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22
이천매
정열기 절정에 이른 수련자와 맞먹는 위력을 가진 8급 흉수를 발차기 한 번으로 죽이다니…
귀원종의 장로들은 어렴풋하게만 느껴졌던 사숙조로부터 신비롭고 엄숙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한제의 정체에 대한 의심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엄청난 신통력을 가진 수련자가 우리 귀원종에 있었다니! 우리 귀원종 5급 성역의 우두머리로 거듭나는 것도 시간문제겠군!’
여연비를 제외한 세 장로는 흥분한 눈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한편, 주위에 몰려 있던 흉수들은 이제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기 바빴다.
그러나 한제가 곧장 하늘을 누비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빛이 번득였고 그때마다 또다시 한 마리의 흉수가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한제는 막라 대륙 밖의 우주까지 한 바퀴 맴돌았다.
비참한 절규가 우주를 가득 메웠고 머지않아 고신의 피의 결정을 노리고 몰려들었던 흉수들은 학살되었다.
이 학살에 걸린 시간은 2각 남짓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흉수들이 모두 도망치고 나자 막라 대륙의 보호막이 복구 되었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달라진 것은 귀원종 수련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박힌 두려움뿐이었다.
★ ★ ★
귀원종 남원의 약초밭. 이향동과 여연비 그리고 두 명의 노인이 매우 공손하게 서 있었다. 이미 기다린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불쾌해하는 이는 없었다.
남원의 모든 수련자는 다른 장소로 이주된 상태였고 허윤만 여연비 곁에 남아 있었다.
“이 약초들⋯⋯ 모두 사숙조께서 가져온 것인가?”
이향동은 밭의 약초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허윤이 그렇다고 답하자 그의 표정은 또다시 격앙되었다.
약초밭 지하 깊은 곳에는 한제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일반인 크기로 줄어든 본체가 묵묵히 호흡하고 있었다.
본체는 이미 절반 정도 회복을 마친 상태로 가슴팍의 살이 점차 자라나면서 일손양겁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사흘 이 지났을 때, 본체의 가슴팍이 번쩍이더니 살의 겁이 완전히 사라졌다. 고신의 삼손칠겁 중 첫 번째 일손양겁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것이다.
천천히 두 눈을 뜬 본체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발산됐다. 피부는 전보다 더욱 거칠었고 뼈는 더욱 단단해진 상태였다.
끝없는 원력과 기이한 안개를 흡수하고 재난을 넘긴 본체는 수준이 대폭 상승해, 이제 불완전한 모습에서 탈피해 진정한 고신으로 거듭났다 할 수 있었다.
미간에 여섯 번째 별 모양 반점이 나타났다. 이 반점은 약간 흐릿했지만 그럼에도 한제는 매우 기뻤다. 이 상태만으로도 본체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고 6성급 고신이 되었으니 체내에서 자신만의 망월을 키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제 본체와 합체한다면 쇄열기 초기 수련자를 죽이는 것도 이전처럼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쇄열기 중기 수련자에게도 이길 수 있을지 궁금하군!’
한제는 본체가 계속 호흡하면서 체내에서 망월을 키우도록 지하에 둔 채로 약초밭에 나타났다.
때마침 불어온 싱그러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보호막 때문에 유난히 푸른 하늘에는 하얀 구름 몇 조각이 떠 있었다.
약초들을 살피던 한제는 다음 목표를 정했다. 최대한 빨리 운해성역 특유의 연단술을 이용해 자신의 수준을 높일 약을 만들 생각이었다.
“들어와라.”
생각을 마친 한제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자 기다리던 이들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천천히 약초밭으로 들어섰다. 특히 여연비의 뒤를 따르는 허윤은 더욱 긴장한 모습이었다.
“사숙조를 뵙습니다. 이전에는 사숙조께서 돌아오신 줄 몰라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이향동을 비롯한 이들은 약초밭 안으로 들어와 얼른 인사부터 올렸다.
이들은 간단한 대화를 나눈 뒤 분분히 물러났다. 허윤도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에 여연비를 따라 남쪽의 누각으로 향했다.
