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02
그러자 관을 꺼내준 노인이 짧게 외쳤다.
“쫓아라!”
그 순간 시음종 여덟 왕은 긴 빛줄기가 되어 곧장 혈룡을 추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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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핏빛 파문의 흔적을 쫓던 한제는 그 발원지에 이르렀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파문에 실려 있던 끔찍한 힘이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으로 방금 이곳에서 엄청난 전투가 있었으리라는 것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제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장 이동했으나, 머지않아 그는 이 허무의 공간에서 한 줄기 진동이 끝없이 확산되고 있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한제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당시 탁삼이 피바다에서 나왔던 순간 이와 같은 진동이 확산됐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진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지만 허무의 공간에는 백 갈래가 넘는 극강의 기운이 나타나 있었다. 한제는 머리가 저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전속력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 돌연 저 먼 허공에서 세 갈래의 붉은 빛이 번쩍 하고 나타나더니 한제를 쫓기 시작했다.
이 세 갈래의 붉은 인영은 모두 상고 시대 연기사들로 둘은 정열기 초기 정도였고 마지막 한 사람은 쇄열기를 바로 앞에 둔 정열기 후기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한제는 즉시 허공을 움켜쥐어 저물공간에서 노란 종이 부적을 꺼내 가슴에 붙였다. 순간 그의 몸은 회오리에 휩싸인 듯 빠르게 튀어 나갔다.
세 연기사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후에도 한제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는 방금 피바다의 경계가 열리면서 수많은 상고 시대 연기사들이 튀어나왔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수준은 예전에 봤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탁삼의 존재를 감안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탁삼도 곧 나오겠군.”
생각을 정리한 후 신식으로 뒤쪽을 훑은 한제의 표정이 굳어갔다.
그를 쫓던 상고 시대 연기사들이 어떤 수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엄청난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는 있었지만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을 터였다.
은둔술을 펼치며 나아가던 한제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살기 어린 눈빛을 번득였다.
‘앞에서 다른 연기사가 하나라도 나타난다면 포위되는 꼴이다.’
신식으로 사방을 훑은 한제는 결심한 듯 우뚝 멈춰 서더니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눈 깜짝할 사이, 한제의 몸으로부터 화산의 허상이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그가 그린 결인과 체내의 선력이 융합됨에 따라 사방으로 퍼져나가던 화산의 허상은 점점 실체를 갖춰가기 시작해 거의 실재(實在)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 화산들은 한제가 소매를 휘두른 순간 사라졌다.
“이곳은 위험하니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서 삼각 대형으로 다가오는 연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두의 정열기 절정 수준 노인이 다가온 순간, 한제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남과 동시에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정(定)!”
이 짧은 외침에 붉은 옷을 입은 선두의 노인은 수많은 가느다란 실들이 자신의 몸을 꽁꽁 옭아매는 것을 느끼며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물론 정열기 초기에 불과한 한제도 저토록 강한 상대에게 정신술을 발휘하는 데는 부작용이 따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노인을 잠시 묶어둔 한제는 곧장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두 노인이 더욱 속도를 냈다.
그들이 1천 척 안으로 진입한 순간, 한제는 두 눈에 살기 어린 빛을 번득이며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앞으로 힘껏 뻗었다.
“산!”
그 순간, 두 노인 앞에 갑자기 두 채의 화산이 나타났다. 활활 타오르는 화산이 퍼뜨리는 엄청난 위엄에 두 노인은 표정이 급변해 곧장 방향을 틀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든 1천 척도 가기 전에 산붕 선술에 시달려야 했다.
“붕!”
속전속결을 결심한 한제는 곧장 몸을 날리며 낮게 외쳤다.
콰쾅!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두 노인 앞에 나타난 두 채의 화산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폭발로 인해 대량의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세상을 멸망시킬 듯한 힘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산붕의 위력은 한제와 비슷한 수준의 수련자들 사이에서는 압도적이었다.
콰쾅! 쾅!
