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6
“으아아아악!”
마혼의 비참한 비명이 한참이나 이어진 후에야 한제는 신식을 거두었다. 마혼은 곧장 온순해져서 벌벌 떨며 한쪽에 섰다. 그의 표정에는 알랑거리는 빛만 어려 있을 뿐 더는 반항적인 기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혼에게 두려운 존재는 오직 한제뿐이었다. 만약 한제가 극의 신식을 조금만 더 펼치고 있었다면 방금 막 맺게 된 그의 금단도 산산조각 났을 것이었다.
“삼켰던 영혼 전부 토해내.”
한제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마혼은 우거지상을 한 채 입을 벌려 유백색의 혼이 담긴 구슬들을 뱉어냈다. 40개가 넘는 구슬을 뱉어내었을 때 그의 금단은 이미 파괴되기 직전에 이르러 있었다.
한제가 손을 휘두르자 43개의 혼 구슬이 하나씩 그의 이마로 들어갔다. 신식의 바다에 이른 그 혼 구슬들은 선무국 결단기 수련자의 영혼과 나란히 섰다.
그때 나타난 번개와 같은 극의 신식이 그 혼 구슬들을 내리쳤다. 그러자 혼 구슬들은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한제는 자신의 신식이 전보다 한층 더 커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몰래 한숨을 내쉰 마혼은 한제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무하네. 이 영혼들은 전부 다 그 망할 비검과 경쟁한 끝에 가까스로 삼켜낸 것들인데… 흥! 내가 원영기 수준을 회복하는 날 네 놈을 꼭 처리할 것이다!’
그때, 한제가 그를 붙잡아 교룡의 힘줄에 집어넣어버렸다. 마혼은 속으로 몇 번이나 언젠가 한제를 처리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지금은 고분고분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영기가 깃든 액체를 몇 모금 마신 뒤 자리에 앉은 한제는 이전에 해동래의 검수가 보인 위력을 떠올리며 잠시 고민하다가 1백 개 남짓의 영석을 꺼내 방어용 귀갑현멸진(龜甲玄滅陣)을 배치했다.
진을 모두 배치한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옆에 있는 돌벽을 쳤다.
콰르릉
그러자 우렁찬 소리를 내며 용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한제는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나와 보니 용의 꼬리 쪽에 모완이 초췌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용의 꼬리에 있는 비늘 하나를 계속해서 쓰다듬고 있었다.
상관묵은 웃음을 지으며 한쪽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손에 거대한 야명주(夜明珠)를 들고 빛을 비춰주고 있었다.
한제의 이번 폐관 수련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그렇다고는 해도 모완은 그동안 한 번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몸을 훌쩍 날려 모완에게 다가갔다.
한제의 모습에 깜짝 놀란 상관묵은 야명주에 영력을 더 불어넣었다. 구슬에서 뿜어지는 빛은 더 밝아졌지만 동시에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배어나왔다.
한제는 집중하고 있는 모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림 같은 눈썹을 찌푸린 채 입술을 살짝 깨물고 비늘의 줄무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하늘거렸다.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한제의 묵직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모완의 손가락이 흠칫 떨렸다. 고개를 들어 한제를 응시하던 그녀는 한참 후에야 조용히 물었다.
“정말 날 데려다 주려고?”
한제는 모완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완은 살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말했다.
“사흘만 기다려 줘.”
한제는 그녀를 힐긋 바라보다가 몸을 훌쩍 날려 용머리 위에 내려앉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모완은 저물대에서 옥패 하나를 꺼내더니 그것을 이마에 얹고 기억해둔 용 비늘의 줄무늬를 옥패에 기록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상관묵에게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밀실 하나만 준비해주세요.”
상관묵은 연거푸 알았다고 대답하며 속으로 자신이 추측이 틀린 모양이라고 중얼거렸다. 저 흉악한 사내와 눈앞의 아가씨는 자신이 생각한 그런 관계가 아닌 것 같았다.
