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28
한제가 소매를 크게 휘두르자 빗물이 휩쓸리며 검은 구름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검은 구름은 무너져 내렸고 빗방울 역시 수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자네가 빗물의 운명을 바꾼다면 자네가 곧 하늘의 뜻이 되는 거야. 마찬가지로 하늘이 죽게 하고자 하는 사람을 자네가 살린다면 자네가 바로 하늘의 뜻이 되는 거지. 이게 나의 답일세.”
한제의 단호한 목소리를 끝으로 사방은 고요해졌다.
멍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는 노운종은 심신에 묵직한 종소리가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상대의 말을 하나하나 심신에 새기면서 노운종은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대에게 깊이 감복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이천매는 멍한 눈으로 한참이나 하늘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여 형의 도에 깊이 탄복했습니다.”
동시에 그녀는 저물공간에서 단약 하나와 옥패를 꺼내 한제에게 건넸다.
“10급 흉수의 혼을 담아 절반을 완성한 단약입니다. 구체적인 약초와 연단 방법은 옥패 안에 적혀 있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하늘이란 무엇입니까?”
한제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일각 정도 지났을 때, 한제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가 묻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도로군.”
이천매는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건 나 역시 줄곧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지. 일찍이 답을 얻기는 했으나 돌이켜보면 그 답 역시 완벽하지는 않은 것 같네.”
“여 형께서 이전에 얻으셨다는 답은 무엇인가요?”
이천매는 잡티 하나 없는 맑은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곁에 선 노운종은 저 두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듯해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저물공간에서 술 한 동이를 꺼내 들이켰다.
“난 물고기고 도는 그물이며, 강은 하늘이라, 그물을 던지는 어부가 바로 운명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답이었지.”
한제의 느릿한 답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 순간, 노운종은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사색에 잠긴 그는 한참 뒤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로 술을 한 동이 더 소환해 한제에게 건넸다.
한제는 말없이 술을 건네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긴 한숨을 내쉰 노운종은 복잡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상대에게는 자신을 좌절하게 만드는 기세가 있었다.
‘나의 자식은 분명 죽었지만 이런 사람의 손에 죽은 것은 그저 녀석의 운이라 할 수 있겠군.’
노운종 역시 보통 수련자는 아니었다. 그는 한 모금 술을 들이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천매는 눈썹을 살짝 구긴 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미간을 가볍게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개미이고 도는 산이며 의지는 하늘이라, 하늘이 분노하면 도는 그 하늘을 따라 움직이고 개미가 분노하면 그 역시 산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고 하셨지요.”
그녀의 말에 한제의 눈이 점점 밝은 빛을 띠었다. 그러더니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다른 답을 내놓았다.
“도는 그물도 아니고 산도 아니다. 오히려 생각이라 할 수 있지. 이 생각은 사람으로 인해 바뀔 수 있다. 그것을 그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산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것이지.”
한제의 말에 노운종 역시 깨달음을 얻은 듯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도가 생각이라고? 사람이 사람이라 불리는 것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지. 육신에서 벗어나 세상에 녹아들고 알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어.”
그 말에 이천매가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 형의 말씀은 정말 독특하군요.”
세 사람은 시간의 흐름마저 잊은 듯 이 약초밭 안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살기등등했던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낮이 가고 밤이 찾아오면서 휘영청 달이 떠 약초밭을 비추었다.
한편, 그 무렵 막라 대륙 밖에서 호랑이 영수를 탄 채 기다리고 있던 노인은 초조함에 점차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수준 높은 종주가 그것도 이천매와 함께 갔는데도 어째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이를 악물고는 호랑이 영수를 몰아 30여 명의 자도종 제자들과 함께 막라 대륙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이 방어막을 뚫기도 전에 위엄 어린 노운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물러나라! 내 분부 없이는 반 발짝도 들어와서는 안 될 것이다!”