연이어 폭발음이 울려 퍼지면서 몰골이 엉망이 된 두 노인은 피를 토해내고는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한제가 곧장 한 줄기 빛이 되어 사라지더니 그중 한 노인의 뒤에 나타나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상대의 미간을 두드렸다.
“컥!”
산붕의 위력에 중상을 입은 노인은 전신을 바르르 떨면서 피와 살로 무너져 흩어졌다. 하지만 죽기 직전 노인의 입가에는 해탈한 듯한 미소가 드러났다.
‘웃어?’
그 웃음에 왠지 모르게 불길해진 한제는 곧장 다음 노인을 처리하기 위해 몸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갑자기 한 줄기 강력한 위기감이 몰아쳤다. 이에 눈동자가 바짝 졸아든 한제는 곧장 몸을 틀어 순간이동을 하듯 달아났다.
그 순간, 저 먼 곳에서 하늘을 뒤덮을 듯 강력한 핏빛이 번득이더니 중상을 입은 혈룡이 달려들었다. 몸통의 절반이 얼음으로 봉인된 모습은 말 그대로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속도만큼은 느려지기는커녕 오히려 전보다 더 빨라진 듯했다.
거의 스칠 듯 지나쳐간 혈룡이 일으킨 광풍에 한제의 체내에서는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줄기 균열이 가슴팍에 나타났다. 돌로 만들어진 분신이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혈룡은 이미 저 멀리 떠나간 후였고 정신술로 속박됐던 정열기 절정의 노인도 산붕에 중상을 입은 노인도 사라진 상태였다.
한제는 충격에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곁을 스쳐 간 혈룡의 몸을 타고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남색 결정을 떠올린 한제는 곧장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나자마자 전속력을 발휘해 떠나갔다.
‘혈룡은 엄청난 부상을 입어 도망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부상을 입힌 자들이 뒤쫓고 있을 터!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들과 맞닥뜨릴 수는 없다.’
잠시 후, 여덟 갈래의 붉은 빛이 나타나 혈룡이 사라진 방향으로 돌진했다.
그중 한 갈래 빛에는 포악하고 오만해 보이는 중년 사내가 들어 있었는데 그는 한제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고 눈 깜짝할 사이 다른 일곱 명의 수련자들과 허무의 공간 저 끝으로 향했다.
한제는 저물공간에서 짐승 가죽 부적을 꺼내 가슴에 붙인 뒤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다. 그는 탁삼이 곧 나타날 것임을 어렴풋이 예감했다.
무극자
한편, 혈룡은 끊임없이 포효를 내지르며 내달렸는데 몸통의 절반은 이미 얼음 결정이 된 상태였다.
끝없이 퍼져나가는 남색 빛에 녀석은 더더욱 분노하면서 최대한 빨리 이동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허무의 공간 중앙에 이르더니 똬리를 틀고 앉아 고족의 언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서늘하고 노련한 기운이 사방을 맴돌았다.
“캬오오오!”
혈룡은 하늘을 향해 우렁차게 포효했다. 그리고 그 포효와 함께 혈룡의 커다란 입에서 뿜어져 나온 한 줄기 세월의 힘은 눈 깜짝할 사이 허무의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세월은 일종의 규칙이며 이 규칙은 천지의 만물을 장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어, 깨달았다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세월의 경지를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주작성 시절, 한제는 세월의 경지를 장악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주작성 전체를 통틀어 그런 경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자뿐이었다.
지금 고족의 언어로 중얼거리고 있는 혈룡의 몸에서는 바로 그런 세월의 힘이 발산되고 있었다. 이 힘은 세월의 경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미 규칙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주문을 외운 혈룡으로부터 비롯된 이 세월의 규칙은 잠시 후 허무의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허무의 공간 어딘가를 날아가던 나천성역 수련자 무리가 경계심 어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수십 명에 달하는 이들은 지나치게 많은 연기사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위험은 없을 거라 여겼다.
한데 세월의 힘이 스쳐 지나간 순간, 그들 중 가장 수준이 낮은 청년이 몸을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는 경련을 일으키는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
마치 서늘한 기운이 체내에서 솟아오르는 듯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피부에 주름이 생겨났다.
