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52
그때만 해도 장존이란 아주 먼 존재로만 느껴졌다. 아주 오래 전, 청림이 활동했던 시기의 강자일 뿐이었으니까.
한데 설마 운해성역의 칠채계 어느 산골짜기 안에서 그 이름을 또 듣게 될 줄이야… 이곳은 천운자와도 장존과도 연관이 있는 것인가!
한제의 머릿속에는 청수와 더불어 허무의 공간 속 망월과 싸우면서 무너져 내린 허공의 공간에서 늙은 수련자와 젊은 수련자가 나타났던 당시가 떠올랐다. 바로 계외 사람들이었다. 만약 천역주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그들에게 붙들려 가버렸을지도 모른다.
“당시 그 노인은 천역주를 보고 나를 ‘봉계의 지존’이라 불렀지.”
한제는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칠채정에 박히면 광증이 유발되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는 모양이군. 당시 청수 사형은 선계가 붕괴하기 전 폐관수련을 하던 중 갑자기 발광이 시작됐고 그 이유는 본인도 모른다고 했다. 어쩌면…? 게다가 주작 성황은 청수 사형이 수련 연맹에 간 뒤 다시 발광이 시작됐다고 했어. 분명 뭔가 관련이 있을 거야. 장존이라는 존재와 연관된 비밀이…”
천운자 청수, 사마묵, 장존⋯⋯.
한제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한숨을 푹 내쉰 그는 복잡한 눈으로 사마묵의 유해를 바라보았다. 유해와 주변에는 파손된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이를 통해 상대가 죽기 전까지 발광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했던 시도가 성공적이었다는 뜻.
“이곳이 당시 파천종이 발견한 그 공간의 균열과 이어진 곳일 줄이야⋯⋯. 짐승 뼈에 새겨진 단약 제조 방법이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이기도 하겠지. 그 뼈와 옥패가 어떠한 이유로 유출됐을 테고⋯⋯. 사마묵의 열여섯째 사제가 결국 이곳에서 빠져나가 옥패와 단약 제조 방법을 가지고 운해성역으로 돌아간 것일까?”
의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옥패에서 언급된 이 사람은 과연 누굴까? 사마묵에 따르면 당시 파천종에서는 이 공간의 균열에 대해 알지 못했다가 그의 말을 들은 후에야 이곳을 알게 됐다. 또한 사마묵은 이곳에서 수백 년을 지낸 뒤 그자를 만나게 됐다고 했지.”
한제는 미간을 문질렀다.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고개를 들어 산골짜기의 아홉 동굴을 바라보던 그는 그중 첫 번째 동굴로 다가갔다. 그 앞을 가로막은 돌문을 바라보던 그는 한참 뒤 손을 뻗어 돌문 위에 얹고 체내의 원력을 가볍게 토해냈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돌문은 느릿하게 밀려나기 시작했고 완전히 열린 순간, 오랜 세월 케케묵은 듯한 냄새가 훅 풍겨 나왔다.
1백 척 정도로 크지 않은 동굴의 허공에는 회색 빛이 떠 있었고 그 안에는 갓난아이 주먹만 한 구슬 열 개가 들어 있었다. 각 구슬에는 어두운 문양이 새겨진 채 이따금 번득였다. 다만 번득이는 빛 역시 회색이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 구슬은 본 순간 한제의 심신은 바르르 진동했다. 저것은 창송자가 사용한 바로 그 구슬이었다.
“옥패의 내용이 사실이었군!”
두 눈을 번득이던 한제는 구슬 중 하나를 손에 쥐고 신식을 펼쳐 자세히 살폈다. 순간, 그의 표정이 급변했다. 귓가에서는 우렁찬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천역⋯⋯.”
한제는 원신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손에 든 구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천역주와 거의 평생을 함께해온 그가 잘못 볼 리는 없었다. 크기도 무게도 심지어 기운도 천역주와 똑같았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이 구슬에는 오행의 도안이 새겨져 있지 않고 흐릿한 문양만 번득이고 있다는 것.
“사마묵은 이 구슬들이 누군가 제련해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어! 그렇다면 이것들은… 천역주를 모방해 만들어낸 구슬인가! 누군가가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서 천역주를 만들려고 했던 거야!”
두 눈을 감은 한제는 한참 뒤에야 눈을 번쩍 떴다.
“대단한 패기로군. 설마… 장존일까?”