노인은 흠칫 놀라 멈춰 서더니 얼른 공손하게 포권을 하고는 호랑이 영수를 뒤로 물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느덧 아침 햇살이 드리웠다.
한제는 노운종을 훑어보았다. 그는 말없이 술을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도는 생각과 같다는 답밖에 할 수가 없겠군.”
한제는 이천매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이천매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제 궁금증을 풀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세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은 나중에라도 확실히 알게 되시면 알려주십시오. 저는 앞으로 다른 이들에게 그 질문을 하지 않을 겁니다.”
한제는 말없이 이천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운종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제에게 포권을 했다.
“여 도우, 밤새 나눈 이야기로 이전의 원한은 모두 사라져 버렸네! 허나 음선번(陰仙幡)만은 돌려주었으면 하네!”
한제는 덤덤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네⋯⋯.”
노운종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쓰게 웃었다.
“여 도우, 음선번은 우리 자도종의 것이 아니라 주종에서 빌려준 것이야. 1백 년 후에는 돌려줘야 한단 말이네. 1백 년 후 주종에서 그것을 찾아온다면 음선번이 자네에게 있음을 알릴 수밖에 없어.”
“주종의 물건이라고?”
한제는 덤덤하게 물었지만 사실 마음이 살짝 동요했다.
“그렇다니까! 됐네, 자네가 돌려주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노운종은 이천매를 힐끗 살폈지만 그녀는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노운종은 씁쓸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천매에게도 포권을 하고는 떠나갔다.
잠시 후, 이천매는 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옥피리를 입가로 가져갔다.
우아하고 청아한 피리 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을 착 가라앉게 만들었다. 산속을 흐르는 개울 같기도 한, 평온한 그 소리는 맑고도 아름다워 마음속의 때를 씻어내 주었다. 그것은 또한 일곱 빛깔 무지개다리가 되어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단단히 이어주었고 서로 간의 갈등을 말끔히 흩어 없앴다.
한제는 말없이 눈을 감고 연주를 들었다. 마치 주작성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던 여인을 봤을 때처럼, 요령의 땅에서 가야금을 뜯는 눈먼 여인을 봤을 때처럼. 그리고 귓가에 닿은 피리 소리는 이내 마음속의 거문고 소리와 어우러졌다.
9급 배후의 신비로운 성역
얼마나 지났을까?
피리 소리는 점점 흩어져 사라졌고 이천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약초밭의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약초밭을 나서기 직전, 우뚝 멈춰 선 그녀는 뒤를 돌아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 아름다운 웃음에 한제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여 형, 봉래(蓬萊) 대륙에서는 곧 30년에 한 번 열리는 시장과 경매가 진행됩니다. 흥미 없으십니까?”
봉래 대륙은 5급 성역 안에서 매우 유명했는데 그 유명세는 주로 보옥종(寶玉宗) 덕이었다.
보옥종은 5급 성역의 최고 종파로 제자가 매우 많고 실력자들도 적지 않았다. 덕분에 그들이 자리한 봉래 대륙은 봉래 선경이라 불리기도 했다.
막라 대륙의 수십 배에 달할 정도로 매우 큰 봉래 대륙은 사실 대륙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하지 않았다. 한 수련성의 절반이었기 때문이다.
운해성역에는 수련성의 수가 매우 적은 만큼 오직 막강한 종파만이 수련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보옥종도 완전한 수련성을 차지할 자격까지는 없어 반만 얻은 상태였는데 이 절반의 수련성은 2만 년 전 한 선조가 큰 공을 세우면서 9급 귀종(鬼宗)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었다. 때문에 아직까지 어떤 상급 성역 수련자도 감히 이곳에 욕심을 부리지는 못했고 보옥종이 수련성을 보유하는 것을 묵인해왔다.
봉래 대륙은 초승달 형태로 그 너머에 층층이 둘러진 보호막은 부드러운 빛을 발산하면서 사방의 안개를 흩어 주위를 맑고 또렷하게 비췄다.
