제의 손에 얌전히 떨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눈치채기도 전에 벌어진 일에 나머지 세 노인은 몸을 벌벌 떨었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자들답게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포진!”
한 노인의 말에 세 사람은 각자 결인을 그리며 엄청난 한 줄기 기운을 일으켰다. 그들이 소환한 힘은 세 사람을 휘감으며 그 앞에서 거대한 도끼가 되더니 한제를 향해 매섭게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세 노인은 저물대를 두드렸다. 순간 한 노인 앞에는 말의 갈기로 만든 검은색 먼지떨이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각각의 갈기들이 곧장 늘어나면서 가늘고 세밀한 검처럼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비처럼 몰려든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힘을 뒤섞고 훼방했다.
다른 한 노인 앞에는 주먹만 한 일곱 개의 옥구슬들이 떠 있었는데 하나같이 영롱한 빛을 발하며 주인의 손짓 아래 하늘이 떠나갈 듯 우렁찬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냈다.
동시에 그 구슬들에서는 갓난아이들의 우는 얼굴이 나타나더니 곧 펑 하고 터져나가면서 각각이 막 태어난 아기 귀신으로 변했다. 이 아기 귀신들 역시 검은 안개를 휘감은 채 날카로운 곡성을 내며 한제를 향해 돌진했다.
마지막 노인은 그 틈에 이곳의 상황을 곤허경에 알리기 위해 법보 대신 옥패를 하나 꺼내 움켜쥐어 부수려 했다.
세 노인은 오랜 세월 손발을 맞춰온 듯 죽이 척척 맞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을 진행했다.
만약 보통의 정열기 수준 수련자였다면 이들의 공격에는 별 영향을 받지 않더라도 옥패로 상황을 전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한제였다.
한제는 두 노인이 꺼내 든 법보는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소매를 크게 휘둘렀다.
순간 화염 폭풍이 일며 하늘을 뒤덮더니 달려들던 먼지떨이를 그대로 감쌌다. 동시에 한제는 오른손을 앞으로 뻗으며 가볍게 외쳤다.
“정(定)!”
그 한 마디에 모든 신통력은 그대로 멈춰버렸고 세 노인 역시 사색이 된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한제는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유롭게 세 번째 노인의 손에 들린 옥패를 집어 들더니 심드렁하게 오른손을 흔들었다.
순간 옥패를 꺼내 들었던 노인은 피를 토해내며 펑 하고 피안개로 터져버렸고 튀어나온 원신 역시 한제에게 붙잡혔다.
“분명히 기억해라. 먼저 공격을 해온 것은 너희들이다.”
말을 마친 한제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또 한 명의 노인이 그대로 무너져 버렸고 원신 역시 한제의 손에 들어갔다.
한제는 살기 어린 눈으로 마지막 남은 노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