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56
한데 네 번째 동굴은 텅 비어 있었다. 잠시 당황한 한제가 자세히 살폈음에도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의아했으나 곧 고민을 접고 다섯 번째 동굴로 향했다. 이곳에는 세월금이 배치되어 있어 해제하기가 까다로웠기에 다른 방법을 택했다.
한제는 결인을 그려 금제의 잔영을 소환한 손을 돌문에 얹었다. 그러자 이내 문이 투명해지면서 동굴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흠?”
동굴들 들여다본 한제는 흠칫 놀랐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옷은 해지고 머리카락은 없으며 멍한 두 눈이 꼭 살아 있는 시체 같은 네 명의 수련자였다. 이들은 동굴 안을 멍하니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랜 세월, 한 번도 쉬지 않고 저렇게 걸어 다니고 있었던 듯했다.
바닥에 배치된 진에서는 부드러운 빛이 발산되어 느릿하게 걷는 자들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진의 중앙에는 옥패가 하나 있었다.
“잃어버린 자!”
한제는 한눈에 네 명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사마묵의 옥패에 기록된 내용을 떠올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여섯 번째 동굴로 향한 그는 같은 방식으로 돌문을 투명하게 만들어 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육신 없이 원신만 남은 그들은 동굴 안을 둥둥 떠다니며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돌문 때문에 들리지는 않았다.
“깨달은 자⋯⋯.”
동굴 안에는 더 많은 금제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저들을 완벽하게 막아놓기 위한 것인 듯했다.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금제를 해제하기 전까지는 나오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곳에도 옥패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어서 일곱 번째 동굴을 들여다본 한제의 두 눈동자는 바짝 졸아들었다.
그곳에는 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얼굴에 핏기라곤 없었다. 노인의 주위에 배치된 금제는 매우 강력하고 촘촘했다.
한제가 그 노인을 본 순간, 노인 역시 두 눈을 번쩍 뜨더니 광기 어린 눈으로 문밖에 선 한제를 노려보았다. 뒤이어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듯 입을 쩍 벌리더니 야수처럼 달려들며 신통력을 발휘해 공격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동굴 내부의 금제가 번득이면서 노인의 신통력을 흡수해버렸다. 노인은 격렬하게 두 손으로 돌문을 후려쳤다.
동굴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고 돌문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도의 계획
한참 뒤, 노인은 지친 듯 한제를 노려보며 물러났고 이전과 같은 자리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곳에 배치된 금제 또한 점차 원상태로 돌아갔다.
“설마 저자가⋯⋯ 역행자?”
이들은 분명 사마묵과 함께 이곳에 왔던 동문들일 터였다. 사마묵은 그들을 데리고 와 동굴에 가둬두고 깨어나기를 기다린 듯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잃어버린 자와 깨달은 자의 동굴에 있는 것은 세월금 옥패일 거야. 사마묵은 그들 중 누군가가 정신을 차린다면 옥패 안의 세월금을 익혀 스스로 금제를 해제하고 나오길 바랐던 거지.”
한숨을 내쉬던 한제는 여덟 번째 동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덟 번째 동굴의 문에는 세월금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일반적인 봉인 수단만 걸려 있을 뿐이었다.
한제는 손을 휘둘러 금제를 거두었다. 그러자 돌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그 순간, 한제는 찬 숨을 들이마셨다.
동굴 안에는 반 토막 난 유골이 들어 있었다.
하반신만 존재하는 유골 위에는 수많은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고 바닥에 그려진 진은 이 유해를 단단히 봉인하고 있었다.
“그 비석 아래에 어째서 유해가 없는가 했더니 여기 있었군.”
그 유골을 살펴보던 한제는 강력한 흡입력이 자신의 심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고는 곧장 뒤로 물러났고 심신과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허나 소득 없이 물러나기는 싫었기에 정신을 집중해 유해를 바라보았다. 유해의 오른쪽 허벅지 뼈에는 갈라진 흔적이 깊게 남아 있었다. 완전히 부러지지는 않았으나 꽤 심각한 상처였다.
한참 뒤, 한제는 대량의 금제로 자신의 심신을 봉한 뒤 창송자의 수정검을 꺼냈다. 그리고 그 수정검에 한 줄기 심신을 드리운 뒤 한쪽에 내려놓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십 척에 불과한 거리였지만 매우 신중하게 걷다 보니 제법 시간이 걸렸다.
유해 곁에 이른 한제는 쪼그려 앉아 유해의 상처 부위에 손을 얹고 신식을 주입했다. 신식을 통한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었다.