한제는 자신과 계외, 그리고 장존이 머지않아 만나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어쩌면⋯⋯ 계외 사람들은 이미 내 존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계외의 그 노인도 아직 죽지 않았을 테니⋯⋯.”
한제의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한기가 피어올랐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소매를 휘둘러 열 개의 구슬을 전부 거두고는 하나하나를 살폈다. 각 구슬 안에서 법술의 파동이 느껴졌다. 모두 신통력 하나씩을 봉인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단약
“실패작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버려뒀을 리 없지. 한데 실패한 구슬이 어떻게 신통력을 봉인하고 있는 거지?”
고민하던 한제는 구슬에 자신의 낙인을 남긴 뒤 저물공간에 집어넣었다.
뒤이어 동굴 안을 살폈지만 더 이상 무엇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곳을 나갔다.
그저 동굴에 한 번 들어갔다 나왔을 뿐인데 심신은 거대한 산으로 짓눌린 듯 안색이 어두워졌다. 창송자가 봉계 일곱 번째 진의 영을 소환해 가했던 공격이 계외 사람의 공격 방식과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창송자는 대체 정체가 뭐지?”
한제는 세월금의 장막 너머 일곱 빛깔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허무의 공간에서 계외 사람을 마주쳤을 때, 그곳에서도 일곱 색채의 빛이 나타났었다.
정보를 파악할수록 또렷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한제는 묵묵히 시선을 거두고는 두 번째 동굴로 다가가 돌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동굴의 절반을 차지한 거대한 단로가 있었다. 사방에는 대량의 약초가 쌓여 있었는데 대부분은 바싹 말라 있었고 저물대도 몇 개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터라 지면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상태였고 단로를 손으로 한 번 훑어보니 또렷한 흔적이 남았다.
저물대를 열어본 한제는 흠칫 놀랐다. 그 안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양의 약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한제는 곧장 세 번째 동굴로 향했다.
세 번째 동굴의 문에는 금제가 걸려 있었지만 세월금은 아니었다.
한제는 한동안 그 금제를 살핀 끝에 문을 열 수 있었다.
세 번째 동굴의 바닥에는 진이 하나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원정이 놓인 채 진의 작용을 유지했고 진 위로는 세 개의 약병이 둥둥 떠 있었다. 진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긴 했지만 원정 대부분이 힘을 다한 상태라 언제 작동을 멈춰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한제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이 진에는 세월금의 흔적이 한 줄기 남아 있었는데 약간의 흔적에 불과했지만 진의 위력을 배가하기에는 충분했다.
‘이 진은 저 약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억지로 진을 열려고 하면 곧장 저 단약을 파괴하게 되어 있다.’
한제는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앞의 진을 응시하며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가 저물공간에서 원정 하나를 꺼냈다. 그가 손을 움켜쥐자 원정이 무너져 내리면서 원력이 흘러나와 진으로 녹아들었다.
뒤이어 한제가 오른손을 허공에 휘두르자 지면의 원력은 10척 크기의 마름모형 진을 형성했다. 한제가 다시 오른손을 휘두르자 마름모형 진에 얇은 선이 생겨나더니 지면을 따라 동굴에 배치되어 있던 단약 진과 연결됐다.
작업을 마친 한제는 재빨리 손을 뻗어 세 개의 약병을 그대로 끄집어냈다.
그 순간, 단약 진이 돌연 폭발적인 빛을 뿜어내면서 동굴 안을 환하게 밝혔다. 동시에 파멸적인 기운이 피어올라 약병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중간에 우뚝 멈춰서더니 한제가 그린 얇은 선을 따라 마름모형 진으로 흘러들었다.
세 개의 약병을 거두어들인 한제는 재빨리 물러나 동굴을 빠져나와 산골짜기의 풀밭으로 돌아갔다.
심장이 쿵쾅댔다. 방금 자칫했으면 이 약병들은 그대로 파괴되어 사라졌을 터였다.
“사마묵과 동문들이 남긴 단약이라면 상당히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
한제가 기대감을 안고 첫 번째 약병을 열자 옅은 향기가 피어올랐다. 병에는 붉은 단약 세 알이 들어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흉수의 혼이 발휘하는 파동이 격렬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가 한제의 원신까지 흡수하려 들었다.
그중 한 알을 꺼낸 한제는 유심히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11급 단약?”
단약의 등급을 어렴풋이 파악한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두 번째 약병을 열었다. 그러자 병에서는 대량의 안개가 피어올랐다. 하얀색과 검은색, 두 줄기의 안개가 얽혀 있다가 흩어졌는데 각 안개 속에는 단약이 한 알씩 들어 있었다.
