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14
눈시울이 붉어진 허윤은 한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고개를 든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방은 텅 비어 있었다.
★ ★ ★
막라 대륙 상공에 나타난 한제는 코를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허윤의 목소리가 귀에서 맴돌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참! 약초밭 한 뙈기 가지고⋯⋯.”
그는 몸을 훌쩍 날려 한 줄기 긴 빛을 그리며 눈 깜짝할 사이 하늘 끄트머리로 사라졌다.
막라 대륙을 보호하고 있는 빛을 뚫고 나간 한제의 시야에 안개로 뿌옇게 가려진 우주가 들어왔다.
귀원종 사원에서 본 옥패에는 단약 제조 방법과 영수술(靈獸術)뿐만 아니라 막라 대륙이 있는 5급 성역의 성도도 들어 있었다.
한제는 그 성도를 통해 운해성역의 5급 성역을 채운 짙은 안개 속에는 황량한 대륙이라 불리는 곳이 있음을 알게 됐다.
운해성역이나 나천성역의 황량한 수련성과 비슷한 그 대륙은 검은 탑의 보호 없이 짙은 안개로 둘러싸인 흉수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고 매우 진귀한 약초들도 자라났다.
기억 속 성도를 따라 한제는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주를 뒤덮은 안개는 그의 시야를 가리고 신식의 범위도 제한했다. 더구나 한제에게는 낯선 곳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막라 대륙과 비교적 가까운 황량한 대륙에는 흉수들의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귀원종 수련자들의 훈련지가 된 그곳에는 수준이 낮은 마수들만 남아 있었고 약초 역시 거의 뿌리가 뽑힌 상태였다. 때문에 한제는 수련자들이 발길이 닿은 적이 거의 없는, 그보다 먼 곳의 황량한 대륙으로 향했다.
한제는 점점 속도를 높여 이동하는 동안 간혹 안개 속을 스치는 빛줄기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안개 깊숙한 곳에 이르러 있어 신식을 펼칠 수 있는 범위는 1만 척도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그가 정열기에 이른 수련자이기에 가능한 것이었지, 규열기 수련자라면 1천 척이 한계일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제의 신식에는 거대하고 사나운 모습의 기이한 흉수들이 적지 않게 걸렸다. 개중 온몸이 비늘로 덮인, 물고기 같은 흉수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입을 쩍 벌리자 역한 비린내가 풍겼다. 용같이 생긴 흉수도 있었는데 길이는 수백 척밖에 되지 않았으나 녀석은 번개처럼 빨랐으며, 수백 마리가 무리를 이루었다.
노적의 올챙이 같이 생긴 검은 마수들도 드문드문 나타나 짙은 위압감을 발산했다. 하지만 이 마수들은 한제의 신식 범위에 이르자마자 그 큰 몸을 바르르 떨면서 황급히 비켜 저 먼 곳으로 도망쳤다.
질주하던 한제가 불현듯 눈을 번득이며 저물공간을 소환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붕붕 소리와 함께 수십 마리의 흡혈마수들이 나타나 한제 주위를 에워싼 채 기쁜 듯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특히 녀석들의 왕인 보라색 흡혈마수는 잔뜩 신이 난 듯 이리저리 마구 몸을 날렸다.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그 흡혈마수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녀석은 명을 받기도 전에 곧장 돌진했고 그 수하들이 뒤를 따랐다.
성역 안에서는 밤낮은 물론 시간의 흐름도 좀처럼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여정을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한제는 막라 대륙으로부터 이미 한참 멀어진 상태였다. 그는 성도에 위험 지역으로 표시된 황량한 대륙에 점점 가까워졌다.
잠시 후, 거대한 그림자가 그의 신식이 걸렸다. 그 그림자는 우주를 가릴 듯 거대했고 한제가 접근한 순간 어렴풋한 고함을 내질렀다.
눈을 번득이던 한제가 다가갈수록 그 그림자는 점차 또렷해졌고 이내 거대한 대륙이 모습을 드러냈다.
흡혈마수의 등에서 뛰어내린 한제는 안개를 가로질러 대륙에 발을 디뎠다.
우주와 마찬가지로 안개에 뒤덮여 있어서 신식이 없었다면 두 발이 지면을 단단하게 밟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면 대륙인지 우주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을 것 같았다.
사방은 고요했다.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마수들의 포효만이 유일한 소리로 그 소리는 이곳이 평화로운 곳이 아님을 경고하는 듯했다.
땅에는 검은 모래가 깔려 있었다. 한제는 그 위를 느긋하게 나아갔다. 그는 신식을 통해 폐허를 감지했는데 한때는 일반인의 도시였을 것 같은 그 폐허에서는 지금 어떠한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건물들은 허물어져 있었고 벽에는 바람에 말라 굳어지면서 갈색으로 변한 혈흔도 있었다.
