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13
연꽃을 만지작거리며 자세히 살피다가 옆에 내려놓은 후 이번에는 노적이 남긴 저물대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1백여 개의 많지 않은 선옥과 그 외에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했는데 한제의 시선을 끈 것은 세 개였다. 보라색 옥병과 금색 깃발, 그리고 갓난아이 팔뚝 굵기의 향.
“저물공간은 주인이 죽어버리면 파헤칠 수 없으니 안타깝군. 정열기 수련자의 저물공간에는 엄청난 단약과 법보들이 있을 텐데 말이야.”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단 금색의 작은 깃발을 신식으로 살폈다. 한데 그 순간, 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음산한 바람이 쉭쉭 부는 이 작은 깃발 안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여인들의 혼이 들어 있었다. 여인들은 하나 같이 아름다웠고 그중 몇몇은 절륜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들은 이 작은 깃발에 갇힌 채 비참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또한 그 안에는 뱀 같은 마수도 한 마리 있었는데 그 마수는 여인들의 혼을 삼켜댔다.
한제의 신식이 깃발에 드리우자 퍼뜩 깨어난 마수는 놀라운 기운을 뿜어댔는데 이에 한제의 눈빛마저 굳어졌다.
“이건⋯⋯?”
뱀 마수가 달려들기 직전에 신식을 거둔 한제는 잔뜩 긴장한 눈으로 금색 깃발을 바라보았다.
“극음(極陰)의 기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의 잔잔했던 심신에는 엄청난 파도가 몰아쳤다.
“안타깝게도 완전하지는 않다. 극음의 기운 한 줄기가 마련됐을 뿐. 게다가 그 기운을 사육하는 방식도 잘못됐어. 당시 천운자가 백미를 통해 극양의 기운을 사육했던 것과 다르지 않아. 하지만 어찌됐든 분명한 극음의 기운이다!”
한제는 미간을 문질렀다. 다섯 개의 원소를 가득 채운 뒤 음양을 드러낸 천역주에는 지금 당시 백미를 통해 얻은 극양이 채워져 있었다. 그러니 극음만 마련된다면 천역주를 두 번째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상태였다.
금색 깃발을 든 한제는 눈을 살짝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여인의 혼으로 극음을 사육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다. 당시 천운자는 백미의 몸을 빌려 절정에 달한 극음을 극양으로 전환하여 취했다. 그게 정확한 방법이지. 마찬가지로 완전한 극음을 얻기 위해서는 극양을 절정에 이르게 한 다음에 취해야 해!”
고개를 숙여 손에 들린 금색의 작은 깃발을 바라보던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깃발에 들어 있는 수많은 여인들의 혼은 최근에 봉인된 것이었다.
“정말 터무니없는 짓이로군!”
그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금색 깃발 안에 순간 바람이 일었고 한제의 신식은 날이 선 칼처럼 여인들의 혼을 옭아맨 진을 하나하나 무너뜨렸다.
진들이 쪼개지고 갈라지자 깃발 안에서 울부짖던 여인들의 혼백은 차차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녀들은 하나하나 한제에 묵묵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씁쓸함과 동시에 해방감이 어린 얼굴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음 생일 수도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
혼백들이 흩어지는 것을 한제는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혼백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나자 금색 깃발에 혼자 남게 된 극음의 혼은 낮게 그르렁거리다 도망치려는 듯 깃발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한제가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왼손으로 결인을 그려 한 줄기 금제를 만들어 금색 깃발에 드리웠다. 순간 푸른빛이 번득이더니 극음의 혼은 깃발 안으로 나자빠지면서 성난 포효를 내질렀다.
한제는 그런 녀석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여러 개의 결인을 그려 줄기줄기의 금제로 금색 깃발을 완전히 봉인한 뒤 저물공간에 집어넣었다.
“이 극음의 기운은 사육 방식이 잘못됐을 뿐만 아니라 아직 완전하지도 못하다. 허나 노적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자도종에는 이에 대한 단서가 있겠지.”
이어서 한제는 보라색 옥병을 집어 들었다.
미약한 열기가 발산되고 있는 병 안에서는 한 줄기 힘이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한제가 신식을 뻗자 이 병은 점점 투명해지면서 그 내부를 또렷하게 내보였는데 병 안에서 회전하는 힘 너머로 세 알의 단약이 들어 있었다. 거의 비슷한 크기의, 보라색 빛을 발산하고 있는 세 알의 단약에서는 잔뜩 성이 난 혼의 포효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신식을 거둔 한제의 시선은 뒤이어 갓난아이 팔뚝 굵기의 향에 닿았다. 낯선 물건은 아니었다. 운해성역에서 온 수련자들이 이 향을 이용해 흡혈마수들을 유인해냈던 것을 흡혈마수의 기억을 통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 ★ ★
시간은 천천히 흘러 우기가 끝났고 막라 대륙에는 맑은 바람과 햇살이 드리웠지만 한제는 하루 종일 연단술만을 연구했다.
