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07
비
도포 노인은 체내의 마지막 생기와 원신을 타오르게 했다. 이에 그의 몸에서는 푸른 화염이 일어났고 그는 네 명의 제자가 보는 가운데 점차 흩어져 사라져갔다.
그러는 중에도 그의 신식은 전에 없이 또렷하고 강력해졌다. 마치 현묘한 규칙을 깨달은 것만 같았다. 이 규칙 아래 그의 신식은 반령자를 찾아 막라 대륙 전체로 뻗어 나갔다.
허나 탐색을 거듭해도 끝끝내 반령자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에 노인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리라는 예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사원에 놓인 그의 몸은 푸른 화염으로 뒤덮인 채 타올라 이제 머리만 흐릿하게 남은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질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강력한 신식이 막라 대륙 북쪽의 밀림에서 피어난 빛을 감지한 것은…
그는 밀림에서 연맹성역으로 이어지는 전송진이 있는 밝게 번득이는 것과 그 안에서 하얀 인영이 하나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깊은 밤, 그 인영의 하얀 머리가 나풀거리던 순간, 세상을 때리듯 쏟아지던 비는 바르르 진동하기 시작했고 요란하게 내리치던 천둥도 겁을 먹은 듯 일제히 흩어졌다.
“저⋯⋯ 저자⋯⋯?”
도포 노인의 신식에도 격렬한 파동이 일었다. 여태 이렇게까지 또렷한 적 없던 신식으로 상대를 감지한 순간, 노인은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
‘저자는 운해성역 사람이 아니야!’
그때, 백의의 청년이 고개를 들어 냉랭한 눈으로 하늘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에 천둥번개는 콰쾅 하고 물러났다.
그 눈빛을 본 도포의 노인은 심신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택령법을 발휘함에 따라 현묘한 규칙을 깨달은 노인은 저 청년의 곁에 맴도는 수많은 원혼 또한 볼 수 있었다. 빽빽할 정도로 가득한 원혼들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백의의 청년을 노려보았으나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그 원혼들은 백의의 청년, 한제가 일평생 죽인 이들의 혼이었다.
도포 노인은 격렬한 위기감에 재빨리 신식을 거두었고 이 소식을 최대한 빨리 제자들에게 알리려 했다. 당장 주종에 알려야만 했다.
사원 안, 거의 다 타버린 노인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이 갑작스러운 거동에 네 제자들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북쪽⋯⋯.”
그러나 그 두 글자를 내뱉은 순간, 노인의 원신은 무너져 내렸고 신식은 허상으로 흩어졌다. 세상에서 그의 흔적이 모두 다 사라져갔다.
노인은 사라지기 직전의 순간, 발버둥 치듯 다시 입을 열었다.
“백발⋯⋯.”
네 명의 제자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스승이 무(無)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생이 다하기 전 그가 힘겹게 전달하려 했던 네 글자만은 그들의 기억에 깊게 남았다.
귀원종 안에서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분지에서 흘러나온 울음소리와 한데 섞여 흩어졌다. 슬픔과 아쉬움, 서글픔 따위의 감정을 품은 채⋯⋯.
“귀원종의 제자 전원은 막라 북쪽으로 가 수련자의 자질을 가진 이를 찾는다. 나이는 관계없다. 백발인 자에 주목하라!”
★ ★ ★
막라 대륙 북쪽 밀림, 한제는 하늘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었다.
쏟아지는 비는 연맹성역에 있었을 당시 그의 몸에 쌓였던 눈을 녹이며 옷을 적셨고 이내 지면으로 흘러내렸다. 연맹성역의 눈과 운해성역의 비는 더 이상 분간할 수 없게 뒤섞였다.
“떠날 때는 눈이 배웅하더니 도착했을 때는 비가 맞이하는군. 훌륭해.”
운해성역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중얼거린 한제는 밀림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밀림을 가로지르던 한제는 바닥의 진흙탕에서 이리저리 오가는 뱀들과 주먹만 한 두꺼비가 폴짝 뛰어오르는 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탁삼이라면 두 개의 계 사이에 놓인 장벽 정도는 충분히 꿰뚫을 수 있다. 이대로는 더 이상 숨을 곳도 사라지게 될 거야. 최대한 빨리 이곳에 적응하고 본체가 삼손칠겁을 통과하기를 기다리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자.”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운해성역 사람 신분으로 이곳에 잘 녹아들어야 하는데⋯⋯.”
연맹성역의 눈이 이곳의 비에 잘 녹아들었듯 자신도 그래야 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그의 몸은 점점 왜소해지기 시작했고 머리카락도 천천히 검게 변해갔으며, 얼굴에도 미세한 변화가 생기더니 평범한 인상이 됐다. 넋을 잃은 서생 같은 외모로 그는 비를 뚫고 밀림을 천천히 벗어났다.
★ ★ ★
막라 대륙의 우기는 몇 달이나 지속되다가 대지가 완전히 축축해지고 뼛속이 시큰시큰해진 느낌이 들 때가 되어서야 비는 멈추곤 한다.
이곳 수련자나 일반인들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에 일찍이 익숙해진 상태였다.
막라 대륙 수련자 대부분은 우기 동안 폐관수련을 하거나 대륙 밖으로 나가 마수들을 사냥했다.
막라 대륙 유일의 종파인 귀원종에서는 이번 우기에는 모든 제자를 대륙의 북쪽으로 내보냈다.
한편 일반인들은 우기 때면 집안에 따뜻한 화로를 피워놓고 창밖으로 비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겼다.