신식이 유해에 닿은 순간, 한제의 머릿속에서 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제의 손에 닿은 것은 마치 유해가 아니라 불가사의한 힘으로 가득한 회오리 같았다. 그리고 그의 신식은 그 회오리 깊은 곳에 이르러 있었다.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회오리의 갑작스럽고 강력한 흡입력이 그의 신식을 휘감아 곧장 아래로 끌어당긴 것이다. 그렇게 더, 더 깊은 곳으로…
그렇게 끊임없이 끌어당겨지면서 한제는 여지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세월을 뛰어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에서는 콰쾅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그 소리는 갈수록 격렬해졌다. 만약 동굴 밖에서 누군가가 이 광경을 지켜봤다면 한제가 창백한 얼굴로 격렬하게 온몸을 떠는 모습, 꽉 감긴 눈과 일그러진 표정까지 볼 수 있을 터였다. 오른손은 마구 진동하면서도 유골에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유골이 돌연 금빛을 발산했다. 그리고 그 순간, 유골 위에 새겨진 문양이 그 빛을 억누르려는 듯 검은 빛을 뿜어냈다. 두 가지 빛은 완강하게 서로에게 저항했다.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땅과 하늘을 구분할 수 없었다. 존재하는 것 같기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저 멀리 허공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왔다.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인 듯했으나 전체적으로 흐릿해 분명하지는 않았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혼란스러운 하늘에서 일곱 색채의 빛이 나타나더니 파도처럼 몰아치며 하늘과 땅을 파괴했다. 이에 하늘이 하늘이 아니고 땅이 땅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이곳은 이제 우주였다.
하지만 이 우주는 칠흑처럼 검은 것이 아니라 일곱 가지 색으로 빛이 났다. 눈 닿는 곳 어디든 그런 빛깔이었다.
백의의 노인이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오른손을 휘둘러 전(戰) 자를 허상으로 그려냈다. 이 글자는 노인 주위를 맴돌며 무궁무진한 금빛을 발산하는 한편 주위를 채운 일곱 빛깔을 밀어냈다.
순간 당당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세상이 열리는 순간은 기원이며, 하늘은 시작이고 땅은 끝이다. 내가 수련하던 것은 이 세상의 기원이었다. 기원의 규칙, 일곱 빛깔의 인도 봉인!”
노인이 ‘봉인’ 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순간. 세상을 가득 메웠던 일곱 빛깔은 어떤 힘에 의해 조종되듯 노인을 향해 몰려들었다.
한제의 눈에는 뒤로 휘말리는 세상 속에서 일곱 빛깔의 봉인이 형성되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해서 응집되던 빛은 백의의 노인에 의해 철저하게 봉인되었다.
하늘을 뒤덮은 일곱 빛깔은 세상을 몰락시킬 것처럼 번득였고 그 안에서는 분노에 찬 포효가 들려왔다. 하지만 소리는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 사라졌다.
“전성야, 만약 내가 네게 전 자 족자를 주지 않았다면 내 오늘날 어찌 공령(空靈)의 경지에 이르렀겠느냐! 네가 가진 전혼을 꺼낸다면 그것을 길잡이 삼아 난 전가 노인이 공겁(空劫)에 이르렀을 당시 묻힌 장소를 찾을 수 있다. 난 그 뼈를 취하고 그것과 너로부터 도의 정수를 손에 넣을 것이다! 본존은 그의 열반을 파괴해 천도의 계획을 성사할 것이니라!”
아주 오래된 듯한, 알 수 없는 목소리에서는 점점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한제의 눈에 보이던 세상도 흩어지면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그의 원신 역시 세상과 함께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이때 사마묵의 동굴 안, 한제가 손을 대고 있는 유해에서 뿜어져 나오던 금빛은 검은 빛에 완전히 제압당해 구석으로 몰려 있었다. 검은 빛은 유해에 닿은 한제의 손가락을 통해 그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순간, 한제가 한쪽에 놓아둔 수정검이 번쩍이면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그 검은 빛을 찔렀다. 그러자 한제와 검은 빛이 분리됐다.
“큭!”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며 정신을 차렸고 곧장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유해를 바라보았다. 그의 심신에는 지금 집채만 한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전가의 선조 전성야!”
한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나천성역에서 전가의 선조인 전성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전성야의 천부적인 자질은 매우 뛰어나 어렸을 때 전 자 족자를 손에 넣고 스스로 수련하여 전의 경지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보다 높은 경지를 위해 떠났다고 했다.
그러나 그 뒤로 소식이 완전히 끊겼고 그의 후손들은 그를 찾아 백방으로 떠돌았으나 결코 찾지 못했다.
“그가⋯⋯ 전성야일 줄이야!”
전성야를 죽인 그 사람은 스스로를 본존이라 칭했고 기원의 힘도 가지고 있었다.