허윤은 옆방에 머무는 천우에게 상당한 공경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상대가 자신의 심신에 들어와 손짓 한 번으로 도움을 줬던 것을 떠올리면 허윤은 가슴이 뛰었다.
“이건 응쇄초(凝碎草)입니다. 단약을 만들 때 도움이 되는 식물이죠. 저희 귀원종에서 제조 방법을 파악하고 있는 단약 대부분에 들어갑니다.”
천우가 연단술이 발달한 운해성역 수련자에게 기초 상식에 가까운 약초들에 대해 묻자 허윤은 의아했다.
한제는 운해성역의 모든 약초 이름과 약효를 연구하는 중이었다. 특히 그가 알고 있는 일부 약초조차 연맹성역에서와 이름과 달랐기 때문에 가까이 있던 허윤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묵운지(墨運芝), 결운단(缺雲丹)을 만들 때 쓰이는 주요 재료 중 하나입니다.”
한제는 담담한 얼굴로 약초밭에 있는 약초의 이름을 모두 외운 후 물었다.
“여기에 무중화(霧中花)는 없나?”
한제가 약초밭을 둘러보며 물었다. 사원의 옥패에 따르면 6급 이상의 이혼단을 만들려면 흉수의 혼 외에도 중요한 세 가지 약초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무중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중화는 외계 성역의 안개로 뒤덮인 황량한 대륙에서만 자라납니다. 안개가 짙은 곳일수록 많이 난다고 하더군요. 제가 알기로는 저희 귀원종에는 말린 무중화가 딱 세 송이 있는데 모두 이 사숙의 관할 아래 있습니다.”
허윤은 설명을 마친 뒤 한 마디 덧붙였다.
“이 사숙의 연단술은 귀원종에서 가장 뛰어나지요.”
고개를 끄덕인 한제는 허윤은 본 척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약초 몇 개를 채취해 방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허윤은 왠지 마음이 아팠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한제가 막 방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얼른 입을 열었다.
“그 단약을 만드시려면 연단방에 가셔야 할 겁니다. 연단방은 동원에 있습니다. 그곳에는 단로도 있고 지화(地火)를 일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호진도 있으니 만들던 단약이 폭발하더라도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필요 없다.”
한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방으로 휘적휘적 들어갔다.
혼자 남은 허윤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이 약초밭의 약초는 모두 그녀가 힘들게 키워낸 것으로 개중에는 스승이 외계의 흉맹한 흉수들을 맞닥뜨릴 위험을 무릅쓰고 황량한 대륙에서 가져다준 것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의 약초 대부분은 허윤과 여연비의 자산인 셈이었다.
이를 종파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었기에 누구도 감히 이곳의 약초를 탐하지는 않았다. 한데 한제는 이 질 좋은 약초들을 허윤이 지켜보는 앞에서 멋대로 취하면서도 연단방에 가보라는 권유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단약을 만들다가 실수라도 해 폭발하면 집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뜰의 약초들도 상할 터였다. 이에 조바심이 난 허윤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막아설 수는 없었다.
‘흥! 단약을 만들려고 하면서 연단방에는 가지 않으려는 걸 보면 단로는 가지고 있는 모양이지? 높은 수준의 수련자니 나 같은 후배가 눈에나 들어오겠어!’
생각할수록 화가 난 허윤은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한제가 실수해 단약이 폭발하면 최대한 발휘해 뜰의 약초들을 보호할 생각이었다.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한제에 대한 호감이 절반이나 깎여나간 상태였다.
‘거만한 욕심쟁이 같으니!’
특히 방금 전 한제의 표정을 떠올리니 더더욱 화가 치밀었다.
‘연단과 수준은 분명 관련이 있지만 그보다는 경험과 수많은 시도가 중요하다고! 수준이 아무리 높다 한들 첫 번째로 만드는 단약이 성공할 가능성은 절대 높지 않아!’
허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뜰을 지키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불만에는 아랑곳없이 방으로 돌아온 한제는 가부좌를 튼 채 오른손을 휘둘러 뜰에서 뜯어온 약초들을 공중에 떠올렸다. 뒤이어 그가 왼쪽 눈으로 불빛을 한 번 번득이자 순간 화염이 솟아나 타올랐다.
단약을 만드는 데 단로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단로는 약초의 기운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고 열기를 안으로 응축시켜 단약이 고온에서 만들어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허나 한제에게는 그런 문제가 없었다. 세상 모든 불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그는 하얀 화염을 일으켜 주위를 맴도는 화룡을 형성했다. 그의 뒤에 응집된 하얀 화룡은 끊임없이 압축돼 하나의 화염 공이 되었다.
