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64
노인은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칠채계의 가장 깊은 산봉우리에 이른 상태였지만 이미 남색 화염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후였다. 그와 동시에 하늘을 가득 뒤덮은 천둥번개가 사방에서 노인의 원신을 향해 내리쳤다.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칠채계를 채운 불바다와 천둥번개가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두 개의 원이 수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남색 화염의 원과 천둥번개의 원이 중첩된 순간, 하늘과 땅이 진동했다.
칠채화(七彩花)
콰르릉!
경천동지할 소리가 세상을 뒤덮었고 칠채계는 다시 붕괴했다. 이 요란한 소리는 노인의 비명마저 뒤덮었고 남색 화염 기둥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 구름을 꿰뚫었다. 천둥번개가 이 기둥을 감싸고 있어, 서로 겹친 두 개의 기둥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칠채계 내의 다른 수련자들 또한 이 싸움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중 진천군과 청의의 노부인은 쇄열기 후기 수련자를 쓰러뜨린 한제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며 혹시 자신이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한 적은 없는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어떻게든 한제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운혼자만이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됐다.
“저자는 절대 날 살려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비록 강력하긴 하나 쇄열기 후기 수련자와 싸웠으니 중상을 피하지는 못했을 터! 이 기회에 저자를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칠채계는 내 것이 된다!”
사실 이런 생각 또한 그가 한제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나, 애써 이를 무시하며 운혼자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무렵, 화염과 천둥번개의 기둥이 느릿하게 흩어졌다. 그 안에 갇혀 있던 백발노인의 원신도 사라진 후였다. 노인이 죽기 전까지 애타게 찾던 존자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한데 그때, 한제는 체내에서 전의의 낙인이 진동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이 산봉우리에 어떤 존재가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이내 천천히 산봉우리 꼭대기의 동굴로 향했다. 그 앞에 서니 칠채계의 구석구석을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동굴 안에서 곡성(哭聲)이 들려왔다. 마치 수없이 많은 이들이 그 안에 갇혀 참기 힘든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태고의 성신, 우주 속을 부유하는 대전 안. 촛불은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아주 늙고 비쩍 마른 손가락이 느릿하게 거두어졌다.
“불이 알맞은 온도에 이르렀군. 그러나 이 불은 맞는 씨앗이 아니야. 아직 혼백이 달궈지지는 않았으니⋯⋯.”
늙은 목소리가 그 촛불 뒤쪽에서 여유롭게 흘러나왔다.
“가짜 봉멸족 하나가 죽었는데 원인으로 의심되는 것이 없단 말인가?”
냉랭한 목소리가 대꾸했다.
“의심할 게 뭐가 있겠는가? 도를 심으면 답을 알게 될 터. 그쪽이 더 재미있을 걸세. 미지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맛이 나는 것이니까. 기다림이 있어야 아름다운 맛을 볼 수 있는 법. 그러니 일단 이 불이 더 날뛰게 해야지.”
★ ★ ★
동굴을 바라보던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동굴의 입구에서 10척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른 순간, 칠채계의 하늘에 거대한 회오리가 하나 나타났다. 회오리에서는 윙윙 소리가 났는데 이 소리가 귀에 닿자마자 심신이 흐트러졌고 마음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 한 줄기가 솟아오르는 듯했다.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고개를 번쩍 쳐들고 회오리를 응시했다. 그 안에서 우주와 형용할 수 없는 대전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 순간, 한제는 통제할 수 없는 광기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칠채계의 일곱 가지 색깔이 진해지기 시작하더니 순간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한제의 몸이 칠채계의 근원이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무궁무진한 일곱 색채의 빛은 응집되어 한제의 체내로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순식간에 칠채계 내의 일곱 빛깔은 눈이 시릴 정도로 진해졌고 하늘을 뒤덮을 듯 진하고 강한 빛이 빠르게 강림했다.
