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06
씁쓸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축지성촌을 발휘한 그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퇴로인 구석진 곳의 폐허가 된 수련성에 나타났다. 이곳에는 사성종의 청룡성황을 만나러 가기 전 그가 미리 배치해두었던 진이 하나 있었다.
매우 황폐한 이 수련성에는 일반인들의 도시가 적지 않았고 수련자들의 방문이 매우 적어 오히려 상당히 평화로웠다.
이때 이 황폐한 수련성은 겨울에 이르러 눈발이 날리고 있었고 마을 아이들은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이날은 이 수련성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 중 하루로 그 기원은 까마득한 시간 속에서 잊힌 상태였지만 명절을 쇠는 전통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에 집집마다 불을 환히 밝혀놓은 상태였고 곳곳에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한제는 묵묵히 걸었다. 그 뒤로 길게 남은 발자국은 깊지 않아 내리는 눈에 금세 완전히 뒤덮였다.
휘휘 불어오는 찬바람에 지면의 눈이 조금 휘날렸고 바람소리는 눈밭을 밟는 뽀드득 소리마저 묻어버렸다.
깊은 밤,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그의 주위에는 아무런 인적도 없었다. 바람소리와 떨어지는 눈만이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한제의 눈빛은 어쩐지 슬프기도 했고 또 씁쓸하기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걸음이 마침내 멈추었다. 그곳은 어딘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하얀 눈에 덮인 평원이었다.
“여기로군.”
한제는 고개를 들어 어두운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표표히 떨어지는 눈은 계속해서 대지에 내려앉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낸 한제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의 숨은 하얀 김이 되어 눈앞에서 점차 흩어졌다.
이내 그가 지면을 가볍게 한 번 밟자 한 차례 진동이 사방에서 전해졌고 반경 1만 척의 눈은 소리 없는 폭풍이 되어 저 멀리 쓸려 나갔다.
이불처럼 덮고 있던 눈을 치우고 난 대지 위에는 선명한 진이 하나 있었다. 매우 복잡해 보이는 진 곳곳에는 자갈도 놓여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한제는 진의 중앙으로 들어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어 허공에 한 줄기 균열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저물공간에서 지금껏 모아왔던 돌조각들이 하나하나 튀어나와 선회했다. 그 수는 수백 개가 넘었다.
뒤이어 오른손을 한 번 휘두르자 돌들은 하나둘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가듯 각각의 자리에 배치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진에서는 빛이 발산되면서 회전하며 활성화될 조짐을 보였다. 내리던 눈은 진이 회전함에 따라 다시 위로 밀려났다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말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제는 한 손을 저물공간에 넣어 원신 하나를 꺼내 들었다. 눈을 꼭 감고 있는 원신은 이미 의식을 잃은 듯했다.
눈
한제는 결인을 그린 왼손으로 원신을 두드렸고 그때마다 원신은 경련하더니 마지막에 힘껏 내던지자 곧장 날아가 끝도 없이 커지다가 하나의 회오리를 형성했다.
“캬오오!”
회오리 안에서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지면의 진은 완전히 활성화되면서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이 빛은 곧장 허공의 회오리에 흡수되어 버렸다.
펑! 펑!
회오리 안에서는 굉음이 들려왔다.
한제는 고개를 들고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더니 덤덤하게 외쳤다.
“이혼위인(以魂爲引)!”
순간 회오리에서 핏빛이 번득이며 진에서 발산된 빛을 더욱 격렬하게 흡수했고 진은 순식간에 모든 힘이 뽑혀나간 듯 쩌적 하고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 진 위에 놓여 있던 자갈들까지도 재로 변해 흩어졌다.
회전을 멈춘 채 빛을 번쩍거리는 허공의 회오리 너머로 칠흑처럼 검은 통로가 나타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한제는 한 걸음 내딛어 그 회오리로 향하다가 완전히 들어가기 직전 고개를 돌려 눈으로 뒤덮인 은빛 세상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그에게 낯선 곳이었지만 그래도 연맹성역에 속한 곳이었다. 또한 이곳의 공기 중에는 집 근처를 맴돌고 벗들 근처를 맴돌던 공기도 섞여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떠나 또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그래도 떠나는 나를 배웅하는 눈과 바람이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제는 씁쓸한 마음을 안고 시선을 거두더니 회오리 깊은 곳으로 향했고 그의 모습은 점차 사라져갔다.
★ ★ ★
풍(風), 운(雲), 뇌(雷), 전(電) 4대 선계는 각각 성역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중 우계의 연맹성역은 수련성을 1급에서 9급으로 나누었고 뇌계의 나천성역은 상고 시대와 원고 시대 등에서부터 이어져온 수련자 가문을 중심으로 나뉘었다. 이렇게 다른 체계는 수련 방식과 방향의 차이만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수련자들의 성격도 달라지게 했다.