애달픈 얼굴
밀실 안, 모완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눈앞에 지난 몇 년 사이의 일이 하나씩 스쳐지나갔다. 선무국의 결단기 수련자들에게 추격을 받았던 때부터 한제에게 구조돼 함께 도망치던 순간, 화염 마수에게 쫓겨 수마해로 들어오고 석실 안에서 자신은 단약을 만들고 한제는 수련에 전념하던 때.
3년 만에 돌아온 그가 결단기 중기 수련자들의 추격을 받았던 때, 결단기에 이른 한제가 다른 수련자들을 죽여 피바다를 만든 때까지.
모완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고 급기야는 얼굴까지 붉어졌다. 그 뒤로 다른 수련자들을 척살하는 한제를 따라오던 순간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모완의 입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날 취하려 야단이었지. 하지만 그는.”
하지만 곧이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내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어. 나도 그의 이름을 모르고… 어쩌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내 이름이 아니라, 내가 단약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일 거야. 단약은 이미 완성됐으니 이제 더 이상 나는 가치가 없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모완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고 그 복잡함은 점점 가슴을 찌르는 고통으로 변했다. 한 줄기 선혈이 그녀의 눈가를 따라 흘러내렸다.
백옥처럼 흰 얼굴에 흐르는 피눈물. 처연한 아름다움이란 지금 모완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몰랐다.
한참 뒤, 모완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저물대에서 옥패들을 꺼냈다. 총 18974개였다. 거대한 용의 온몸에 달린 비늘의 수와 꼭 같은 개수였다.
당초 해동래의 제자들은 수가 모자라 모든 비늘을 채우지는 못했다. 그 비늘들은 그녀가 지난 보름 동안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온 정성을 들여 하나하나 베껴둔 상태였다. 이 보름 동안의 고생은 그녀의 수명 중 최소한 5년을 갉아먹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깟 5년 정도의 수명을 모완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정신을 집중한 채 하나하나의 옥패들을 하나로 이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 2만 개에 달하는 옥패들을 융합하여 1만 개 정도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1만 개의 옥패들을 다시 5천 개로 융합했다. 그 뒤에도 같은 과정을 반복하여 그런 작업들을 이어갔다.
사흘 뒤, 모완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몸은 안타까울 정도로 말라 있어 바람 한 줄기에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벽을 짚으며 천천히 밀실 밖으로 나왔다.
한제는 손에 뭔가를 들고 용머리 위에서 사흘 동안 잠자코 앉아 있다가 모완이 나오자 들고 있던 것을 챙겨 넣은 뒤 몸을 훌쩍 날려 그녀의 곁으로 내려갔다. 모완의 파리한 얼굴을 본 한제는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도대체 뭘 한 거야? 이거 좀 마셔.”
그는 저물대에서 옥으로 된 병 하나를 꺼내 모완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안에는 영기가 깃든 액체가 들어 있었다.
모완은 그 병을 소중하게 품 안에 넣고는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사형. 난 괜찮아. 이제, 가자.”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한제의 어깨에 기대더니 다시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자 집으로.”
한제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왼손을 모완의 허리에 두르고 몸을 훌쩍 날렸다. 수정 비검이 길을 터주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하늘 끄트머리로 사라졌다.
★ ★ ★
남투성(南鬪城)의 어느 객잔, 매부리코에 그늘진 얼굴을 한 노인 한 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키가 크고 마른 그는 푸른색 갈포로 된 긴 옷을 입고 있었으며, 옷의 아래쪽에는 일곱 송이의 금색 매화가 수놓아져 있었다. 꽃의 중앙에는 붉은색 점도 하나씩 찍혀 있어 보기에 퍽 화려했다.
