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68
노인은 쓴웃음을 짓더니 허상이 되어 흩어져 사라졌다.
한제의 표정은 한결 같이 덤덤했다.
노인이 흩어져 사라진 뒤 한제 뒤에서 천역주의 문은 다시 한번 빛을 발하며 빠르게 수축했고 이내 흐릿해지더니 천역주로 돌아왔다. 뒤이어 구슬은 한제의 원신을 데리고 멀리 질주하다가 성역에 균열을 만들어 그 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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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 년간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었던 칠채계의 깊은 산봉우리 위로 밝은 빛이 나타났다. 거의 동시에 흐릿한 인영 하나가 나타나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산봉우리 꼭대기에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한바탕 꿈인 것만 같군. 1백 년에 달하는 긴 꿈⋯⋯.”
인영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산꼭대기의 시체와 천천히 융합했다.
한참 뒤, 한제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체내에서는 펑, 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몸에 쌓여 있던 먼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1백 년간 잠들어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정열기 후기의 기운은 끊임없이 높아져 단숨에 절정에 이르더니 곧장 쇄열기를 향해 치솟았다.
칠채화에 들어 있던 도념과 힘은 어마어마했다. 그 대부분은 천역주가 흡수한 상태였지만 한제는 처음으로 천역주로부터 주도권을 가져와 그 양분의 일부를 빼앗은 상태였다.
한제의 머리가 사방으로 나부꼈다. 왼쪽 눈의 화염 낙인과 오른쪽 눈의 번개 낙인이 튀어나와 하나로 합쳐졌고 이윽고 그 안에서 전(戰) 자가 어렴풋이 나타났다. 지금껏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낙인이자 새로운 규칙이었다.
이 낙인은 한제의 미간에 떨어져 진실과 거짓의 도와 합쳐졌다.
잠시 후, 그의 미간에는 음양의 태극무늬 같은 도안도 나타나 서서히 회전하며 요사스러운 빛을 발했다. 낙인은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하나의 반점이 되어 미간 안으로 사라졌다.
고신의 반점과 매우 비슷한 이 규칙의 반점이 나타난 순간, 한제의 몸에서는 쇄열기 수준의 기운이 폭발했다. 그 강력한 기운에 하늘과 땅이 떨렸다.
한제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손을 들어 빠르게 결인을 그린 뒤 자신의 몸을 여러 번 두드렸다. 그렇게 수많은 봉인 금제를 드리웠고 그의 쇄열기 수준 기운은 서서히 금제들 아래로 감춰졌다.
“쇄열기 초기 절정에 이르기에 충분한 기운이지만 경지로 이루어진 규칙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응고시켰다가는 오히려 앞으로 수준을 올리는 데 해가 될 거야. 우선 봉인해두고 경지로 이루어진 규칙을 완전히 깨달은 뒤에 봉인을 풀면 내 수준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한제는 말하자면 정열기 절정과 쇄열기의 경계에 발을 반쯤 걸쳐놓은 상태였다. 여기에 고신의 육신과 자신의 모든 신통력 그리고 법보를 사용하면 쇄열기 절정 수준의 수련자와 맞붙을 수 있을 듯했다.
그의 미간에 숨겨진 반점이 번득이며 온몸에 짙은 전의를 드리웠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경지로 이루어진 규칙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한다는 증거였기에 한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슬슬 움직일 때군. 흡혈마수는 어떻게 지냈을까?”
한제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풍의 선계로 가야겠군. 그곳에서 대량의 흡혈마수를 거둬올 수 있다면 운해성역 신종에도 침입할 수 있을 터. 탁삼이 깨어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운혼자의 경외심
태고의 성신, 그 아득한 우주 속에서 탁삼은 멍하니 전방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분노로 가득한 표정에서는 싸늘한 분노를 읽어낼 수 있었다.
갖은 힘을 기울이고 반점까지 쏟아부어 가까스로 진을 열고 들어왔건만 이곳에서도 한제의 기운을 감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내에도 없고 계외에도 없는데 진에서는 그 녀석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진 안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인가? 녀석의 수준으로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대체 어디로 숨은 것이냐! 이한제, 내 언젠가 너를 찾아내 산채로 씹어먹겠다!
탁삼은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이어 저 멀리 성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존재를 느끼고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풀기 위해 그쪽으로 향했다.
한제는 고민에 잠긴 채 산봉우리 밖으로 나왔다. 이때 산봉우리 꼭대기의 균열과 빛이 사라져 칠채계는 다시 어둠에 잠긴 상태였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가 고개를 숙여 멀지 않은 산골짜기를 향해 덤덤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나와라!”
그 목소리에는 거절할 수 없는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산골짜기 안 동굴에 숨어 가부좌를 틀고 있던 운혼자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 사방에서 기겁할 만한 기운들이 튀어나와 예리한 칼날처럼 원신까지 꿰뚫는 듯했다. 온몸을 뒤덮듯 나타난 남색 화염과 그 안의 천둥번개에 운혼자는 창백하게 질린 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보다 그를 두렵게 한 것은 마음속에서 솟구친 광기 어린 전의였다. 그 전의는 그의 몸을 단단히 봉한 상태라 원신이 불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이 정도로 강해졌단 말인가!’
운혼자는 머뭇거림 없이 곧장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제를 올려다 본 순간, 운혼자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이 순간, 마치 온 세상이 상대의 손바닥에 든 것만 같았다. 자신 역시 그 손바닥 위에 있어 도망치기는커녕 자신의 삶과 죽음이 그에게 달려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제는 냉랭한 눈으로 운혼자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검지로 허공을 가리켰다. 그 순간, 한 줄기 기이한 낙인이 나타나 운혼자를 향해 느릿하게 날아갔다.