“설마… 장존이라는 그 존재인가!”
한제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좀 전의 광경을 떠올리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일곱 빛깔로 이루어진 신통력은 잔야력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훨씬 강력했다. 한 번의 신통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전성야를 압도했으니까.
한제는 입안이 바짝 마른 채 고민에 잠겼다.
“아니다. 전성야가 만약 살해당했다면 그의 뼈 안에 이렇게 또렷한 의지가 남아 있을 리 없지. 그가 정말로 죽었다면 의지는 이미 흩어져 사라졌을 거야. 남아 있다 해도 이렇게 또렷할 수는 없어. 그리고 장존으로 의심되는 그자의 목소리… 갈수록 피곤해 보였지⋯⋯.”
한제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어떤 단서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공령과 공겁… 혹시 세 번째 단계의 경지를 일컫는 것일까? 이전에 전 자 족자를 느끼고 깨달았을 때 한 노인을 본 적 있다. 전 자 족자는 그가 쓴 것이라고 했어. 그자의 수준은 공의 경계에 이르러 있어 곧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고도 했지. 설마⋯⋯ 장존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공겁에 이르러 목숨을 잃었다고 말한 전가 노인인가?”
한데 장존으로 의심되는 노인은 그 전가 노인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전성야를 찾아 족자를 주고 수련하게 한 후 그 혼을 취하려 했다.
“그나저나 천도의 계획이라는 건 또 뭐지?”
생각을 거듭해보니 불명확한 부분도 분명 있었지만 명확해진 부분도 있었다.
“네 개의 비석, 두 개의 온전한 유해. 첫 번째 유해는 전성야의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유해는 전성야의 스승인 전가 노인 것인가?”
한제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족자는 전가 노인이 남겨준 거였어!”
그는 복잡한 눈으로 유골에서 은은하게 번득이는 금빛을 바라보았다.
그의 저물공간에는 총 세 장의 족자가 있다. 그중 두 장은 펼쳐졌지만 세 번째 족자는 전가의 후손에게서 얻은 뒤에도 열어보지 못한 상태였다.
조용히 유골을 바라보던 한제는 저물공간에서 세 개의 빛 덩어리를 꺼냈다. 각 빛 덩어리에는 족자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족자가 나타난 순간 유골에서 흘러나오던 금빛이 격렬하게 번득이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뼈에서 벗어난 빛이 족자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안에 녹아들었고 세 개의 족자는 곧 하나로 합쳐졌다.
기이한 변화였으나 한제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잠시 후 융합이 끝나자 금빛이 동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전방에는 허상의 금빛 전(戰) 자가 떠 있었다. 금빛을 번득이는 글자는 흘러넘칠 듯한 기운을 발산하며 곧장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한제는 곧장 손을 휘둘러 그것을 저물공간에 거두어 넣었다.
“자네는 족자를 얻으면서 은연중에 전가 노인의 후손이 되었고 그런 자네로 인해 전가 노인의 뼈가 묻힌 곳을 장존으로 의심되는 자가 알게 되었지. 수만 년이 흐른 뒤 난 자네의 후손으로부터 족자를 얻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자네의 유해를 보게 되었군.”
한제는 복잡한 눈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동굴을 빠져나가 입구를 봉했다.
아홉 번째 동굴의 문에 배치된 금제를 해제할 수 없었던 한제는 문을 투명하게 만들어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그곳은 일곱 빛깔 안개로 가득해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제는 사마묵의 유해를 한참이나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흡혈 마수가 있는 첫 번째 동굴에 더 많은 양의 원정을 남겨 놓고는 그곳을 떠났다. 이전에 비석을 보았던 곳으로 가서 전성야의 나머지 반쪽 유해를 살필 생각이었다.
방덕재와 창송자의 기억을 손에 넣었기에 그는 칠채계를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됐고 큰 걱정 없이 질주했다.
여러 개의 산골짜기를 넘고 건넌 그는 청의의 노부인을 봉인해둔 진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하지만 진은 이미 열려 있었고 노부인도 사라진 상태였다.
한제는 다시 산맥으로 돌진해 안개로 가득한 구역에 진입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는 깨달은 자들의 속삭임이 들려왔고 이따금 그들이 곁을 스쳐가기도 했다.
깨달은 자들은 모두 이전에 이곳에 왔던 수련자들로 지금은 타인을 위한 재료로 전락한 상태였다. 심지어 저들은 생전에 강력한 수련자들이었다. 이들은 도에 대한 깨달음이 일정 수준에 이르렀지만 경전에 갇혀 깨달은 자가 되었을 터였다.
머지않아 짙은 안개 속에서 거대한 석상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