매화는 본디 청아함을 상징하는 것이고 금색 매화는 약간 속물적인 느낌이 나기도 했지만 중앙에 찍힌 붉은 점 때문인지 청아함이나 속물적인 느낌보다는 기이하고 음산한 느낌이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객잔의 수련자들은 노인이 들어온 순간 조용해졌다. 몇몇의 시선이 노인 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노인은 사방을 둘러본 뒤 창가 자리에 앉아 술 한 병을 주문했다. 잠시 후 주문한 술이 나오자 홀로 따라서 마시던 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가 풀었다. 고민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객잔에서는 다시 아까와 같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한 탁자에 앉은 몇몇 수련자가 작게 속삭였다.
“그 흉악한 자는 발 닿는 곳마다 사람을 죽이다가 결국 투사파의 용산(龍山)에 이르렀다더군. 그곳에서 해동래와 사흘 밤낮을 싸우더니 신비로운 법보로 해동래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이레 동안 채찍질했대. 허허, 내가 보기에는 이 남투성에 곧 새로운 주인이 생길 것 같아.”
청색 옷을 입은 노인은 ‘신비로운 법보’라는 소리에 살짝 움찔했다.
“무슨 상관이겠나? 난 직접 그 흉악한 자를 봤어. 그때 그 자가 끌고 다니던 시체는 적어도 1천 구는 됐지. 하늘을 뒤덮을 듯 빽빽하게 매달린 시체들이 끌려가는 모습이란… 한데 그자도 꽤나 밝히는 것 같더군. 옆에 예쁜 여자 한 명을 끼고 있던데?”
옆에 앉아 있던 동그란 얼굴의 수련자가 웃으며 말했다.
“좀 조용히 해. 그자가 다루는 술법은 그 극악무도한 사주술이래. 게다가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것도 싫어한대. 그러니 목숨이 아깝다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걸?”
냉랭한 얼굴의 청년 하나가 술을 한 잔 들이켜며 친구들을 꾸짖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청색 옷의 노인은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만마백일주살 영패가 걸려 있으니 며칠 못 살 거야. 머지않아 원영기 수준의 수련자들에게도 소문이 들어가게 될 테니까. 내가 만약 그 자라면 안전한 곳에 숨어서 백 일 동안 꿈쩍도 하지 않을 텐데…”
만마백일주살 영패라는 말에 청색 옷의 노인은 눈을 빛내며 오른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방금 말을 마친 청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그의 목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다.
“젊은이, 방금 말한 그 자에게 관심이 좀 가는데 좀 더 상세히 말해줄 수 있겠나?”
순간, 온 객잔이 고요해졌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 청색 옷을 입은 노인에게로 쏠렸다.
노인은 청년을 붙잡은 채 차가운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수련자들은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섬뜩해졌다.
어느 결단기 초기 수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리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잔뜩 놀란 눈빛을 하고 있는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느낌은 분명 원영기.’
노인은 시선을 거두고 손을 풀었다. 그에게 붙잡혀 있었던 청년의 목에는 새까맣게 눌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자세히 말해보게.”
노인은 평온한 표정으로 술을 따라 마시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청년은 감히 숨을 크게 들이마시지도 못했다. 축기 후기 수준에 불과한 그가 상대의 수준을 정확하게 꿰뚫어볼 수는 없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의 경험으로 상대가 적어도 결단기 중기 이상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름 전에 갑자기 나타난 자입니다. 투사파의 결단기 수련자 열 명을 연달아 죽이고 어째서인지 만마백일주살 영패에 의해 지정되어.”
청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청년의 말이 끝나자 노인은 눈을 살짝 감은 채 오른손을 흔들었다.
펑!
그러자 그 청년의 두 눈이 불거져 나오더니 곧 몸 전체가 터져나가며 피 안개로 변해버렸다. 그 순간 괴이한 바람이 불어 그 피 안개는 곧장 흩어졌다.
객잔 안의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으나, 감히 먼저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청색 옷의 노인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을 뜨더니 다시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한 결단기 초기 수련자를 주시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너, 이리 와.”
몸서리를 친 그 수련자는 와들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얼른 노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굉장히 공손한 태도로 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