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04
혈룡의 포효에도 아랑곳 않고 흑의의 노인은 한제의 몸을 끄집어냈다. 그러더니 노인은 거의 사라져가는 한제의 흐릿한 몸을 붙잡고 미간을 두드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주입했다.
펑! 펑!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한제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잃어버렸던 원력이 보충됐을 뿐만 아니라 흩어졌던 원신도 하늘을 거스르듯 다시 응집됐다.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처럼 다시금 생기를 갖게 된 것이다.
“훌륭한 녀석이로구나!”
흑의의 노인은 대견한 듯 한제를 바라보았다.
“분신의 몸으로 고신을 보러 오다니, 아주 똑똑해. 네게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간파했다는 사실에 한제는 흠칫 놀랐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에 노인은 더더욱 대견한 듯한 눈으로 그를 보더니 하늘의 거대한 회오리를 향해 가볍게 한 손을 뻗었다.
작은 움직임에 불과했지만 한제는 그 손짓에 온 세상이라도 뚫을 수 있는 힘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시 나천성역에서 보았던 이 노인이 주먹질 한 번에 나천성역과 연맹성역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 순간, 회오리는 우뚝 멈춰서더니 점차 흩어지면서 그 너머로 핏빛 세상을 드러냈다.
원뿔 모양의 산봉우리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의 붉은 머리는 사방으로 흩날렸고 새빨간 눈동자에는 충만한 살기와 하늘을 찌를 듯한 오만함으로 번들거렸다. 누구도 그의 외모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그의 두 눈에 모든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탁삼!”
한제의 눈빛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와 탁삼 사이에는 운명적인 갈등이 있다. 만약 한제만 아니었다면 탁삼은 일찍이 모든 기억을 거머쥐고 속박에서 벗어나 서사의 몸으로 온 우주를 종횡무진했을 터였다. 비록 서사가 수련한 묵류분신술(墨流分神術)을 익히는 데 실패하는 바람에 체내에서는 마념이 자라나 있었지만 어찌됐든 지금의 탁삼은 진정한 고신, 그것도 왕족 고신인 서사니까.
반면 한제의 고신 본체는 비록 운 좋게 5성급의 수준을 갖추긴 했지만 사실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두 숙적은 회오리를 사이에 둔 채 두 세계에 떨어져 서서 묵묵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때, 탁삼이 피식 웃으며 한 발 나서더니 단번에 원뿔형 산봉우리에서 벗어나 회오리에 발을 딛고 선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염뇌자는 탁삼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심신이 진동하며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고 두 입술은 바짝 말랐으며,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셨다. 마주할 엄두도 나지 않게 만드는 눈앞의 상대는 마치 한 사내가 아니라 천도와도 같아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쓸모없는 놈!”
탁삼의 눈에 담긴 경멸의 빛은 시음종 여덟 왕에게 이르렀을 때 더욱 짙어졌다.
“저 쓸모없는 놈은 사람이기라도 하지, 너희들은 그조차도 못 되는구나!”
이들은 시음종 내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이들이었지만 탁삼의 눈에는 미물과도 같았다. 그 싸늘한 눈빛에 여덟 왕은 하얗게 질려 뒤로 물러났다. 그들에게 눈앞의 사내는 한 번의 분노로 온 세상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존재로 보였다.
“왕족⋯⋯ 고신의 혼!”
흑의의 노인이 덤덤한 얼굴로 읊조렸다.
그제야 그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린 탁삼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냉랭하게 내뱉었다.
“저것들보다는 좀 낫군!”
그 오만한 말에도 노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순간 둘 사이의 공간은 콰쾅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고 형태 없는 폭풍이 일어나 탁삼에게로 불어닥쳤다.
탁삼은 덤덤한 얼굴로 가볍게 주먹을 날렸다.
콰르릉!
온 세상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때 사방에서 몰려들던 쇄열기 수준의 수련자들은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기겁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탁삼의 주먹에 담긴 위력을 여실히 느낀 한제도 가늘게 몸을 떨었다.
단 한 번의 주먹질로 탁삼과 흑의의 노인 사이에는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고 그 안에 귀를 찢을 듯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쉭쉭 들려왔다. 동시에 균열은 계속해서 뻗어나가 눈 깜짝할 사이 허무의 공간을 둘로 갈라 버렸다.
흑의의 노인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번쩍 하고 사라졌다가 탁삼의 공간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결인을 그릴 필요도 없다는 듯 소매를 크게 휘둘렀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수많은 빙산이 나타나 무려 반경 1만 리를 뒤덮었다.
하지만 탁삼은 빙산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며 가볍게 빠져나왔다.
“겨우 이런 신통력으로 되겠느냐. 네 수준이 공열기에 이르렀다 해도 규칙을 깨달았다 해도 소용없다! 크하하하!”
탁삼은 오만한 웃음과 함께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렸다.
