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10
백발의 인영이 심드렁하게 오른손을 뻗자 허윤에게 달려들던 검은 원숭이가 비명을 내지르며 쏜살같이 뒤로 물러났고 녀석의 체내에서 펑, 펑 하는 소리가 연이어 울리더니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녀석의 몸은 사방에서 일어난 화염에 휩싸여 제련되어갔다.
허윤은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온 세상을 놀라게 하고 하늘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력한 손짓을 본 그녀는 스승인 여연비조차 이토록 강력하지는 못함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 입적한 사조(師祖)라 해도… 더욱 놀라운 것은, 저 백발 인영은 그런 위력을 너무도 가볍게 발휘했다는 것이다.
백발 인영은 그녀를 힐끗 돌아보더니 멀리 떠나갔다. 그는 이내 사라졌지만 허윤의 눈에는 그 모습이 낙인처럼 또렷하게 남았다.
이때 검은 원숭이는 그녀의 원신에 완전히 녹아내렸고 화들짝 정신을 차린 허윤은 그 혼의 힘을 끊임없이 흡수하면서 점차 기이한, 시(始)의 경지와 같은 상태에 이르렀다.
이 상태에서 도에 대한 이해와 세상에 대한 깨달음은 혼의 힘으로부터 그녀의 심신으로 녹아들었다.
검은 원숭이는 일반적인 마수가 아니라 운해성역에서만 볼 수 있는 영수로 인간처럼 수련도 할 수 있고 세상에 대한 깨달음도 얻을 수 있는 존재였다. 또한 태생적으로 수명도 길어 그 깨달음이 수련자보다 더 깊은 녀석도 적지 않았다.
눈앞의 원숭이 또한 이미 3천 년을 넘게 산 영수로 허윤이 삼킨 입사이혼단에는 그 원숭이의 혼이 녹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허윤은 눈을 떴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밝은 빛이 번득였고 양의의 기운 한 줄기가 맴돌았다.
아직 양의에 이른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미 음의의 경계를 뚫었으니 때가 되어 깨달음을 얻기만 한다면 진정한 양의의 수련자가 될 수 있을 터였다.
허윤은 번쩍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방에는 그녀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하얀 머리를 나부끼던 그 누군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허윤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멍하니 전방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은 백발의 인영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수련자가 아닌 여자의 직감으로 자신이 언젠가 그 인영의 주인을 만난 적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백발⋯⋯ 백발이라⋯⋯.”
그러던 어느 순간, 허윤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사조가 입적하기 전 택령법을 발휘했을 때 하셨다는 말을 스승에게서 들은 기억이 났다.
“북쪽⋯⋯ 백발⋯⋯.”
허윤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곧장 방에서 나와 남쪽 산맥 스승의 침궁으로 향했다.
한편, 창가에 서 있던 한제는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해성역에 이런 단약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군. 강력한 영수일수록 경지의 깨달음에 더 큰 도움이 될 터. 연맹성역이나 나천성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한데 그 순간, 한제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 당시 주작성종에서 묵지가 스승의 선물이라고 보내온 정혼이 떠오른 것이다.
★ ★ ★
운해성역 5급 성역 안, 막라 대륙으로부터 멀지 않은 짙은 안개 속을 길이가 1천 척에 달하는 검은색 마수가 날아가고 있었다.
올챙이 같은 생김새의 이 마수의 거대한 머리는 몸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찢어진 상처처럼 생긴 거대한 입은 안개를 빨아들이듯 수시로 벌어졌다.
그때마다 빼곡하고 날카로운 이빨과 피에 굶주린 듯 사나운 기세가 엿보였고 뒤로 늘어진 가늘고 긴 꼬리가 유유히 흔들렸다.
녀석의 머리 위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보라색 옷의 청년은 무척 준수했으나 사악한 기운이 가득해 매우 포악해 보였다.
청년 뒤에는 한 노인이 공손하게 서 있었는데 수시로 청년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빛은 자상했다.
“난 여연비를 아내로 삼고 귀원종을 내 침궁으로 만들 생각인데 송 숙부, 성공할 가능성이 몇이나 된다고 보나?”
“늙은이가 죽기 전이었다면 5할도 안 됐겠지만 지금은 분명 가능합니다!”
노인은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덤덤하게 답했고 그 말에 청년은 크게 웃으며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이 매우 음탕해 보였다.
★ ★ ★
한제가 귀원종에 온 지도 열흘이 지났다.
허윤은 지난 며칠 동안 북쪽에서 데려온 서른한 명의 제자들을 조사했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그녀의 스승인 여연비 역시 이 일을 중시하며 직접 조사하기도 했지만 역시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했다.
허윤의 마음에 새겨진 그 백발 인영의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또렷해졌다. 깊은 밤중에 좌선을 하다가도 허윤은 불쑥 그를 떠올렸다.
“대체 누굴까?”
이 질문만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느 날 오후, 허윤은 어디론가로 향했다. 내리는 비는 그녀가 만들어낸 무형의 덮개를 타고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뜰 안을 걷던 허윤은 각종 약초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한제의 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가장 처음 의심했던 것이 한제였다.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지켜본 천우는 지나치게 침착하고 덤덤하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의식적으로 한제의 방 쪽으로 걸어가던 허윤은 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이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널 이곳에 머무르게 한 것은 약초를 돌보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지난 며칠 동안 약초를 돌본 건 딱 한 번뿐이었지!”
한제는 책상 앞에서 목간을 읽고 있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허윤은 지난 며칠 동안 한제를 볼 때마다 음의 수준에 이른 수련자답지 않게 마음에 파동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제는 귀원종의 전적각(典籍閣)에서 가져온 목간을 내려놓았다. 별로 귀중한 책이라 할 수 없는 그것은 새로 들어온 제자도 얼마든지 빌려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막라 대륙의 역사와 운해성역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었다.