계속해서 몰려드는 빛에 한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의 심신은 알 수 없는 힘에 단단히 붙잡힌 채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일곱 색채의 빛은 계속해서 그의 육신으로 달려들었다.
머지않아 칠채계의 모든 빛이 한제에게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칠채계의 가장자리는 빛을 잃고 어두워졌다.
한제 체내에는 일곱 색채의 빛이 몰려들면서 심신을 완전히 잠식했고 이에 광증이 솟구쳐 올랐다. 당시 청수가 보였던 것과 같은 광증이었다.
한제는 일그러진 얼굴에 핏줄이 잔뜩 돋아났으며, 두 눈이 붉게 충혈됐다.
“크아아아!”
한제의 입에서 흉수의 그것과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점점 많은 일곱 색채의 빛이 체내로 몰려들면서 한제는 몸을 덜덜 떨며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심신의 광증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광증은 점점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머리카락이 휘날렸으며, 두 눈은 점점 붉게 변했다. 지금의 그는 말 그대로 광인(狂人)이었다.
심신을 잃고 의식을 잃고 모든 기억을 잃은 한제에게 눈앞의 세상은 온통 핏빛이었고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살의뿐이었다. 모든 생령을 죽이고 세상까지도 죽여 버리겠다는 살의. 설령 이모완이 나타난다 해도 그녀를 죽여 버릴 것만 같은 살기였다.
그리고 이런 광기와 살의는 점점 짙어져갔다.
칠채계 일곱 색채의 빛 중 7할 정도는 이미 한제의 체내로 흘러들어, 칠채계의 절반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크아아아!”
살의로 가득한 포효와 함께 왼쪽 눈에서 화염이 분출되어 그의 온몸을 감쌌고 오른쪽 눈에서는 천둥번개가 발산되었다. 산봉우리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일곱 색채의 빛이 계속해서 한제에게로 흡수되면서 이제 칠채계는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한 올의 빛도 남기지 않고 한제에게 흡수된 빛은 광기로 바뀌어갔다.
“크아아!”
한제는 붉은 두 눈 가득 살의를 담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했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어두운 하늘의 소용돌이에서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들려오는 듯 진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염, 노화(怒火). 네 노화와 광기로 네 혼백을 익혀 나의 도를 심고 마지막 도념을 첨가할 것이다. 난 네가 나의 손가락을 태울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가능하겠느냐?”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와중에 한제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육신을 제외한 모든 것, 원신과 혼백 등은 한 줄기 붉은 빛이 튀어나오더니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서는 거대한 용암이 기포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검은 연기 사이로 수많은 쇠사슬에 매달린 비쩍 마른 유골들이 보였다. 사방에는 수많은 옥패들이 떠 있었는데 옥패마다 무궁무진한 도념이 봉인되어 있었다.
동굴 안에서 울리던 곡성은 바로 이 옥패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리 깊지 않아 어렴풋이 들여다보이는 용암의 바닥에는 갖가지 문양이 새겨진 채 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빛이 번쩍일 때마다 옥패들이 대량의 도념을 폭발시키며 용암 안으로 녹아들어 문양에 흡수되었다. 그러면 사슬에 묶인 유골들에서는 검은 액체가 방울방울 흘러나와 떨어졌고 그때마다 용암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한제의 원신과 혼백 등으로 이루어진 붉은 빛이 들어서자 모든 옥패가 무너져 내렸고 무궁무진한 도념들은 용암에 녹아들었다. 사슬에 묶인 유골들 역시 하나하나 터져나가면서 검은 액체가 되어 용암과 섞였다.
용암에서는 더욱 많은 기포가 끓어올랐고 요란한 폭발음이 울려 퍼지면서 용암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바닥의 문양도 녹아들어 상상을 초월하는 흡입력을 형성했다. 한제의 혼백 등으로 이루어진 붉은 빛 역시 빨려 들어갔다.
