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36
“혹 파천종의 옥을 손에 넣은 사람을 찾거든 파천종은 그를 환영할 거라는 말을 전해주십시오.”
말을 마친 그녀는 나비처럼 느릿하게 날아갔다. 검게 물들였던 머리가 본래의 색을 되찾았고 그녀는 그곳에 모인 수련자들의 시선 속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녀는 손에 들린 그림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서로 잊고 지내는 것이⋯⋯ 나은 건가?”
‘서로 잊고 지내는 것이⋯⋯ 낫다.’
한제는 이천매의 떠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그는 저 여인에게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월성에서 분노와 슬픔의 고함을 내지르던 그때 이미 죽었고 나천성역에서 류미가 원한에 찬 아이를 내놓은 순간 이미 갈가리 찢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같은 곤경에 처해 힘들어 하느니 모르는 척 잊고 살아가는 편이 나았다.
홍접과 서자봉, 모은미, 여연비까지… 일평생 마주친 여인 중 이모완보다 아름답고 똑똑하고 출중한 사람은 많았다. 허나 그들은 모두 스쳐 가는 이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현재 한제의 마음에 남은 것은 모완과 류미밖에 없었다.
한제는 감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의 격변으로 살육을 자행하는 악귀와 같은 존재가 되어 두 손에 피를 흠뻑 묻히고 다녀야 했다.
그에게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수련의 길에 오르기 전, 소년 시절에 느꼈던 것이 전부였다. 언젠가 장원급제를 하고 금의환향을 해 예쁜 아내와 함께 부모님을 모시고 살겠다는 꿈을 품었던 그 시절의 감정…
하지만 등 씨 가문으로 인한 격변을 겪고 한 번의 죽움까지 경험하면서 그의 성격은 크게 변해 버렸다. 그때 이후로 그는 수련자가 알아야 할 것은 힘뿐임을 깨달았다.
모완과의 감정도 한제는 알지 못했다. 그 감정을 알고 이해한 것은 모완이 죽고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가는 가운데 수련을 이어가는 한편 끊임없이 기억을 더듬었을 때였다. 모완은 그런 방식으로 한제의 오랜 기억 속에서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깊게, 아주 깊게…
류미 역시 한제의 마음에 남아 있었지만 그 이유와 경로는 모완과 전혀 달랐다. 그녀는 한제의 마음에 고통으로 남은 존재였다. 따져보자면 류미의 승리였으나, 이는 한제의 죽은 마음을 뚫고 그 안에 스스로를 파묻음으로써 거둔 것이었다.
한제의 마음은 죽어 있었고 또 찢겨 있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누군가를 품을 힘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스쳐 간 사람을 잊고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한편, 이천매는 떠나가면서 파란 머리를 드러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운해성역에서 파란 머리를 가진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9급 파천종 소속의 자신이 한제와 같은 비석에 앉아 있었고 그로부터 선물까지 받았다는 것을 이곳의 모든 수련자들에게 똑똑히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를 통해 한제가 신종 사람인지 아닌지를 간접적으로 답한 것과 같았다. 이전까지 주위의 수련자들은 한제가 신종 사람이라는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 의혹의 반 이상을 이천매가 없애준 셈이었다.
“다음 물건입니다!”
이번에 경매로 올라온 것은 곳곳이 파손되어 잔해만 남은 바위였다.
그 바위를 본 한제는 마치 나천성역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 바위는 바로 그때 붕괴된 것으로 그는 겨우겨우 모아 뭉쳐놓은 것을 저물공간에 버려두듯 가지고 있었다.
“선옥 1천 개!”
고요하던 사방의 수련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외쳤다.
“선옥 5천 개!”
한제와 알고 있는 백의의 청년이었다.
“1만 개!”
가장 앞쪽 비석에 앉은 도법문의 장로가 입을 열었다.
저들은 저 바위가 필요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한제가 내놓은 물건임을 알고 있었기에 좋은 관계를 다지고자 나선 것이었다.
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한 줄기의 금제가 날아들어 바위의 잔해에 떨어졌고 그 위로 파문이 일더니 노련한 기운을 발산했다. 그 기운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고 이에 사방의 수련자들은 감탄했다.
“산혼!”
백의의 청년 곁에 앉은 아름다운 여인이 흠칫 놀라며 바위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파손되었군.”
“바위에 선기가 어려 있어! 설마 선계의 물건인가?”
“선옥 2만 개!”