남원 전체는 금지 구역으로 지정된 상태라 어떤 제자의 출입도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 한제의 분부에 따라 단약 제조법이 담긴 옥패들이 그 앞에 쌓여 갔다.
★ ★ ★
한제가 온종일 단약 제조법에만 몰두하고 있을 무렵, 막라 대륙 저 먼 곳에서는 서낙형의 죽음에 대해 삼엄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6급 성역 모든 종파 수련자는 5급 성역 전역에 퍼져 각 대륙들을 조사했고 심지어 일부는 5급 이하의 성역을 살피기도 했다. 이에 따라 옥패와 단약 제조법에 대한 소문이 점점 퍼져나가면서 결국 7급 성역, 심지어 8급 성역의 눈길까지 끌게 됐다.
줄기줄기 빛들이 7, 8급 성역을 빠져나와 5급 성역의 봉쇄된 황량한 대륙으로 향하고 있었다.
운해성역 가장 깊고 가장 짙은 안개가 떠다니는 곳은 쇄열기 수준 수련자가 신식을 발휘한다 해도 5백 척 남짓이나 겨우 살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또한 그곳에는 운해성역에서 가장 강한 흉수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안개 속에 거의 녹아드는 신통력을 발휘해 몸을 숨긴 채 천도의 규칙을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하는 녀석들도 있다. 이런 녀석들은 누군가가 건드리지 않는 이상 먼저 공격하는 법이 없었다.
그곳에 있는 많지 않은 수련성은 눈에 거의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수련성들의 힘은 그야말로 놀라워, 제아무리 강력한 흉수들도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바로 운해성역의 9급 성역이었다.
그 가장자리에는 일곱 개의 수련성이 북두칠성처럼 배열되어 있는데 각 수련성 사이에는 층층이 보호막이 설치되어 있어 서로 차이는 거의 없어 보였다.
그 북두칠성의 머리에 자리한 수련성을 둘러싼 수백만 개의 보호막 아래에는 초원이 하나 있었고 그 중앙에는 구름을 뚫을 듯 높이 솟은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한 수련자 형태의 조각상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을 욕하고 있는 듯했는데 형용하기 어려운 위엄이 어려 있었다.
초원은 고요했다. 많지 않은 작은 영혼들만 이따금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한데 저 먼 하늘 끄트머리에서 한 줄기 빛이 빠르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용모가 수려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남색이었다. 이런 머리색을 가진 사람은 운해성역 전역을 통틀어 이 여인 한 명뿐이었다.
9급 파천종의 이천매. 다섯 살 때부터 수련을 시작해 일곱 살에 축기, 열아홉 살에 결단, 스물여섯 살에 원영, 서른일곱 살에 화신, 마흔다섯 살에 영변, 예순한 살이 되었을 때 문정기를 돌파하며 단 백 년 만에 음의의 절정에 이른 천재.
또한 그녀는 이후 파천종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4백여 년 정도의 수련을 통해 규열기 절정에 다시 3백 년의 수련을 더해 정열기 중기의 수련자가 되었다.
여기서 또 5백 년이 지나자 파천종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쇄열기 수련자로 등극하더니 이후 1200년의 수련을 통해 쇄열기 후기에 이렀다.
운해성역에서 이천매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제자 이천매, 사조를 뵙습니다!”
조각상 앞에 도착한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마묵의 옥패가 나타났다. 네가 5급 성역에 좀 가봐야겠구나. 가능하다면 그 옥패를 손에 넣은 자를 찾아 옥패와 함께 데려오너라.”
노인의 목소리가 조각상으로부터 흘러나오면서 줄기줄기 파문을 이루었다.
이천매는 공손하게 대답한 뒤 곧장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떠난 조각상 안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온몸 곳곳이 썩은 상태인 노인은 기억에 잠긴 눈빛으로 한참 후에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마 사형, 어쩌면 당시에 스승님께서 잘못하신 건지도 모르겠군.”
★ ★ ★
막라 대륙은 고요했다. 한제는 온종일 연단에만 몰두했다. 그 와중에 짐승 뼈에 기록된 단약 제조법도 상세히 연구해보았으나 진전이 없었다.
