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96
모은미는 자신의 머리에 꽂혀 있던 비취 머리꽂이를 하나 뽑더니 제자에게 건넸다.
“스승님, 이것은⋯⋯?”
주은혜는 얼떨결에 자신이 받은 것이 모은미가 자신의 스승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극강의 법보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받아라, 그것이 나 대신 너와 함께할 것이다.”
모은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주은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해온 둘 사이의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주은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모은미 곁으로 다가갔다. 한제는 흠칫 놀랐으나 그녀를 막지는 않았다.
모은미는 자신에게 다가온 주은혜의 머리를 틀어 올려 직접 머리꽂이를 꽂아주고는 조심스레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특유의 냉랭함과는 거리가 먼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앞으로도 넌 영원한 나의 제자이자 유일한 제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곤허경이 너의 두 번째 집이라는 것도… 이제 가봐라.”
“스승님!”
주은혜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의 스승과 한제가 아는 사이라는 것을 그러나 벗보다는 적에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금 떠나면 어쩌면 다시는 스승과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한제의 눈빛도 복잡하게 변해갔다. 그는 모은미와 주은혜 사이에 두터운 정이 쌓여 있음을 느꼈다. 이는 절대 거짓된 것이 아니었으나 그로서는 무정했던 류미를 쉽사리 믿을 수도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주은혜.”
주은혜는 모은미를 바라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머리를 세 번 찧으며 절을 하더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이 제자는 이제 갑니다.”
“잘 가거라⋯⋯.”
모은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무언가를 잃은 듯 공허하고 고통스러웠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난 그녀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주은혜와 함께 전송진으로 향한 한제가 곤허경을 떠나려던 순간, 뒤에서 모은미의 목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이한제, 미안해⋯⋯.”
모든 용기를 끌어모은 듯한 그 목소리에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며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
덜덜 떨고 있는 모은미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더듬더듬, 그러나 끊임없이 말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는 거의 무너질 뻔할 정도로 괴로웠고 매일 밤 좌선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깨어 혼란스러워하곤 했다.
“류미는 이미 죽었어. 넌 그녀가 아니니 내게 미안할 필요도 없지.”
한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찢어질 듯 아픈 가슴팍을 움켜쥐고 말했다. 그 순간, 이평의 얼굴이 떠올랐다. 원기로 가득했던 갓난아이 영혼의 울음소리와 아버지를 향한 독기 가득한 눈빛은 그로서는 평생에 벗어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악몽이었다.
류미는 한제의 도심 속에 자신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 했다. 그녀는 그렇게 했고 여태까지도 그렇게 남겨진 그녀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모은미의 창백한 뺨을 타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제는 묵묵히 진을 가동했다.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진에서 발산된 빛이 한제와 주은혜를 감쌌다.
막 곤허경에서 사라지려던 순간, 한제는 무언가 결심을 내린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은미… 정말 그 아이를 보고 싶은가?”
★ ★ ★
한제는 떠났다. 주은혜를 데리고 류미에 대해 정리하지 못한 복잡한 감정을 가진 채. 마음속 깊이 남은 그 당시의 기억 하나하나는 영원히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모은미는 결국 이평을 보지 못했다. 그녀의 심정이 어떠할지 한제는 짐작할 수도 없었고 짐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모은미는 가만히 진이 가동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빛이 번득였다가 점차 한제의 뒷모습과 함께 사라져가던 그때, 그녀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이평을 보고 싶었다. 아이의 몸을 만지고 그 아이를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그녀의 도심에는 류미로 인해 틈이 생겼으니 원래대로라면 그 틈을 잘라내 버려야 했다. 모든 흠결을 마음속에서 몰아낸다면 도심이 완전해지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틈은 없앨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평을 본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은미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도심은 완전해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만약 자신의 생이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망설이지 않고 이평을 보기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곤허의 성녀다. 그녀의 삶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모은미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몸을 돌려 느릿하게 먼 곳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한없이 고독해 보였다.
★ ★ ★
우주는 한없이 어두워 저 멀리 반짝이는 별빛조차도 한제의 고통을 덮지 못했다. 그저 고통에 잠식된 이 상황을 홀로 견뎌내는 수밖에 없었다.
‘익숙해지면 고통도 곧 무뎌지겠지.’
새로운 우계에 도착한 주은혜는 뭔가 아쉬워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한제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보살피던 그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주은혜를 바라보면 한제의 머릿속에는 이평이 떠올랐고 곧 이모완도 떠올랐다.