백의의 청년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쇄열기 수련자에게는 쓸모없겠지만 문파 후배들에게는 신통력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될 터. 무엇보다도 저것이 선계의 물건이라면 제련해낼 수 있다!’
도법문의 장로는 잠시 고민하더니 가격을 높였다.
“3만 개.”
그때, 멀리서 구양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4만 개!”
도법문의 장로가 곧장 대응했다.
“원정 1천 개!”
사방은 순간 고요해졌고 결국 바위는 도법문의 장로에게 팔렸다.
그리고 뒤를 이어 나온 물건에 대한 반응은 한제로서는 예상치 못한 수준이었다.
“이번 물건은 갑옷입니다!”
보옥종의 노인이 손을 휘두르자 그의 앞에 검은 연기가 한 덩이 피어오르더니 흐릿한 갑주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한데 검은 연기가 나타난 순간, 수련자들의 표정이 변했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노인과 백의의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여 도우, 자세히 볼 수 있게 금제를 풀어주시게.”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위 때처럼 결인을 그려 갑옷의 금제를 풀었다. 모든 금제가 벗겨지자 검은 연기는 빠르게 수축하고 응집되더니 새카만 갑옷이 드러났다.
그 순간, 하늘을 뒤덮을 듯한 마기가 갑옷으로부터 피어올랐다. 너무도 짙은 마기에 하늘과 땅의 색이 변했고 공중에는 거대한 회오리가 나타났다.
주위가 정적에 휩싸였다. 수련자들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앞쪽 비석의 쇄열기 수준 노인도 놀란 모습이었다.
“신종의 마갑(魔甲)이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노인이 찬 숨을 들이마시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신마갑(神魔甲)! 진짜 신마갑이야!”
“전설대로라면 오직 신종 사람만 가질 수 있다는 신마갑! 저 짙은 마기로 볼 때 4품은 되겠군!”
경매장 전체가 요란하게 들끓었다.
자격
“여 도우, 이 물건, 정말 팔 생각인가?”
도법문의 장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고 그 질문에 시끌벅적했던 경매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동시에 모든 이들의 눈빛이 한제에게로 향했다.
한제는 저 갑옷이 신종과 관련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으나, 내색하지 않고는 툭 내뱉었다.
“원정만 받겠네!”
그러자 도법문의 장로가 곧장 외쳤다.
“좋아, 3천 개의 원정을 주도록 하겠네!”
“난 5천 개!”
한제에게 성도를 팔았던 노부인이 기이한 눈빛으로 갑옷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편, 백의의 청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갑옷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다들 저 물건을 사고 싶어 하는 것은 신종의 신통력을 연구하기 위해서겠지. 저것은 운해성역에서 오직 신종만 가지고 있는 것으로 외부에 유출되는 일은 매우 드물어. 반드시 가져야겠군. 원정 8천 개!”
그러자 도법문의 장로는 약간 망설이다가 이를 질끈 물고 소리쳤다.
“1만 개!”
이는 그가 가진 원정의 최대치였다.
이제 주위에서는 갑옷 자체보다도 그 가격 때문에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 정도 규모의 거래에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끼어들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때, 성별을 분간하기 어려운 목소리가 느릿하게 들려왔다.
“7급 비낙종(秘洛宗), 1만 3천 개!”
모든 수련자의 시선이 지금 막 호가를 한 황의(黃衣)의 청년에게로 향했다.
도법문의 장로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1만 5천 개!”
구양륭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만큼 높은 금액이었다.
“1만 8천 개!”
황의의 청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와 구양륭의 싸움이 시작됐다.
“2만!”
“2만 5천!”
“3만!”
황의의 청년이 벌떡 일어나서는 살기가 넘실대는 눈으로 구양륭을 노려봤다.
“겨우 5급 성역의 보옥종이 그리 많은 원정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이냐!”
그때, 저 먼 하늘에서 노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정은 내 것인데 종파에 보고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목소리의 주인공, 창송자가 구양륭의 곁에 섰다. 이를 본 황의의 청년은 차게 코웃음을 치더니 호기롭게 외쳤다.
“3만 5천 개!”
“4만!”
창송자는 침착한 신색으로 외쳤다. 마치 4만 개의 원정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지금의 상황에 주위의 수련자들은 다소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사실 보옥종의 대장로인 창송자는 심지어 보옥종의 종주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수많은 직계 제자를 거느리고 있어 종주에게도 대항할 만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