연맹성역 수련자들이 엄격하다면 나천성역 수련자들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허나 이들은 가문의 영광이 달린 일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려들었다. 그만큼 그들은 무엇보다 영광을 중요하게 여겼다.
풍계의 운해성역(雲海星域) 역시 이 두 성역과는 전혀 달랐다.
4대 선계 중 운해성역이 점거하고 있는 성역이 가장 넓었다. 또한 운해성역은 거의 대부분이 옅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신식이 어느 정도 방해를 받았다. 오랫동안 영원한 존재처럼 군림한 이 안개 때문에 운해성역은 우주라기보다는 안개로 이루어진 바다처럼 느껴졌다. 운해(雲海)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안개 때문에 수준 높은 수련자라도 정확한 성도가 없는 상태에서 뛰어들었다가는 방향을 잃고 영원히 그 안에 갇히기도 했다. 축지성촌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위력은 크게 감소했다.
누구도 이 안개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원고시대 선역이 사라지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소문이 있을 뿐이었다.
운해성역은 짙은 안개 때문에 방향 파악이 어려워 나천성역이나 연맹성역과는 달리 동서남북으로 구분하지 않고 안개의 짙은 정도에 따라 안에서부터 밖으로 총 9급의 구분을 둘 뿐이었다. 여기서 급을 구분하는 것은 아홉 개의 불규칙적인 고리로 가장 바깥쪽의 고리가 1급, 가장 안쪽에 있는 고리가 9급이었다.
운해성역 5급에 자리한 막라(莫羅) 대륙의 중앙에는 높이 솟은 검은 탑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서는 부드러운 빛이 발산되어 대륙을 뒤덮은 안개가 대륙으로 녹아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이 부드러운 빛 덕분에 대륙 근처는 비교적 시계(視界)가 또렷했다.
운해성역에도 수련성은 있으나 총 1백 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고 그나마도 대부분 7급 이상의 성역에 있었다.
7급 이하의 성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우주에 떠 있는 대륙들이었는데 이 대륙들은 각 종파를 대표했다.
막라 대륙의 북쪽, 밤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리는 중이었다. 억수처럼 내리는 비가 얼마나 오랫동안 내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땅은 이미 진흙탕이 되어 있었고 우거진 나뭇가지도 허리가 꺾인 듯 축 처져 있었다. 빗방울은 잎의 가장자리를 타고 지면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작은 짐승들은 구석구석 비를 피해 숨었고 땅 위에는 알록달록한 뱀들이 웅덩이와 흙 사이를 노닐고 있었다. 뱀들에게는 비 오는 밤이 배를 채우기에 좋은 때였다.
비가 나뭇잎을 때리는 소리만이 가득한 한쪽 밀림에서는 이따금 내리치는 번개가 잠깐씩 어둠을 밝혔다.
이 밀림 깊은 곳에는 반경 약 1천 척에 달하는 공터가 있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정리된 듯 진이 배치되어 있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가 진흙을 씻어준 덕분에 이 진은 한층 더 또렷하게 드러난 상태였다.
주위에는 어떤 수련자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 진의 가장자리를 지키고 있던 수련자들은 3개월 전 떠난 상태였다.
그때, 천둥번개가 내리치면서 공터를 환하게 비추었고 진에서는 돌연 쩌적 하는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남색 빛이 진에서 피어올랐다.
4대 성역 모든 수련자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운해성역에 속하지 않은 자가 온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고 천둥번개 역시 갈수록 잦아졌다.
밀림에서 멀리 떨어진 막라 대륙 동쪽에는 용처럼 구불구불하지 않고 하나의 고리를 이룬 듯 둥그렇게 연결된 산맥이 하나 있었다. 또한 당연하게도 고리 모양 산맥 안쪽에는 거대한 분지가 있었다.
분지 안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는데 한밤중에도 불을 환히 밝혀 놓은 상태였다. 다만 곳곳에서는 슬픔의 기운이 맴돌았다. 이 슬픔은 쏟아지는 비로도 내리치는 천둥번개로도 흩어지지 않았다.
분지 가장자리 산맥에는 굵기가 1백 척에 달하는 여덟 개의 두꺼운 기둥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마치 산맥에서 자라나기라도 한 듯 그 기둥들은 약간 비스듬하게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기둥들은 분지로부터 10만 척 정도 거리의 거대한 사원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여덟 개의 돌기둥이 허공에 떠 있는 사원을 받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평범하고 소박해 보이는 사원이었지만 흘러넘치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고 대지를 뒤덮는 위엄이 있었다.