봉래의 유명세에는 30년 주기로 열리는 시장과 경매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시장이 열릴 때마다 수많은 수련자가 모여들었는데 심지어 상급 성역 수련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달 간 열리는 시장에서는 각종 법보와 단약, 단약 제조법은 물론 영수까지 거래가 됐고 선옥과 원정(元晶)을 화폐로 교환해줬을 뿐만 아니라 단로와 육신의 밀매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봉래 난법과 경매였다.
봉래 난법이란 보옥종이 이곳에 온 수련자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로 자유롭게 싸워 승자가 패자의 것을 차지하는 경기였다.
시장 개시를 임박해 수많은 빛줄기들이 봉래 대륙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특히 단약 제조법과 옥패 도난 사건으로 이번에는 6급 성역 수련자도 대거 참가했고 심지어는 7급, 8급 성역 수련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제와 이천매 역시 그 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며칠만 더 가면 봉래 대륙에 닿을 거예요. 저는 5백 년 전 같은 문파 도우들과 함께 갔던 적이 있는데 제법 인상적이었지요.”
이천매가 약간 상기된 듯한 목소리로 설명했음에도 한제는 덤덤했다.
운해성역의 짙은 안개는 급이 높은 성역으로 갈수록 더욱 짙어졌기에 더 높은 등급의 성역으로 갈 때는 필요한 성도도 훨씬 많았다. 운해성역 전체를 아우르는 성도는 매우 드물었는데 그런 성도는 대부분 개개인이 제작한 것이었다. 우선 수많은 성도를 수집하고 종합해 만든 뒤 실제에 부합한지 검증까지 해야 했다.
한제가 시장에 참여하는 이유가 바로 성도 때문이었지만 그 귀한 성도를 팔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운해성역 특성상 성도는 각 종파의 절대적인 비밀로 여겨질 정도였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들이 자리한 성역의 전체 성도를 가진 종파도 드물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이 거대한 성역에는 수련자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도 적지 않았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황량한 대륙에 존재하는 흉수와 약재, 그리고 많은 자원들은 오직 그곳을 알고 있는 소수의 수련자와 종파만 누릴 수 있었다.
이에 낮은 등급의 성역에 자신들을 지지하는 세력이나 분종을 세우는 것이 8급 이상 성역의 종파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주종의 수련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고정적인 전송진을 구축함으로써 성도를 대신했다.
사실 이천매 또한 종파로부터 각 성역의 분종으로 직접 이동할 수 있는 독특한 전송진을 통해 5급 성역에 다다른 것이었다.
귀원종에도 그런 전송진이 하나 있는데 이런 전송진을 한 번 열려면 선옥이나 원정이 어마어마하게 필요하다. 때문에 주종에서 전송진의 봉인을 풀어놓지 않거나 상응하는 비용을 대신 지불해주지 않는 한 사용하기 힘들었다.
한편, 이동하는 내내 한제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느라 이천매의 말에도 거의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에 슬슬 화가 난 이천매 역시 입을 다물면서 나중에는 둘 다 말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9급 성역은 나와 같은 수련자에게는 매우 신비로운 곳이지. 그곳에는 총 몇 개의 종파가 있는 거지?”
한제가 한참 만에 던진 질문이었다. 사실 낮은 등급 성역의 수련자들에게 가장 높은 9급 성역은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곳이니 이천매로서는 이해 못 할 질문은 아니었다.
이천매는 그동안 거의 대꾸도 안 하던 한제가 정작 자기가 궁금한 건 질문을 던지자 얄밉기도 했으나, 일단 답은 해주기로 했다.
“9급 성역에는 신종, 귀종, 요종(妖宗), 그리고 파천종까지 총 네 개 종파가 있지요. 제가 알기로는 파천종이 가장 약하고 신종이 가장 강하며, 귀종은 가장 신비롭고 요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