“많이 컸구나.”
한제의 눈빛이 한층 따뜻해졌다. 꽤 오랜 시간 함께하며 키웠던 아이였다.
“아저씨⋯⋯.”
주은혜는 마치 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제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쥔 그녀는 그 손을 놓으면 다시 한제가 떠나버릴까 두려워하는 듯했다.
“너를 데리고 온 것이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허나 너를 모은미와 함께 두고는 안심할 수가 없어. 만약⋯⋯ 이 아저씨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은혜야, 그때는 다시 스승을 찾아가거라.”
말을 마친 한제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주은혜가 붙들고 있던 소맷자락은 죽 찢어졌고 한제는 바람이 되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저씨⋯⋯.”
주은혜는 거의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있던 그녀에게 호연이 다가와 그 손을 잡아 끌었다.
“이한제는 돌아올 거다.”
청룡성종
청룡성황은 돌아오자마자 곧장 사성종을 모아 하나로 합쳤고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구분은 하지 않았다. 또한 이로 인해 사성종의 성황은 사라지고 단 한 명의 성존(聖尊)만이 남게 됐다.
청룡성존의 이런 행태에 사성종 내에서도 이의가 있었지만 청룡성존의 강력함에 모든 반대 의견은 힘을 잃다가 사라져갔다.
현무성종과 백호성종의 태고 성물은 두 성종의 손에서 떠나 청룡성존의 손에 들어갔고 각 성물의 사용법과 각 성종의 수련 구결 역시 모두 공개됐다.
한제가 연맹 성역 동쪽 구역에 나타났을 때는 사성종이 완벽한 합체를 이룬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청룡성종 사람들은 한제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그를 발견했다.
한제는 덤덤한 눈으로 청룡성종의 순찰자들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순찰자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한제는 말없이 천천히 나아갔고 수련자들은 물러나며 길을 비켰다.
그가 이곳에서 떠나고 나서야 청룡성종 사람들은 서로를 둘러보더니 그제야 옥패를 꺼내 상황을 장로에게 알렸다.
“저자는 더 이상 성황이 아니야! 우리가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
순찰자 중 누군가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한편, 한제는 이곳의 분위기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진즉 눈치챘다. 그는 적지 않은 사성종 수련자들을 마주쳤는데 그들의 표정은 매우 기이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발걸음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주작성종이 있는 붉은 성역이 나타났다. 한데 막 그 성역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그는 우뚝 멈춰 서더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몇 갈래의 긴 빛이 날아들더니 일곱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명은 주작성종 사람이었고 한 명은 백호성종 사람이었으며 넷은 청룡성종 사람이었다. 모두 수준이 높은 이 일곱 명은 청룡성황 구조에 참여한 장로들로 한제에게는 낯이 익었다.
한제의 표정은 덤덤했으나 두 명의 주작성종 장로는 무언가 캥기는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이한제, 청룡성존께서 보자 하신다!”
청룡성종의 장로가 외쳤다. 허나 그의 눈빛에는 미안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사실 그도 돌아온 청룡성황이 어째서 사성종에 이런 변화를 일으킨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청룡성황을 저지할 힘은 없었다.
“주작성종에 남은 내 지인들은 다 무사한가?”
청룡성종의 장로가 던진 한 마디에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한 한제는 침착하게 물었다. 허나 상대는 자신을 성황이라 부르지 않는 것은 그렇다 쳐도 성존이라는 호칭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모두 안전하다.”
한제의 질문에 답을 한 것은 주작성종의 장로였다. 그는 당시 한제에게 성황이 된 뒤 무슨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던 사람이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한제는 몸을 돌려 타오르고 있는 성역으로 향했다.
청룡성종의 장로들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뒤쫓았다.
“이한제, 청룡성존께서 보자 하신다!”
뒤에서 추격자들이 외쳤으나 한제는 그들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고 나가더니 신식을 펼쳐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이내 축지성촌을 활용해 주작성종 곳곳을 다니면서 이곳을 완벽하게 훑었다.
그러나 대두 등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고 이에 한제의 표정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그는 일곱 장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허나 이곳에서 화를 내봤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분노를 빠르게 가라앉혔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했다.
“그들은 어디에 있지?”
“이한제, 우리는 사성종의 사람으로서 성존께서는 너를 찾으신다. 벌써 세 번째로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