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95
“영령연보(嬰靈煉寶)로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일곱 개의 옥구슬을 꺼냈던 마지막 노인이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수련자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상대가 동료들의 육신은 파괴했지만 그 원신만큼은 해치지 않고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상대는 역시 곤허경을 조금은 두려워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한제는 노인에게로 다가오더니 오른손으로 미간을 찍었다. 다음 순간, 노인은 전신에 고통을 느꼈고 한제의 손끝에서 발산된 하얀 화염에 휩싸였다. 심지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 육신은 물론 원신까지 검은 재로 스러졌다.
네 규열기 수준 수련자가 사라지자 그들의 통제를 잃은 허상의 도끼는 허공에서 흩어져 사라져 버렸고 먼지떨이 역시 화염에 휩싸여 불타 버렸다.
일곱 아기 귀신들은 멍한 모습이었다. 그 귀신들을 보며 한제는 모종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 일곱 귀신 앞에 회오리가 나타나 그것들을 전부 빨아들였다.
한제는 덤덤한 눈으로 전방의 지면에 새겨진 전송진을 바라보다가 몸을 숙여 진의 곳곳을 두드렸다. 그러자 전송진은 희미하게 빛나며 사방에서 원력을 끌어들였고 곧이어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가동되었다. 그리고 이내 밝은 빛이 한제의 몸을 감쌌다.
잠시 후 빛이 사그라졌을 때, 한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 ★ ★
아주 구석진 공간의 균열 안에 있는 곤허경에는 이름 모를 꽃이 가득 피어 있어 마치 선계 같았으나, 선기 대신 짙은 원기가 차 있었다.
땅에는 높은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긴 강이 흘렀으며, 작은 짐승들이 자유롭게 노니는가 하면 하늘에는 학들이 날았다. 그 우아한 모습에서 상서로운 느낌이 풍겼다.
곤허경의 북쪽 평원에는 거대한 진이 있었다. 안팎으로 출입할 수 있는 입구와 같은 곳으로 그 앞에는 한 동자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얼굴은 매우 앳되어 보였으나 몸에서는 오랜 세월을 지나 보낸 느낌이 물씬 풍겼다. 모종의 공법으로 어린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그가 돌연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몇 마디 중얼거리며 진을 바라보았다.
그때 진에서 콰쾅 하고 파문이 일어 눈 깜짝할 사이 높이 솟아오르더니 허공에 왜곡을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문은 사라졌고 우렁찬 소리도 점점 줄어들었다.
한 차례 변화를 겪은 진 안에는 한 사람의 인영이 서 있었다.
동자는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진 안에서 느릿하게 걸어 나오는 상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네 몸에서 피 비린내가 나는구나!”
두 눈동자가 바짝 졸아든 동자가 호통 치듯 외쳤다.
일찍이 심신을 통해 이곳을 본 적이 있던 한제는 진 밖으로 나와 동자를 보더니 여유롭고도 침착하게 포권을 했다.
“절 대신해 말씀을 좀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전 이한제라 합니다. 주작성종의 옥패를 전하러 왔습니다.”
동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서늘한 눈빛을 드러내더니 느릿하게 말했다.
“간도 큰 녀석이로군. 곤허경에 멋대로 발을 들인 녀석은 오랜만인데…”
동자의 말을 들은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아예 눈앞의 상대에게는 신경 쓰지 않고 신식을 펼쳐 곤허경 전체에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나는 선대 주작성황을 대신해 옥패를 전달하러 왔습니다!”
동자는 눈을 번득이더니 공격하는 대신 끊임없이 한제를 훑어보았다.
한제가 신식을 통해 생각을 전달함에 따라 곤허경 곳곳에서 여러 갈래의 신식이 몰려들었는데 그중에는 쇄열기 수준의 수련자가 퍼뜨린 신식도 있었고 심지어는 한제를 죽이기에 충분한 실력을 가진 이들의 신식도 있었다.
허나 한제의 지금 이 난입은 충분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선대 주작성황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에게 해가 될 일을 시켰을 리는 없다. 그러니 그가 전달을 부탁한 옥패의 내용이 한제에게 위험이 될 리도 없었다.
사실 한제는 이 옥패의 내용을 확인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내용을 대해 모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곤허경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선대 주작성황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청림이 준 문양 때문이기도 했다. 원하기만 한다면 곧장 체내의 문양을 통해 새로운 우의 선계로 갈 수 있으니 지나치게 조심할 이유는 없었다.
이별
어느 산꼭대기에서 가부좌를 틀고 좌선을 하고 있던 주은혜의 곁에는 소백이 엎드린 채 나른하게 하얀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제의 신식을 통한 목소리가 퍼져나갔고 그 순간 주은혜는 몸을 바르르 떨며 눈을 번쩍 떴다.