워낙 천천히 다가왔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수월하게 피할 수 있을 듯했으나, 운혼자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만약 자신이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곧장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천천히 다가오는 낙인을 바라보았다. 심신은 몸부림치듯 꿈틀거렸지만 결국 그는 저항을 포기했다.
낙인이 찍힌 순간, 운혼자의 체내에서 피어올랐던 남색 화염과 천둥번개, 그리고 원신에 나타난 기이한 전의가 미간에 응집되어 낙인과 합쳐졌다. 낙인은 뒤이어 몇 번 반짝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운혼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공손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찍힌 낙인이 생사를 통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한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눈치챘다. 살아서 노예가 되든지 죽어서 혼백이 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의미였다.
“우리가 칠채계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운혼자는 씁쓸함과 상대의 놀라운 수준에 대한 놀람이 뒤섞인 심정으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99년이 지났습니다.”
그 말에 한제는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매우 놀란 상태였다.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지났단 말인가⋯⋯.”
잠시 후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이동했다. 운혼자도 얼른 뒤를 따랐다.
수준이 높아진 덕에 이전보다 한층 빨라진 한제는 곧 사마묵의 산골짜기에 이르게 됐다.
이전에 칠채계를 뒤덮었던 불바다와 천둥번개에는 한제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기에 이곳만큼은 완벽하게 보존된 상태였다.
한제가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서자 운혼자는 공손한 자세로 그 바깥에 멈춰 섰다. 주인인 한제의 분부가 없는 한 그는 감히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설 수 없었다.
산골짜기 안에 들어선 순간, 한제는 어떤 위기감을 느꼈다.
“탁삼이 이미 빠져나왔구나!”
그는 눈을 번득이며 곧장 첫 번째 동굴로 향했다. 그 안에서 신식을 펼쳐 주위를 살피던 그는 곧 약간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동굴에 걸린 수많은 금제 속의 원정들은 이미 가루가 된 상태였고 그 안에 있던 흉수들의 혼도 흩어져 사라진 상태였다. 흡혈마수는 알 같은 무언가로 싸인 채 바닥에 놓여 있었는데 매우 허약해진 상태였다.
한제의 신식이 드리운 순간, 흡혈마수는 곧장 두 눈을 번쩍 떴다. 흐릿한 두 눈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허나 녀석은 원정이 부족한 탓에 완전히 탈변하지 못해서인지 알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한제는 그런 녀석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그는 동굴로 들어가 저물공간에서 원정을 꺼내 흡혈마수의 사방에 둘러놓았다. 그 순간 짙은 원력이 몰려들었고 흡혈마수는 빠르게 탈변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진천군을 데려와라. 아직 살아 있을 것이다!”
한제가 신식을 통해 명을 내리자 운혼자는 공손하게 답한 뒤 사라졌다.
한편, 진천군은 1백 년 전부터 한 동굴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의 심정은 무척 복잡했다.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희망을 잃고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삶을 되새기곤 했다.
“스승님과 사형들은 9급 성역의 전장에서 흉수들과 싸우고 있겠지. 나도 그곳에 있어야 했는데⋯⋯ 이곳에 와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1백 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보내면서 그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한제가 깨어난 순간, 어둠에 잠겨 있던 이곳에 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이에 조바심이 난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굴을 빠져나가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가 돌아온 건가!”
잠시 후, 멀리서 빛 한 줄기가 나타나더니 다가왔다. 진천군은 긴장했으나 피하지 않고 기다렸다.
어느덧 진천군 앞에 도착한 빛에서는 운혼자는 모습을 드러냈다.
“진 도우, 오랜만이군. 주인님께서 부르시네. 함께 가세.”
“주인님?”
진천군은 흠칫 놀랐으나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운혼자를 따라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사마묵의 산골짜기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한제의 기운을 느낀 진천군은 살짝 몸을 떨었다.
“진 도우, 어서 오게.”
한제의 목소리에 진천군은 사양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 형, 오랜만일세.”
1백 년의 기다림이 마침내 끝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진천군은 좀처럼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그간 원정은 많이 모았나?”
한제의 물음에 진천군은 대답 대신 저물공간에서 저물대를 하나 꺼내 한제에게 건넸다.
신식으로 저물대를 살핀 한제는 짧은 말만 남긴 채 동굴로 들어갔다.
“기다리게. 이곳에서 내보내주지.”
진천군이 백여 년을 기다려온 말이었다. 그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 저 어두운 하늘도 그에게는 어느 때보다 밝고 맑아 보였다.
“드디어 나가는구나!”
첫 번째 동굴로 들어간 한제는 저물대를 열었다.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원정이 있었다. 진천군이 착실히 원정을 수집해온 듯했다.
한제는 저물대의 원정을 모두 꺼내 금제의 사방에 배치했다. 이전에 꺼내둔 원정은 이미 모든 원력을 흡수당해 재가 된 상태라 새것으로 갈아준 것이다.
원정과 특수한 수단을 활용한 1백 년간의 제련은 흡혈마수를 성공적으로 탈변시키기에 충분했다. 원력이 끊임없이 흘러듦에 따라 녀석의 몸에서 돌던 보랏빛은 흩어져 사라졌고 이내 어렴풋한 금빛이 나타났다.
“캬오오오!”
모든 원정의 7할 정도를 사용했을 때, 흡혈마수는 하늘을 뒤흔들 듯 우렁찬 포효를 내지르며 알에서 발버둥을 쳤다. 동시에 예리한 주둥이를 알에 찔러 넣고는 그 안에 담긴 것을 쪽 빨아먹었다.
이윽고 풀려난 옅은 금색의 흡혈마수는 환호하며 한제의 곁을 맴도는 한편 거대하고 예리한 주둥이를 비벼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