그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 폐허의 건물 안에서 훌쩍 뛰어나오더니 피비린내를 풍기는 몸으로 포효를 내지르며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수십 척 크기에 불과했으나 번개처럼 빨라 순식간에 눈앞까지 다가왔다.
허나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곁에 있던 흡혈마수가 날아들어 그 검은 그림자를 덮쳤기 때문이다.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는 곧장 몸을 벌벌 떨었고 흡혈마수는 길고 날카로운 주둥이를 그 그림자에 꽂아 넣은 뒤 쪽 빨아들였다. 검은 그림자는 순식간에 오그라들었다.
흡혈마수는 날개를 흔들며 한제 곁으로 돌아왔으나, 배불리 먹지 못해서인지 불만스러운 모습이었다.
한제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앞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녀석이 그 방향으로 날아갔고 그 뒤로 열 마리가 넘는 흡혈마수가 따랐다.
그들이 날아간 순간 폐허에서는 수많은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수십에 달하는 검은 그림자들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흡혈마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제는 신식을 이용해 저 검은 그림자들이 모두 검은 원숭이임을 알고 있었다. 허윤이 삼켰던 이혼단에 들어 있던 것과 같은 녀석들이었다.
“혼은 남겨놓도록!”
한제의 덤덤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흡혈마수들은 원숭이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강력한 상대라 전투는 순식간에 마무리됐고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는 주위로 수많은 원숭이 마수들이 쓰러져 있었다.
열 마리가 넘는 흡혈마수들은 한제 곁으로 돌아와 삼켰던 원숭이 마수들의 혼을 뱉어냈고 한제는 그 혼들을 모두 거두었다.
짙은 피비린내 때문인지 멀리서 들려오는 마수들의 포효가 더욱 커졌다. 땅에서는 진동이 느껴졌고 하늘에서는 거친 바람이 불어오면서 짙은 안개가 몰려왔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폐허를 거닐며 신식을 펼쳤다. 그러나 약초를 발견하지 못하자 그는 혀를 끌끌 차고는 곧장 걸음을 돌렸다.
그는 어떤 마수보다 더 짙은 한 줄기의 살기를 드러낸 채 안개와 하나가 된 듯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상공에서는 열 마리가 넘는 흡혈마수들이 선회하고 있었다.
거친 살기에 저 멀리서 들려오던 포효는 점차 약해지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졌고 땅을 통해 전해지던 진동도 하늘에서 불어오던 강한 바람도 어느새 멈췄다.
옥패의 성도에 따르면 개원(開猿)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황량한 대륙 위에는 산봉우리가 매우 많았다.
산봉우리들은 안개 속으로 보일 듯 말 듯 드러나 있었다. 겹겹이 자리한 골짜기에서는 흉수들의 낮은 포효가 울려 퍼졌다.
땅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을 지켰을 폐허들이 이 황량한 대륙이 과거에 얼마나 번성했었지 짐작케 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이미 스러지고 흩어진 후였고 남은 것은 쓸쓸해 보이는 광경뿐이었다.
그때, 수많은 산봉우리 중 한곳에서 요란한 흉수의 포효가 들려왔다. 하늘과 땅을 뒤흔들 듯한 기세의 고함은 안개로도 뒤덮이지 않았다.
그 소리가 시작되는 산봉우리는 흑청색이었고 산세가 험준해 꼭 하늘로 비쭉비쭉 솟은 칼날 같았다. 키가 1백 척에 달하는 검은 원숭이 흉수들은 그 산봉우리 위를 쏘다니며 꼭대기로 황급히 몰려들었다.
그 산봉우리 꼭대기에는 거대하고 새카만 원숭이 흉수 한 마리가 사람처럼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녀석의 팔뚝은 천년 묵은 노송처럼 굵어 그 둘레를 재려면 여러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빙 둘러야만 할 것 같았다.
가부좌를 튼 녀석의 앞에는 허벅지에 닿을 정도밖에는 안 되는 보라색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비쩍 마른 나무는 오랜 세월을 지나 보낸 듯했지만 아직 죽지는 않은 상태로 울창한 가지에는 잎들이 가득 자라나 있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이 나무의 잎들은 눈처럼 하얀색이었고 잎맥들이 또렷해 꼭 수정으로 만든 것 같았다. 특히 이 나무에는 주먹만 한 열매가 두 개 달려 있었는데 흑백으로 이루어진 열매는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다.
거대한 원숭이 흉수는 매서운 눈빛을 번득였는데 멀리서 보면 꼭 등불 같은 두 눈에서는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거친 기색이 풍겼다.
녀석의 시선은 짙은 안개를 뚫고 모든 흉수들을 뛰어넘어 산봉우리 중턱에서 수많은 흉수들에 둘러싸인 한 인영에게로 향했다.