덤덤한 눈빛을 드러낸 한제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한 번 움켜쥐자 그의 전방에 떠올랐던 약초들은 순서에 따라 서로 다른 양으로 나뉘더니 일부는 허공에 남았고 일부는 화염 공 안으로 녹아들었다.
한제가 운해성역에서 처음으로 만드는 단약이었다. 3급 단약에 불과했지만 한제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화염 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약초들은 화염 공 안에서 빠르게 녹아들며 가루가 됐지만 한제의 통제로 완전히 타버리지 않고 서로 다른 약효를 흡수하면서 융합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제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어 저물공간에서 한 줄기 검은빛이 그의 손바닥으로 날아들었다.
그 안에는 올챙이 같은 영수의 혼이 들어있었다. 노적을 따라다니며 일반인이고 수련자고 가리지 않고 피와 살을 씹어 먹기를 즐겼던 이 흉맹한 마수의 혼은 지금 두려움에 덜덜 떨며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한제의 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한제가 손을 휘두름에 따라 마수의 혼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화염 공으로 흡수됐고 단약에 녹아들면서 점차 짙은 약의 냄새가 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한데 그때, 한제가 미간을 팩 찌푸리며 손을 뻗어 그 화염 공에 집어넣더니 단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 안에 녹아들었던 마수의 혼이 그대로 끌려 나왔다. 동시에 반쯤 완성된 단약은 바르르 떨리면서 무너져 내렸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파멸적인 기운을 품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 힘은 단약을 둘러싼 화염에 가로막혀 안쪽에서만 먹먹하게 울릴 뿐이었다.
‘단약이 폭발한다!’
방 밖에 있던 허윤은 그 먹먹한 소리를 듣고는 긴장한 채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한제가 어두운 얼굴로 나타나 뜰에서 약초를 한 움큼 뜯어 다시 들어갔을 뿐이다.
허윤은 그런 상대의 모습에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잔뜩 가라앉은 한제의 얼굴에 감히 따지지는 못하고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 수밖에 없었다.
‘오만한 욕심쟁이 같으니라고! 흥! 이번에도 폭발하고 말 거다!’
황량한 대륙
허윤의 생각은 현실이 됐다. 사흘 동안 한제는 열여섯 번이나 연단을 시도했으나 마지막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했고 그때마다 다시 뜰의 약초를 뜯어서 다시 들어가곤 했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생기 가득하고 파릇파릇했던 약초밭은 이제 황량해진 상태였다. 이를 본 허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갖은 고생 끝에 가꿔놓은 약초밭이라 자기 몫의 단약을 만들 때도 조심스럽게, 아껴가면서 약초를 취했건만 사흘 만에 그 약초들은 거의 바닥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존재는 물론 한제였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호감이 남지 않았고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방문을 벌컥 열더니 막 완성된 단약을 살피고 있는 한제를 노려보았다.
가뜩이나 화가 났던 허윤은 단약 하나 완성했다고 만족한 듯 웃고 있는 한제의 모습에 폭발하고야 말았다.
“이…”
허나 허윤은 이를 악물고 심호흡을 했다.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상대의 수준을 추측해보자면 분노를 억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그녀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타일렀다. 화를 내서는 안 돼, 화를 내서는 안 돼⋯⋯.
그녀는 얼굴 옆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내 단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셨군요, 축하합니다. 제가 한 번 봐도 될까요?”
열다섯 번의 실패를 거듭하면서 약초밭 하나를 거덜 낸 끝에 가까스로 만들어낸 단약이었다. 그러는 동안 열 번이 넘게 융화되고 녹아들기를 반복하면서 마수의 혼은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한제가 빨리 단약을 만드는 데 성공해 자신의 고통을 덜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단약을 바라보던 한제는 감개무량했다. 운해성역의 연단술과 마수의 혼을 녹여 넣는 과정에는 주의해야 할 것이 많았는데 이는 옥패에 설명이 되어 있지 않았다. 단약을 만드는 사람 본인이 알아서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한제는 허윤의 낭창한 몸 뒤로 만신창이가 된 약초밭을 힐긋 바라보았다. 1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것에 무뎌진 그도 약초밭의 몰골에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약초밭의 일은 내가 미…”
“캬악!”
단약을 허윤에게 넘긴 한제는 사과라도 하려 했지만 허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비명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제에게서 넘겨받은 단약을 확인한 허윤은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백발의 인영도 엄청난 힘을 발휘한 손짓도 높은 수준의 선배도 더 이상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힘겹게 키워낸 약초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가며 만들어낸 결과물이 겨우 3급짜리 단약 하나라니!
물론 3급짜리 단약도 양의 수준의 수련자에게는 매우 귀한 것이었지만 그녀의 약초밭이라면 4급 단약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만약 이 사숙이라면 심지어 5급 단약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약초 돌려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