“우리 고신족은 규칙을 수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신족은 어떤 규칙이라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먹질에 빙산으로 뒤덮인 세상에는 쩌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줄기줄기 균열이 나타났고 결국 빙산과 두꺼운 얼음층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린 얼음층은 폭풍이 되어 하늘을 뚫을 듯 솟구쳐 올랐지만 탁삼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듯 둥실 떠올랐다.
고신의 힘
흑의의 노인은 진중한 얼굴로 몸을 훌쩍 날렸다.
“고신족의 진정한 위력을 보여주마!”
탁삼의 두 눈은 흑의의 노인이 아니라 한제에게 닿아 있었다.
순간, 그의 몸은 점점 흩어지면서 사라져갔다. 동시에 허무의 공간은 다시 진동하면서 줄기줄기 균열이 생겨났다. 포악한 힘에 휩쓸리듯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탁삼이 사라진 곳에는 거대한 회오리가 나타나더니 엄청난 흡입력을 발휘했다.
흑의의 노인은 덤덤한 눈빛으로 그 회오리 안으로 진입했다.
“너희도 따라와라! 지금부터 보게 될 것이야말로 어두운 고신의 진정한 힘이니라!”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한제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회오리로 들어섰다. 그는 이 회오리가 서사의 육신 밖 공간의 균열로 이어지는 통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공간의 균열 안에는 수련성 몇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거대한 서사의 몸이 놓여 있었다. 한데 그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주먹을 쥐었고 그의 거친 얼굴 위의, 영원히 감겨 있을 것만 같았던 눈이 까마득한 세월을 뛰어넘어 서서히 뜨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고신이 눈을 뜬 순간, 공간의 균열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언제라도 찢어져 버릴 것처럼 불안정해졌다.
죽은 바다처럼 덤덤한 두 눈에서는 세월의 흐름이 여실히 느껴졌고 두껍고 거친 피부는 폐허가 된 수련성의 대지처럼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동시에 그의 미간에 떠 있던 여덟 개의 어두운 별 모양 반점 중 첫 번째 반점에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콰르릉!
공간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공간의 균열에 울려 퍼졌다. 천둥보다 요란한 소리였지만 자세히 들어본다면 뼈와 뼈가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고신은 서서히 일어나 앉았다. 누워 있을 당시 그의 머리가 놓여 있던 곳에서 일어나 앉고 난 후 그의 머리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축지성촌을 익히지 못한 수련자라면 몇 시진을 쉬지 않고 날아가야 도착할 만큼 멀었다.
한제는 묵묵히 눈앞의 거대한 고신을 바라보았다. 그 고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을 때 한 줄기 폭풍이 불어 닥치며 그를 비롯한 수련자들을 밀어냈지만 흑의의 노인만은 밀려나지 않았다.
눈앞의 고신에 비해 이들은 개미보다도 훨씬 더 작을 정도였다.
“나는 고신, 탁삼이다!”
우렁찬 목소리에 주위 공간에는 순간 균열이 일어났다. 시음종 여덟 왕은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거대한 고신 앞에서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염뇌자의 얼굴 역시 창백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고신을 바라보며 그조차도 짙은 무력감을 느꼈다.
이들 중 가장 수준이 낮은 한제는 그 목소리에 깃든 위엄에 충격을 받았고 몸에 점점 많은 균열이 생겨났다. 특히 가슴팍의 균열은 이미 몸통 앞뒤를 꿰뚫은 상태였고 안색도 흙빛에 가까웠다. 원신에 중상을 입은 상태라 육신이 암석으로 되돌아가는 조짐이 보였다.
이곳에는 마지막에 달려온 쇄열기 수준 수련자도 몇 있었는데 이들은 얼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높은 수준덕에 세월의 규칙은 견뎌낼 수 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심신이 무너져 내리려 했다. 특히 탁삼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을 때, 개중 몇몇은 원신이 불안정해지기도 했다.
탁삼의 두 눈이 점차 냉랭하게 변해갔고 미간에서는 두 번째 반점도 반짝이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이미 밝아진 첫 번째 반점 안에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탁삼은 마치 벌레를 내쫓듯 오른손을 들어 휘휘 내저었다. 수련성 하나에 비할 만큼 거대한 팔이 휘둘린 순간, 수련자들로서는 감히 대항할 수 없는 힘을 품은 광풍이 일어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이 가벼운 움직임에 온 세상이 뒤집힌 듯한 변화가 일어났다.
콰콰광!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가 멀리 퍼지기도 전에 그 거대한 손은 형용할 수 없는 속도로 접근해왔다. 가장 앞에 선 쇄열기 수련자는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온 힘을 발휘해 층층의 보호막으로 몸을 감쌌다. 눈 깜짝할 사이 만 개가 넘는 빛의 보호막이 나타났고 수련자는 재빨리 몸을 물렸다. 중상을 입더라도 저 거대한 팔에 저항해야 했다.