덤덤한 눈으로 허윤을 한 번 훑어본 한제는 앉은 채 말했다.
“죽은 약초라도 있습니까?”
허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지난 며칠 동안 약초는 전보다 더 울창하게 자랐고 심지어 이전에 죽을 것만 같았던 약초도 다시 살아나는 중이었다.
한제는 더는 아무런 말도 않고 보던 목간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럴수록 허윤은 미간을 잔뜩 구겼다.
그녀가 방에 들어서자 맑은 향기가 맴돌았다. 이 향기를 한제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시 허윤이 좌선을 하던 때 그녀의 체향을 충분히 맡았기 때문이다.
“약초들이 죽지 않은 것과 네가 무슨 상관이냐? 저것들이 잘 자라고 있는 것은 이곳의 영기가 충분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저것들은 대부분 수생 식물이라 우기를 맞아 잘 자란 것뿐이다.”
허윤은 한제를 응시하며 차게 말했다.
“아, 그렇군요.”
한제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윤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손에 들고 있던 목간을 한 장 넘겼다.
“천우!”
허윤의 일갈에 한제는 조용히 목간을 내려놓고는 덤덤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화가 나 훈계를 늘어놓으려 했던 허윤은 한제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하려던 말을 잃고 말았다.
“제가 맡은 일은 그 약초들이 죽지 않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제 일을 한 셈이니 다른 볼일이 없다면 방해하지 마십시오.”
덤덤하게 내뱉은 한제는 다시 목간을 들었다.
한제의 그 눈빛에 허윤의 마음은 이유 없이 떨렸다.
‘설마… 정말로 이자인가?’
허윤은 잠시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다가 아랫입술을 깨문 채 그 방에서 빠져나왔다.
★ ★ ★
깊은 밤, 빗소리와 이따금씩 내리치는 천둥소리가 뒤섞였고 산맥으로부터 귀원종을 향해 불어오는 회오리 소리가 더해졌다.
한제는 목간을 내려놓고 두 눈을 감은 채 고민에 잠겼다.
이 목간을 통해 운해성역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게 됐다. 또한 나흘 전 보았던 연단에 관한 목간을 며칠 동안 곱씹은 끝에 약간의 수확을 거두기도 했다.
그의 두 눈은 목조 건물을 뚫고 위로 솟구쳐 올라 귀원종이 있는 분지의 상공, 여덟 개의 거대한 돌기둥으로 떠받쳐져 있는 허공의 사원을 향했다.
약하지 않은 기운 한 줄기가 그 사원을 맴도는 것을 똑똑히 느낀 한제는 훌쩍 몸을 날리더니 방에서 사라졌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사원을 떠받친 기둥 중 하나의 꼭대기였다.
한제는 침착한 얼굴로 문을 열고 사원으로 들어갔다.
크지 않은 사원에서 몇몇 장식품 외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앙의 거대한 공간의 균열이었다.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보라색 빛은 이 사원을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또한 균열 너머로는 선반이 하나 있었는데 금제의 파동을 드리운 선반에는 세 개의 물건이 있었다.
장검, 옥패, 그리고 단약.
한제가 이 사원에 들어온 순간부터 공간의 균열에서 발산되는 보라색 빛이 더욱 짙어지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그 안에서 쑥 빠져나와 혀를 날름거리며 한제를 주시했다. 구렁이의 두 눈은 더욱 짙은 보라색을 띠었다.
한제는 그 구렁이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구렁이는 낮게 쉭-쉭 거렸지만 두려움에 잠긴 눈으로 슬금슬금 물러났고 한제가 곁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사실 한제는 나흘 전에도 이곳에 한 번 왔었기에 저 구렁이라면 규열기 후기에 이른 수련자와도 충분히 맞붙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허나 그에게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흘 전에는 그리 크지 않은 파동만으로도 구렁이를 거의 죽게 할 뻔했다.
선반으로 다가온 한제가 손을 한 번 휘두르자 그 위에 걸려 있던 금제가 전부 사라졌다. 한제는 그 선반에 놓인 옥패를 들어 응시했다.
나흘 전 이곳에 왔을 때도 본 적이 있던 이 옥패에는 귀원종 고유의 신통력이 깃들어 있었는데 한제는 그 안에서 마수와 연단에 관련된 설명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어서 자세히 살핀 옥패를 원래 자리에 내려놓고는 그 옆의 단약을 집어 들었다. 나흘 전에는 아무런 실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던 단약이었으나 지난 나흘간 연구와 고민을 거듭한 끝에 무언가를 알 것도 같았다. 오늘 다시 이 사원에 찾아온 것은 바로 이 단약 때문이다.
‘옥패의 설명대로라면 이 운해성역의 마수들은 총 13급으로 나뉘고 그 마수들의 혼을 섞어 만든 단약도 그에 따라 13급으로 나뉜다. 이건 귀원종 선조가 대대손손 물려준 8급 이혼단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단약에는 8급 마수의 혼이 섞여 있지 않았다.’
한제의 눈에 아쉬움의 빛이 담겼다.
지난 며칠 동안 옥패의 내용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한 끝에 한제는 운해성역의 단약 제조 방법도 어느 정도 파악했다. 지금 이 사원에 온 것은 자신의 추측이 옳은지 확인해보기 위함이기도 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단약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귀원종의 선조가 남겨준 것이 분명한 이 물건들을 가져갈 수는 없었다.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이 종파에 그런 시련을 안겨주는 것은 그처럼 높은 수련자가 할 짓도 아니었고 성격에도 맞지 않았다. 그저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지개
‘이제 이 운해성역의 연단 방법에 따라 직접 단약을 만들어야지. 그리고 이 성역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최고 수준에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