용암은 점점 더 빠르게 회전했다. 금방이라도 동굴을 관통하여 우주까지 닿을 듯한 기세였다.
★ ★ ★
수없이 많은 별들에 거대한 진이 하나 있었다. 그 크기가 연맹성역의 크기와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진이었다.
각각의 별들은 이 진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는데 진의 중심에는 각각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색의 꽃처럼 생긴 식물 일곱 개가 있었다. 크기는 1천 척에 달했다.
이곳의 우주는 바로 이 식물들 덕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거대한 진은 이 식물들에게 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했다.
성역과 수많은 수련성의 힘, 거기다 칠채계와 같은 온갖 균열들의 힘이 이 식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무궁무진한 도념을 흡수하고 양분을 만들어냈다.
이 성역은 어떤 존재가 신통술을 발휘해 봉계를 아우르는 진 위에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역은 커다란 진과 융합하여 봉계 안의 수련자가 죽을 때마다 그 도념을 진에 흡수해 양분으로 삼았다. 바로 도를 심는 것이었다.
이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이어져 온 일이었다. 상고 시대에는 봉계 선인들의 규칙을 양분으로 삼았고 원고 시대 수련자들에게서는 그들의 본원을 양분으로 삼았다.
그중 붉은 식물에는 한 구의 유골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이 유골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은 어스름한 검은 빛을 발산했고 이 빛은 곧장 식물에 흡수되었다.
피처럼 붉은 꽃에는 잎이 몇 개 남지 않은 상태였다. 남은 꽃잎들마저 모두 떨어질 때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될 터였다.
그때, 그 식물 근처의 우주에 한 가닥 균열이 일어나더니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와 꽃에 습수되었다. 한제의 영혼과 원신으로 이루어진 그 빛은 식물 안에 놓인 유골 옆에 나타났다.
양분을 모두 흡수한 붉은 꽃에서 남은 꽃잎이 모두 떨어졌다. 순간, 꽃이 기이하게 꿈틀거리더니 붉은 과실 하나가 맺히기 시작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식물 근처에 나타난 균열도 서서히 맞물렸다.
식물 안에서 한제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곳은 붉은 액체에 흠뻑 잠겨 있었는데 꽃 안에 있던 유골도 흩어지면서 자금색 빛이 되어 붉은 액체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1년, 10년, 20년, 40년⋯⋯
붉은 액체는 점점 줄어들면서 과실을 성장시키는 양분이 되었고 그 액체가 줄어듦에 따라 과실은 점점 커지고 단단해졌다.
어느새 98년이 흘렀다.
“일찍이 내게 물었지. 불이 내 손가락을 태우지는 않겠냐고. 이제야 답할 수 있게 되었군. 그럴 수 없네.”
우주 어딘가에서 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칠채화(七彩花)가 하나의 과실을 맺으려고 하는군. 나머지 여섯 개도 곧 과실을 맺게 될 거야. 난 당시 장존께 공겁의 경계를 마주하지 말고 수련을 끝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 네 번째 단계가 존재하는지 찾는 대신 기꺼이 그분의 붉은 식물을 돌보는 사람이 되었어. 그분의 천도 계획이 성공하게 될 날만을 기다리면서 말이야. 이제 머지않은 이 기다림도 끝날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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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제가 칠채계에 들어온 날로부터 99년이 지나 있었다.
그 기간, 연맹성역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사성종이 강력한 기세를 떨치며 수련 연맹에 남은 종파들을 쓸어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시음종까지 제압해 모든 세력을 끌어모아 나천성역에 저항했다.
시음종은 본래 전쟁에서 물러나 있다가 어부지리를 취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천성역이 침입해온 것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전쟁이 격렬해지기를 바랄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시체들이 생겨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바람을 깨뜨린 것은 청룡성황이었다. 그는 시음종 성역에 홀로 쳐들어가 수많은 장로를 죽이고 남은 왕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폐관수련을 하고 있던 종주, 즉 첫 번째 왕까지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