북수촌(北水村)은 그 이름처럼 막라 대륙 북쪽 빈곡 밀림에서 1천 리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밭을 경작해 먹고살았고 더러는 빈곡 밀림 주위에서 사냥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기가 되어 물웅덩이가 곳곳에 생기면 모습을 드러내는 물두꺼비는 큰 도시에서는 비싼 가격을 주고도 구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에 북수촌의 사람들은 우기가 될 때마다 경험 있는 사람들끼리 조를 짜서 물두꺼비를 잡으러 빈곡 밀림으로 향했다.
우기가 이어지는 몇 개월 동안 네댓 번 정도 물두꺼비 잡이에 나서는 이들은 한 번 나갔다 올 때마다 큼지막한 자루를 하나씩 짊어지고 돌아왔다.
이들이 돌아오면 가족들은 도롱이를 입고 뛰쳐나가 맞이했고 따라붙은 아이들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아버지나 형, 삼촌, 할아버지가 자루에서 물두꺼비를 한 마리 꺼낼 때마다 환호성을 질러댔다.
한데 이번에 물두꺼비를 잡으러 간 사람들은 사람까지 하나 달고 돌아왔다. 무척 평범해 보이는 청년은 약간 마른 편이었다. 이 청년은 비를 흠뻑 맞은 채로 누군가 둘러준 도롱이를 입고 묵묵히 서서 감개무량해 하는 것 같기도 기억을 더듬는 것 같기도 한 눈으로 마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 아우, 이곳이 우리 북수촌이라네. 일단 여기서 며칠 머물다가 우기가 끝나면 그때 춘성(春城)으로 가라고.”
들고 있던 자루를 옆에 있는 사람에게 건넨 도롱이 차림의 사내가 말했다.
평범한 외모의 청년, 한제가 엷은 미소를 띤 채 포권을 하며 고맙다고 하자 사내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난 배움이 짧아 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네.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고는 해도 우린 이미 벗이나 다름없지. 그리고 벗이라면 이렇게 겸손하게 굴 필요는 없네. 비가 많이 오니 얼른 들어가자고. 여보, 얼른 방 정리 좀 해둬. 당분간 천 아우가 머물러야 하니까.”
도롱이를 걸친 사내 곁에 서 있던 여인은 한제를 힐긋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 낯선 사내의 내력도 묻지 않고 얼른 들어가 방을 정리하고는 깨끗한 이불을 꺼내놓았다.
마을에서 명망이 두터운 사내의 집에는 밤이 되자 적지 않은 이웃이 모여들었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을 마시던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한제는 퍽 평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사내들이 웃고 떠들던 중, 마흔이 조금 넘어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술잔을 가지고 한제에게 다가와 멍청하게 웃으며 말했다.
“천 아우, 우리 집 셋째가 그러더군. 자네가 아니었다면 자기는 독사에 물려 죽었을 거라고 말이야. 목숨을 구해준 은혜, 내 절대 잊지 않겠네!”
말을 마친 사내는 술잔을 비웠다.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입가를 훔친 뒤 웃었다.
“술이 별로 세지는 않군요.”
사내는 그 말에 즐거워했고 한제를 데려온 집주인은 아내를 향해 외쳤다.
“여보, 내가 그때 남겨뒀던 북수주(北水酒) 세 동이만 좀 내와. 여기 천 아우한테 우리 북수촌 술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줘야겠어!”
사내의 아내는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밖으로 나갔다가 두 아이와 함께 술 한 동이씩을 들고 돌아와 방 옆에 내려놓았다.
★ ★ ★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 어느덧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우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비는 확실히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매일 잠깐씩 그치기도 했다.
한제는 북수촌에서 환대를 받았다. 이들은 평소 조용하지만 술을 마실 때는 호쾌해지는 이 새로운 이웃을 매우 좋아했고 심지어 의원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노인들이나 고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제의 의술을 경험한 상태였다. 그들은 또한 한제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고 그를 의원이자 목수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이렇게만 지나간다면 한제는 탁삼으로 인한 위기도 수련자로서의 생사도 인생의 속임수도 잊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것들을 잊은 평안한 삶이 기대되기도 했다. 그는 이런 고요함과 평화로운 분위기를 좋아했다. 허나 그는 곧 끝을 보이고는 언젠가 맑은 하늘을 보여줄 우기처럼 이런 평화로운 삶도 사라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 ★ ★
한편, 귀원종 수련자들은 막라 대륙 북쪽을 계속해서 뒤지며 자질이 있는 일반인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소년이건 중년이건 노인이건 가리지 않았으나, 대부분은 자질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이날, 북수촌에도 귀원종의 제자가 찾아왔다. 척 보기에는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수준은 이미 축기에 이르러 있었는데 보이는 모습 그대로의 나이가 맞다면 자질이 무척 뛰어난 자일 터였다.
그는 냉랭한 태도로 북수촌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이에 마을 사람들은 집에서 나와 빗속에서 떨었다. 수련자를 화나게 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옥은 미간을 구긴 채 북수촌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는 지면으로부터 3촌 정도 둥실 떠올라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옷자락은 깨끗했다. 반면 마을 사람들은 비에 흠뻑 젖어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특히 아이들은 덜덜 떨면서 부모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사⋯⋯ 상선님, 비가 차 몸이 약한 아이들은 견디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부디⋯⋯.”
거의 2각이 지나도록 조옥은 끝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자 한제를 거둬준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곁에 붙은 딸아이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옥의 서늘한 눈이 스쳐가자 사내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차게 코웃음을 친 조옥이 냉랭하게 말했다.
“비조차 견디지 못해서야 어찌 수련자가 될 수 있겠느냐?”
그의 코웃음에는 수련자의 수준이 깃들어 있어 천둥처럼 우렁차게 울리면서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한제는 어두운 얼굴로 천천히 조옥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흠칫 놀란 조옥은 호통을 치려다가 표정이 멍하니 변하더니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