고리 모양의 산맥 안쪽에서 불현듯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엄한 종소리는 한 번 울릴 때마다 비와 천둥소리를 뚫고 퍼져나갔고 아래 분지의 슬픔은 더욱 짙어졌다.
곳곳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분지 안의 건물들에서는 수많은 수련자들이 걸어 나왔다.
남녀노소가 뒤섞인 이들은 쏟아지는 비를 피할 생각도 없는 듯 그저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묵묵히 사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뺨을 타고 비와 뒤섞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원 위에는 도포를 입은 노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자애롭고 선한 눈빛이었으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노인 앞에는 네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 쌍의 중년 남녀와 두 노인이었다.
이들 또한 매우 슬픈 표정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짙은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용모가 수려한 여인은 결연하고 굳세어 보였지만 지금만큼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은 뺨을 타고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나의 생이 끝나가는구나. 허나 그리 슬퍼할 것 없다. 수련자들에게도 끝은 있는 법이니⋯⋯. 이 스승이 떠나고 나면 우리 귀원종(歸元宗)은 너희 넷이 책임져야 한다.”
노인은 자애로운 눈으로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스승님!”
이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간 여자는 왈칵 눈물을 터뜨리며 스승을 바라보았다.
세 사내 역시 슬픔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내 결국 쇄열기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만은 아쉽구나. 쇄열기에 이르렀다면 8급 귀원종으로 여행 갔을 때 주종(主宗) 소속 수련자에게 내 수명을 모두 흡수당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불만스러운 기색이 얼굴에 살짝 드러났으나, 그보다는 체념의 빛이 더 강했다.
“스승님, 그 자도종(紫道宗)은 우리 막라 대륙에 진을 배치하고는 몰래 연맹성역으로 향했습니다. 한데 그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주종에서 우리 귀원종에 화풀이를 하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중년 사내가 바르쥔 주먹을 떨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포 차림의 노인은 한동안 침묵했다. 죽음의 기운이 그의 온몸에 드리운 상태였다.
“주종에서 그리 한 데는 분명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의문을 품지는 말아라. 불만이 있거든 1백 년 후, 주종에 속한 모든 분종(分宗)이 모이는 시합 날, 우리 귀원종이 수천 년간 이어져온 꼴찌를 벗어나게 해라. 그럼 이 스승은 구천에서라도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네 사람은 씁쓸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1천 년마다 열리는 분종 간의 시합은 운해성역의 성대한 의식이었으며 운해성역 내의 모든 종파가 참여하는 행사였다. 그리고 이 성대한 의식에서 귀원종은 매번 꼴등에 그치고 말았다.
도포 노인의 몸에 드리운 죽음의 기운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숨을 깊게 내쉬더니 장막을 드리운 듯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다가 해골 같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꼭 살과 피가 모두 뽑혀 나간 듯 비쩍 마르고 흉측해진 손이었다.
노인이 그 손으로 저물공간을 소환하자 그 안에서 거무스름한 보랏빛의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머리를 쏙 내밀었다. 거대 구렁이가 나타난 순간, 사원에서는 더더욱 짙은 위엄이 풍겼다.
하지만 구렁이는 무척 피곤해 보였고 슬픈 눈빛으로 도포 차림의 노인 곁을 맴돌며 날름거리는 혀로 노인의 몸을 핥았다.
“내가 죽고 나면 이 5급 자목(紫目) 구렁이는 우리 귀원종을 지키는 종수(宗獸)가 될 것이니, 너희들 모두⋯⋯ 이 녀석에게 잘 대해줘야 한다.”
노인의 얼굴은 창백한 상태에서 벗어나 비정상적으로 붉어져 있었다. 표정도 전보다 한층 더 힘차 보였으나 그것은 마지막 불꽃처럼 그 끝이 한층 더 가까워졌음을 뜻했다.
“이제 내 마지막 생기로 택령법(擇靈法)을 이용해 우리 귀원종의 반령자(伴靈子)를 선택하겠다. 산골 소년에 불과했던 나도 이렇게 스승님의 손으로 선택됐지.”
노인은 기억을 더듬으며 작게 웃더니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눈을 감았다.
귀원종의 역대 장문인들은 객사 당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생이 마지막에 달한 순간 모든 것을 불태워 택령법을 발휘했다. 이를 통해 앞으로 수백 년 혹은 수천 년간 이 막라 대륙에서 귀원종에 큰 도움이 될 사람을 나타나게 한다.
노인 앞에 침통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네 사람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매우 현묘한 이 신통술의 정확한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도포 노인 역시 알지 못했다. 그저 택령법이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이 신통술이 매번 성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수없이 오랜 세월 동안 성공한 것이 단 두 번에 지나지 않았다. 실패의 이유는 그 신통술을 발휘했을 때 막라 대륙에는 귀원종에 큰 도움을 줄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