그 뼈에는 해당 단약의 효능도 기록되어 있었지만 진실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더구나 필요한 약초들 중 대부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나마 귀원종의 책들을 살핀 후에야 약간의 단서라도 얻을 수 있었다. 그중 세 개의 약재인 성변목(星變木)과 용성초(龍腥草), 쇄멸화(碎滅花)는 모두 수만 년 전 존재했던 것들로 당시에도 매우 희귀했고 지금은 거의 절멸된 상태였다. 다만 책에 따르면 8급 주종 안에는 약간의 성변목이 있을 거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차공단을 제조하는 데에는 13급 절정에 달한 흉수의 혼이 아홉 개나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다 융합시킨 뒤에야 단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단약 제작 성공률은 희박했을 것이다.
한데 단약을 제작할 때는 이 제작 방법이 기록된 짐승의 뼈도 넣어야만 하는데 한 번 실패할 때마다 뼈의 색은 조금씩 어두워지며, 칠흑처럼 어두워지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고 한다. 반면 성공할 경우 이 뼈는 곧장 단약의 일부로 녹아든다는 것이다.
한제는 손에 든 짐승 뼈를 바라보았다. 아직 칠흑빛은 아니었지만 다소 어두운 빛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회가 몇 번 남지 않은 듯했다.
“대체 이 뼈가 어떤 흉수의 것인지 궁금하군. 어쨌든 단약의 효능이 사실이라면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하지.”
한제는 짐승 뼈를 잠시 더 살피다가 저물공간에 집어넣었다.
이어서 단약 제조법과 함께 얻은 옥패를 신식으로 훑어보던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이내 저물공간에서 독을 쓰던 노파의 원신을 꺼냈다.
그가 몇 번 두드리자 노파의 원신은 그때마다 경련을 일으키며 눈에 띄게 허약해 졌다. 이어서 한제는 오른손을 노파의 원신 정수리에 얹고 신식을 주입해 수혼술을 발휘했다.
노파의 기억들이 하나둘 흘러들었다. 오독문의 연독술(煉毒術)을 비롯해 그녀의 일평생을 하나하나 훑던 한제는 마침내 단약 제조법과 옥패에 관련된 부분을 찾았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한제는 잔뜩 허약해진 노파의 원신을 저물공간에 돌려놓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노파의 기억 덕에 그는 1만 8천 년 전 운해성역의 파천종에서 있었던 일과 이 옥패의 효과를 알게 됐다.
이 옥패는 신통술이나 공법에 관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파천종 신분을 상징하는 영패로 그 안에는 표식이 하나 남아 있었다. 1만 8천 년 전 파천종 장문인의 대제자가 남긴 표식이었다.
그의 이름은 사마묵.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1만 8천 년 전 파천종의 차기 장문인이 되었을 그는 짐승 뼈에 적힌 단약 제조법을 가지고 일부 사람들과 함께 사라진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9급 성역이었던 파천종은 그렇게 사라진 자들에 대해 복잡한 마음이었다. 이에 떠나갔던 이들이 끔찍하게 죽거나 다쳤고 결국 실종됐다는 소식을 알게 됐을 때, 당시 파천종 장문인이었던 사마묵의 스승은 수만 년간 이어질 명령을 하나 남겼다.
“사마의 영패를 찾아낸 자가 파천종으로 돌아온다면 현임 장문인의 제자로 삼아라!”
이 명령은 운해성역 전체로 퍼져나가며 단숨에 수많은 수련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파천종 장문인의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에 사마묵을 비롯한 이들이 사라졌던 곳부터 탐색을 시작했지만 누구도 단서를 발견하지 못한 채 결국 소동은 점점 잠잠해졌다.
허나 그 잠잠함은 오독문이 화청종에 심어놓은 첩자가 서낙형의 거동과 추측을 보고하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오독문에서는 이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기도 했고 진실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사실 확인에 나섰는데 한제가 처리한 노파가 바로 그중 하나였다.
단약을 삼키고 도를 생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