“화무(化霧) 12급 흉수의 혼으로 제련해낸 무혼단(霧魂丹)!”
한제의 두 눈에 광기 어린 기쁨이 드러났다. 화무 흉수의 혼으로 만든 12급 무혼단은 운해성역에서도 극히 드물 정도였다. 오랫동안 원정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화무 흉수를 죽여 그 혼으로 단약을 만들려 하는 사람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한제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마지막 병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나 신식으로 훑어보아도 별다른 점이 없었기에 잠시 고민하던 그는 천천히 병의 마개를 열었다.
그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파동이 훅 끼쳐왔다. 동시에 귀가 아닌 신식으로는 또렷하게 느낄 수 없는 우렁찬 포효가 들려왔다.
12급 흉수를 훨씬 능가하는, 땅과 하늘을 뒤흔드는 소리에 한제는 바르르 진동하며 곧장 병의 마개를 다시 닫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한제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13급 단약!”
한제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떨리는 손으로 두 개의 약병을 거두어 넣은 뒤 첫 번째 약병만 가지고 단로가 있는 동굴로 걸어갔다.
11급 단약은 쇄열기 중기 수준이 되어야만 복용할 수 있었다. 그 전에 복용했다가는 원신이 흉수의 혼을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한데 한제의 실제 수준은 정열기 초기에 불과했기에 11급 단약을 직접 복용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다시 제련을 해야만 했다.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왼쪽 눈으로 소환한 화염을 거대한 단로에 녹여 넣었다. 그러자 단로는 진동했고 허상의 표식이 나타나 천천히 가동되기 시작했다.
한제는 11급 단약 한 알을 꺼내 단로에 넣고 오른손으로 허공을 두드렸다. 그러자 단로의 화염이 폭발하면서 단약을 끊임없이 제련했다.
이러한 2차 제련의 결과는 단로와도 막대한 연관이 있다. 단로가 좋을수록 약의 효과도 최대한 보존되는 것이다.
★ ★ ★
한편, 한제가 연단을 하고 있던 그 무렵.
칠채계 깊은 곳의 짙은 안개로 뒤덮인 어느 장소에는 제단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 돌연 한 줄기 빛이 나타나 사방의 안개를 밀어내며 빈터를 만들어냈다. 뒤이어 한 줄기 균열이 제단 위에 나타났고 그 가장자리로 수많은 전광이 흐르면서 균열을 확대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세 사람이 나타났다.
운해성역 수련자들과는 분명 다른 이들의 미간에는 또렷한 낙인이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앞선 사내의 미간에는 번개 모양의 낙인, 뒤에 선 두 청년의 미간는 각각 초승달과 화염 모양의 낙인이 있었다.
“이곳이 그 공간의 균열인가?”
초승달 모양의 낙인의 청년이 흥분한 듯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세 사람이 칠채계에 이른 순간, 석상의 머리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창송자는 주위를 맴돌던 일곱 빛깔 안개를 거두어 원신을 꽁꽁 감쌌다.
하얀 번개가 그가 자리 잡은 조각상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와 일곱 빛깔 안개 속으로 녹아들어 그의 원신과 결합했다. 이에 따라 창송자의 몸은 점점 실체를 갖추고 육신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이 육신에서는 일곱 색채의 빛이 발산되었고 미간에는 옅은 번개 모양의 흔적 하나가 보일 듯 말 듯 나타났다.
이내 번쩍 눈을 뜬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를 갈았다.
“나를 이렇게까지 몰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몸을 훌쩍 날린 창송자는 한 줄기 번개가 되어 안개를 뚫고 전방의 산맥을 향해 질주했다.
“칠채정에 부상을 입은 상태이니 살아 있다 하더라도 위기에 봉착해 있을 터! 어디에 숨어 있는지만 알아내면 네놈도 끝이다! 크하하하!”
길게 웃음을 터뜨린 창송자는 저물공간에서 구슬 하나를 꺼냈다.
“소환, 역행자!”
그가 혀끝을 깨물어 구슬에 피를 뿌리자 구슬은 일곱 빛깔을 흡수하며 곧장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강력한 빛 한 줄기가 퍼져 나가면서 인영 하나를 나타냈다. 흐릿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두 눈만은 매우 맑은 인영이었다.
“그는 어디에 있지?”
창송자가 분노를 숨기지 않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