녀석이 한제를 본 순간, 한제는 손을 휘둘러 검은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으로 앞을 가로막은 열 마리 이상의 원숭이 흉수를 몰아낸 그는 고개를 들고는 냉랭한 눈으로 멀리서 온 원숭이 흉수의 시선을 마주했다.
“캬오오오!”
순간, 온 세상을 뒤흔들 듯 요란한 포효가 산꼭대기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그 포효에 어린 거친 기색이 사방에서 한제를 압박해왔고 비린내를 품은 바람이 그의 온몸을 찢고 혼을 삼키려는 듯 매섭게 달려들었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눈앞의 수많은 흉수들을 바라보다가 몸을 날려 긴 빛을 그리며 산꼭대기로 향했다.
동원과 통제
상공을 선회하던 흡혈마수들은 포효하며 사방을 둘러싼 독수리 흉수들에 맞섰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살기를 풍기는 독수리 흉수들은 흡혈마수들과 사활을 건 전투를 벌였다.
한제가 쏘아지듯 돌진하는 동안 앞을 막아선 마수들은 그가 심드렁하게 흔든 손짓에 그대로 살점과 피로 흩어졌다.
뒤이어 허공을 움켜쥐자 저물공간에서 수많은 비검이 튀어나와 사방을 에워싼 채 검진을 형성해 회전하면서 그를 방해하는 존재들을 남김없이 죽였다. 마치 한 줄기 하얀 선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피의 비를 뿌리며 산꼭대기로 달려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있던 거대한 원숭이 흉수는 거친 눈빛을 번득이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산봉우리가 바르르 떨렸다.
땅을 박찬 거대 원숭이 흉수는 산봉우리 아래로 훌쩍 뛰어내려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원숭이 흉수는 한제에게도 밀리지 않는 속도로 접근해와 둘은 금방이라도 충돌할 것만 같았다.
검은 원숭이는 매서운 표정으로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순간 한제의 모습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졌다.
주먹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자 검은 원숭이는 재빨리 고개를 휙 돌렸고 한제가 어느새 산봉우리의 거대한 나무 옆에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캬오오!”
원숭이 흉수는 분노한 듯 포효를 내지르며 광풍을 일으켜 하늘과 땅을 연결시킬 듯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해 한제에게 쏘아 보냈다.
한편, 이때 한제는 오른손으로 옆쪽의 거대한 나무를 살짝 두드렸다. 그러자 나무는 순식간에 뿌리까지 흩어지면서 그의 저물공간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순간 회오리가 달려들었지만 한제는 결인을 그린 왼손으로 앞을 가리켜 줄기줄기 살육의 기운을 발휘해 만들어낸 살육의 폭풍으로 맞섰다.
콰쾅!
산봉우리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회오리가 곧장 무너져 내렸다. 허나 살육의 폭풍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 거대한 원숭이와 충돌했다.
쾅!
“크오오오!”
충돌음에 이어 분노와 고통을 품은 고함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거대 원숭이는 문드러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훌훌 나가 떨어졌다.
한제는 곧장 한 줄기 유성처럼 달려들며 두 손가락으로 거대한 원숭이의 몸 곳곳을 두드렸다. 그의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그 거대한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고 원숭이는 비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들바들 떨었다.
한제는 동시에 원력을 원숭이의 체내로 주입해 봉인을 형성했다.
“내 영수가 되겠느냐?”
한제는 두 손가락을 펼친 채 냉랭하게 물었다.
이 황량한 대륙에 머문 지 벌써 7일이 된 그는 적지 않은 흉수를 죽였고 대량의 약초를 손에 넣은 상태였다. 그동안 죽인 흉수들은 신통력을 가지고 있어 수련자라 해도 될 정도였다.
심지어 개중에는 규열기 수련자에 비견할 법한 5급 흉수들도 있었다. 물론 녀석들 역시 모두 혼이 거두어진 상태였다.
눈앞의 이 거대한 검은 원숭이 역시 5급 흉수였다. 하지만 그 가죽이 워낙 두꺼워 한제의 신통력을 직접 맞았음에도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5급 흉수 중에서도 수준이 상당히 높아 6급에 이르기 직전의 상태인 듯했다. 한제가 녀석을 영수로 삼으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캬아아!”
녀석은 대답 대신 격렬하게 포효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 주먹에 일어난 광풍은 고신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닌 가 착각이 들 정도로 막강했다.
한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그는 본체와 합쳐진 상태가 아니라 육체적인 강도로 따질 때 검은 원숭이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그는 일단 주먹을 피한 뒤 다시 신통력을 발휘하려 했다.
한데 그때, 어째서인지 노부자가 탁삼의 팔에 대적할 때가 떠올랐다.
한제는 물러서지 않고 침착하게 체내의 모든 원력을 동원해 손바닥에 응집시켰다. 순간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한제는 눈까지 감은 채 노부자와 탁삼의 대치 장면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