“아저씨!”
소백조차도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먼 곳을 내다보았다.
주은혜는 감정이 너무나 격앙된 나머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오랜 세월 찾아다닌 한제의 목소리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한 줄기 빛을 그리며 그 신식이 전해온 곳으로 향했다. 소백 역시 몸을 날려 은혜의 뒤를 쫓았다. 허나 녀석의 눈에서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한편, 주은혜가 떠나간 뒤, 방금까지 그녀가 서 있던 산봉우리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묵묵히 어딘가를 바라보던 그녀는 복잡하고 씁쓸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 ★ ★
신식을 내보낸 한제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긴 빛즐기들이 앞에 떨어지며 수많은 수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모은미와 함께 요령의 땅에 왔던 노인은 없었고 수준은 각기 달랐지만 가장 약한 수련자도 정열기 초기였다. 그들은 냉랭한 눈으로 별 위협도 못 된다는 듯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자금색 옷을 입은 중년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위엄이 넘치는 그 사내가 나타나자 주위의 수련자들은 태도와 표정이 공손해졌다.
“주작성황께서 우리 곤허경에 행차하시다니, 흔치 않은 일이군요!”
중년 사내는 한제를 훑어보더니 느릿하게 말했다.
한제는 말없이 곧장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어 옥패를 꺼내 그 쇄열기 수준 수련자에게 던졌다.
자금색 옷의 중년 사내는 침착한 얼굴로 옥패를 받아 신식으로 한 번 훑더니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의 수준으로도 그 옥패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옥패가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것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작열하는 기운에 그 옥패를 가져온 한제의 신분까지 감안하면 결코 만만한 물건일 리는 없었다.
“이것은…?”
남자는 고개를 들어 한제를 바라보았다.
“주작성종의 선대 성황께서 붕어(崩御)하시기 전 알아차린 수련자 연맹 본부의 비밀입니다. 제게 이 옥패를 곤허경에 전하라 하셨지요!”
한제의 덤덤한 대답에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이 중요한 일임을 깨닫게 된 그는 한층 신중해준 표정으로 포권을 했다.
“감사합니다!”
한제는 말없이 오른손을 휘둘러 세 개의 원신을 상대에게 던졌다. 세 원신 모두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에 속박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초대장은 받지 못했으나 옥패를 전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여 이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어서 한제는 허공을 움켜쥐어 또 하나의 옥패를 꺼내 그것도 상대에게 건넸다. 그 옥패에는 좀 전에 한제와 전송진을 지키던 네 노인 사이에 있었던 일이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중년 사내는 옥패를 묵묵히 확인한 뒤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자한 이들에게 직접 교훈을 주시느라 고생하셨겠습니다. 다만 교훈은 교훈으로 끝내면 좋았을 것을 우리 곤허경의 사람을 죽이다니, 이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실수일 뿐이었습니다.”
한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한제를 응시하다가 피식 웃었다.
“중요한 문제이니 성황께서는 며칠 머무시는 것이⋯⋯.”
그때,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하늘에서 냉랭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놔줘라!”
그 순간 그곳에 모인 수련자들은 더없이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자금색 옷의 남자 역시 흠칫 놀라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복잡한 표정의 모은미가 나타나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순간, 저쪽 하늘 끄트머리에서 두 줄기 긴 빛이 날아오더니 주은혜와 소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은혜는 한제를 보자마자 잔뜩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아저씨! 정말 아저씨였구나!”
붉어진 주은혜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를 본 한제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널 데리러 왔어.”
이제 더 이상 당시의 어린아이가 아니었기에 주은혜는 지금 눈앞의 상황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여의치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한제의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를 보고는 마음이 아파왔다.
“주은혜를 데리고 가겠다.”
한제는 모은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모은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두 물러가 있도록.”
그녀의 한마디에 주위에 모여 있던 수련자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금색의 옷을 입은 사내 역시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떠나갔다.
이제 이곳에는 한제와 주은혜, 모은미 세 사람만 남게 됐다.
“주은혜, 이곳을 떠난 뒤에도 매일 좌선을 하며 수련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알았지.”
모은미는 한제의 시선을 피해 주은혜를 바라보며 조용히 일렀다.
주은혜는 한제와 모은미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스승님이 자신에게 아주 잘 대해줬다는 것을 그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만약 스승님이 자신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아저씨와 다시 만날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런 스승과 이별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슬퍼진 주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 잊지 않겠습니다. 매일 수련도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언제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걸요.”
모은미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의 제자는 지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제자를 그냥 보낼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