쾅!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려든 팔과 겹겹의 보호막이 충돌했다. 허나 중첩된 만 개가 넘는 보호막은 고신의 팔 앞에 얇은 창호지처럼 힘을 쓰지 못했고 굉음과 함께 가장 바깥쪽 보호막에서 부터 가장 안쪽의 보호막까지 동시에 파괴됐다. 실제로 같은 순간 붕괴한 것은 아니지만 별 차이는 없었다.
1만 년 이상의 수련 끝에 쇄열기 초기에 이른 수련자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참혹하게 피로 흩어져 버렸다. 동시에 원신 또한 바스러지더니 한 덩이 원력이 되어 고신의 피부 위 거친 균열로 흡수되어 버렸다.
고신의 팔은 쇄열기 수준의 수련자가 만들어낸 보호막들을 무너뜨리고도 멈추지 않았다. 그때, 흑의의 노인이 기이한 눈빛을 번득이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곧장 고신의 팔 앞에 나타났다.
그 거대한 팔에 비하면 거의 티끌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존재에 불과했으나, 노인은 덤덤히 손을 들어 올렸다가 힘껏 내리쳤다.
쾅!
수만 개의 천둥이 동시에 내려치는 듯한 소리가 세상을 뒤흔들었고 거리낌 없이 휘둘러지던 고신의 팔이 우뚝 멈추어 섰다.
다음 순간, 고신의 팔이 일으킨 광풍이 노인의 몸에 불어닥쳤다.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뒤집어버릴 만큼 강한 바람이었지만 노인은 반응조차 없었다. 그저 노인의 머리를 묶고 있던 하얀 두건이 툭 끊어져 저 뒤로 날아갔고 옷소매가 바람에 휘날렸을 뿐이다. 소매 위로 일곱 가닥의 균열이 일어났고 옷자락도 금방 가루로 변해 흩어질 듯 헤졌다.
허나 곧이어 고신의 팔과 맞닿은 노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마치 한 줄기 파문이 피부 아래로 전해져 팔과 어깨를 타고 체내로 흘러드는 것만 같았다. 뒤이어 노인의 오른손 소매에는 몇 갈래 균열이 더해지더니 결국 저 뒤로 날아가 먼지로 변해 버렸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비정상적으로 붉어진 얼굴로 피식 웃더니, 목구멍에서 솟아오르는 피를 애써 참으며 왼손으로 오른손 손등을 다섯 번 연속해서 두드렸다.
그의 왼손이 오른손을 처음으로 두드렸을 때, 한 줄기 힘이 형태 없이 이 밀폐된 공간의 균열을 꿰뚫으면서 반경 1만 리를 원력으로 채우는 듯했다. 원력은 폭풍이 되어 한데 응집하더니 오른손 손등을 타고 고신의 오른팔로 퍼져나갔다.
물론 겨우 이 정도 힘으로 고신에게 대적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허나 노인이 뒤이어 오른손을 두드릴 때마다 반경 10만 리, 1백만 리, 1천만 리를 채운 엄청난 원력이 몰려들어 곧장 고신의 체내로 뚫고 들어갔다.
이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주위의 수련자들은 미처 반응하지도 못했다.
콰르릉!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고신의 거대한 팔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노인은 뒤로 떠밀려 나갔는데 그의 손이 닿아 있던 고신의 팔에는 검은 손자국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규칙을 초월했을 뿐만 아니라 공열기 수준은 되어야 대항할 수 있다던 8성급 왕족 고신답구나! 일전에 내가 죽였던 일반적인 8성급 고신과는 달라!”
뒤로 물러나는 노인의 얼굴에서 붉은 기운은 사라진 상태로 오히려 창백해 보일 정도였다. 대신 두 눈에서는 밝은 빛과 전의가 번득였다.
일곱 걸음 정도 물러난 노인은 고개를 맹렬히 쳐들더니 몸을 날렸다. 한달음에 고신의 팔에 이른 그는 추진력을 이용해 훌쩍 튀어 오르더니 유성처럼 탁삼의 얼굴로 돌진했다.
탁삼은 경멸하듯 콧방귀를 뀌더니 팔을 흔들어 검은 손자국을 털어버리고는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늘을 떠받치고 선 그의 모습에서는 천도의 위엄이 풍겼다. 특히 탁삼의 미간에서는 세 번째 별 역시 반짝이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 깊은 곳에도 뭔가가 숨겨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제는 그 반점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흠칫 놀랐다. 그는 8성급 왕족 고신의 신통력 중 단 하나만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이름만 알고 있을 뿐 그 힘을 발휘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인공연성(湮空煉星)!”
그때, 탁삼은 두 손을 휘둘러 광풍을 일으킴과 동시에 노인에게로 그 손을 뻗었다. 거대한 두 개의 수련성 같은 탁삼의 두 팔은 엄청난 속도로 노인을 후려쳤다.
“쓸모없는 것 같으니!”
탁삼의 오만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흑의의 노인은 다시 얼굴이 붉게 변하고 옷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두 팔을 양옆으로 뻗은 그는 무궁무진한 세상의 원력을 응집시켰고 순간 수많은 빙산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