청년은 몸이 무거워지고 수준이 하락하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어갔다. 어렴풋이 저 멀리에서 두려움에 잠식된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도 힘겨웠다.
“이게 대체 무슨⋯⋯?”
청년은 곧 시야마저 마치 안개가 낀 듯 부옇게 흐려졌다. 손을 들어 눈을 비비자 잠시 시력이 돌아왔는데 어째서인지 일행들이 하나둘 자신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런 그들의 눈빛은 충격으로 얼룩져 있었다. 심지어 자신과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매 역시 기겁한 얼굴로 거리를 벌렸다. 예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표정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눈을 비볐던 오른손이었다. 멍한 그의 시야에 들어온 손에는 주름이 잔뜩 져 있었고 갈색 검버섯이 가득했다.
화들짝 놀란 청년은 더욱 격렬하게 몸을 떨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다가 비명이라도 지를 듯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심지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실 두 눈은 이미 생기를 완전히 잃은 상태였고 순식간에 더욱 늙어갔다. 머리가 빠지고 이가 빠지고 뼈가 바스라지고 결국에는 가죽조차 가루로 흩어져 훌훌 날아갔으며, 육신은 끝없이 쪼그라들었다.
나천성역 수련자들은 적막에 휩싸였다. 하지만 동료의 갑작스런 죽음에 안타까워할 틈도 없이 또 다른 여자 수련자 하나가 늙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들 모두가 같은 일을 겪기 시작했다.
이들만이 아니었다. 같은 일이 드넓은 허무의 공간 곳곳에서 일어났다. 어디에서 왔든, 어디에 있든, 허무의 공간에 있는 수련자 대부분은 그 무정한 세월의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직 쇄열기 수준의 수련자들만이 이 규칙에 대항할 수 있었지만 그 수는 본래 많지 않았다.
각 수련자들은 세월의 규칙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어가면서 보이지 않는 기운을 한 줄기 발산했다. 이 기운은 어지간한 수련자들은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허무의 공간 중앙을 향해 돌진하더니 똬리를 튼 혈룡에게 스며들었다.
수련자들이 끊임없이 죽어나가면서 점점 많은 기운이 녹아들자 혈룡의 몸을 뒤덮은 남색 얼음 결정이 무너져 내리며 쩌적 하고 균열이 일어났다.
한편, 시음종의 여덟 왕은 세월의 규칙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점차 혈룡에게 접근해왔다.
또한, 다른 방향에서는 염뇌자가 공손한 표정으로 흑의(黑衣)의 노인을 따르고 있었다. 노인의 보폭은 빠르지 않았지만 그가 한 걸음 뗄 때마다 아래의 공간은 줄어들었다. 이는 세상에 녹아들어 먼 거리를 짧게 줄이는 축지성촌(縮地成寸)과는 다른 축지성공(縮地成空)으로 한 걸음에 하나의 계를 뛰어넘는 것과도 같았다.
여유롭게 나아가는 노인의 걸음걸음은 일정한 박자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웠다. 염뇌자 또한 노인의 신통력에 힘입어 그와 같은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세월의 규칙이 허무의 공간을 뒤덮었을 때, 한제 역시 이를 느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월성에서 난 돌로 이루어진 것으로 세월의 흐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바위야 오랜 세월이 지나며 풍파에 휩쓸린다 해도 그저 바위일 뿐이니까.
한제는 수련자들이 세월의 규칙 아래 노화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수련자로서의 힘을 잃고 신통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면 우리 역시 일반인과 다를 바 없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으면서도 그는 빠르게 전진했다.
“본체로 이곳에 왔다면 나 역시 저들과 마찬가지로 허무의 일부분이 됐겠지. 당당한 수련자들도 수천 년 수만 년을 산 수련자들도 세상의 규칙을 깨달은 수련자들도 때로는 돌로 이루어진 분신만 못하구나.”
그는 모든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도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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