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76
“곧 더 많은 흉수가 당도할 것이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떠나는 것은 파천종을 욕보이는 짓임을 모르겠느냐!”
목소리가 싸늘하게 변하고 그 안에 살기까지 담겼으나, 이천매는 들은 척도 않고 대전 밖으로 나갔다.
“한 발짝이라고 더 움직였다가는 모반의 죄로 다스릴 것이다!”
이천매는 우뚝 멈춰 서서 잠시 침묵하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3개월… 딱 3개월입니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찌 이리 고집이 센 것이냐? 몰려드는 흉수들을 막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더냐?”
목소리에서는 이제 분노도 느껴졌다.
“그렇습니다.”
이천매는 걸음도 멈추지 않은 채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전 안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굳건하다면 옥패를 줄 테니 전송진으로 이동해라.”
이어서 한 줄기 부드러운 빛이 뻗어 나가더니 이천매의 손에 떨어졌다. 목소리에서는 더 이상 한기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천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더니 다시 걸음을 옮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1백 년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귀원종의 분종 대회를 돕기 위해서라면 오지 않을까?”
★ ★ ★
운해성역, 안개 속을 표류하는 어느 황량한 대륙. 그곳에는 모든 생령이 꽁꽁 얼어붙을 것처럼 짙은 한기가 맴돌았다.
그 대륙의 동쪽 산봉우리의 동굴 안에는 모은미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수시로 동굴 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눈에는 고독과 외로움이 짙게 묻어났다.
그녀의 부상은 심각해 금방 회복하기는 힘들었다. 다행히 그녀는 운해성역에 왔을 때 오직 성녀만이 가질 수 있는 옥패를 던져두었다. 그래서 그녀는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좌선을 하면서 모은미는 자신의 삶을 되새겼다.
무척 건조한 삶이었다. 거의 일생을 곤허경에서 머물렀던 그녀에게 그나마 즐거웠던 일은 분신들이 겪은 경험이었다.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분신들의 삶을 상기하곤 했다.
류미는 그런 분신들 중 가장 특수한 존재였다. 모은미는 마치 당사자가 된 것처럼 류미가 겪은 일들을 살피다 점점 그 안에 빠져들었고 가끔은 자신이 류미인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류미의 삶을 살피다 보면 원신은 눈물을 흘리곤 했다. 물론 그것은 실체를 갖춘 눈물이 아니라 마음이 느끼는 고통일 뿐이었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부드러운 목소리가 동굴 밖에서 흘러들어 심신에 떨어졌다.
“곤허의 성녀 모은미 사저십니까?”
모은미는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이런 상황을 예견한 듯 놀라지는 않았다.
“들어오게.”
모은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동굴 밖에서 담황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들어왔다. 모은미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모은미를 바라보며 사과하듯 말했다.
“옥패를 받고 스승님께서는 직접 찾아 나서고자 하셨지만 뜻밖의 일이 생겨 제게 모은미 사저를 신종으로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이비선이라 합니다.”
“이가⋯⋯.”
모은미의 눈에 순간적으로 쓸쓸함이 스쳐갔으나,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겠네.”
이비선은 단약들을 꺼내 들며 가볍게 웃었다.
“모 사저는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분은 처음 봅니다.”
모은미는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사저, 신종으로 가시면 마침 진행 중인 저희 운해성역 8급 종파의 시합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가는 도중에 보시는 것도 좋겠지요. 오랜만의 외출이라 곧바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네요.”
모은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8급 성역의 의식에는 8급 성역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제자가 이 행사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자기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풍의 선계에 들어가고자 그 경계 밖에 모여 있는 수련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었다. 그들 중 각 종파의 핵심 제자는 없었지만 수준은 결코 낮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인 오운래는 정열기 후기 절정의 수련자로 이곳에서 은근히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의 낭창한 몸과 청의가 잘 어울렸고 칼날처럼 날렵한 눈썹과 냉랭한 눈이 무척 용맹해 보였다.
그와 일행들은 안개를 뚫고 나타난 백발의 수련자를 바라보았다.
오운래의 표정 역시 미묘하게 변했다.
이내 다른 자들은 관심을 접고 시선을 돌렸지만 오운래만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상대에게서 기이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풍의 선계의 균열을 바라보던 한제의 눈빛이 일순간 번득였다.
‘한 달이 걸렸군.’
균열은 모든 것을 삼키는 거대한 입처럼 음산한 기운을 풍겼고 선기도 어렴풋이 흘렀다. 아주 옅었지만 한제는 그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열 명이 넘는 수련자들을 지나쳐 간 한제는 균열 안으로 신식을 뻗었다. 신식은 끝없는 구멍으로 들어선 것처럼 빠르게 흩어져 사라졌다.
하지만 신식이 흩어지기 직전, 한제는 그 너머의 광경을 짧게나마 확인했다. 노란 빛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다.
붉은 흡혈마수를 모으다
구슬픈 소리를 내는 바람이 온 세상을 뒤덮은 것 같았다. 대지에도 하늘에도 광풍(狂風)이 몰아쳤다.
균열에 삼켜지고 남은 신식이 그 바람에 부서진 순간, 한제는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뒤에 선 10여 명의 수련자 중 하나가 비웃듯 말했다.
“어디서 온 자인지는 모르나 감히 균열 안으로 신식을 뻗다니. 그랬다가 무슨 결과가 나타날지 안다면 절대 못 할 멍청한 짓이지.”
목소리의 주인공과 일행은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한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기보다는 좀 전의 행동이 허무맹랑해 보였던 것이다.
그들 중 무리를 형성하지 않는 이들은 없었고 신식도 균열 안에 완전히 진입한 뒤에나 조심스레 펼쳤다. 그러지 않으면 균열에 가로막힌 신식은 선계의 바람에 파괴되기 때문이다. 각 종파의 수준 높은 수련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오운래 역시 소리 없이 웃더니 몇 걸음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했다.
“풍의 선계에는 처음 와보는 모양이군. 이곳에서 신식을 펼칠 때는 신중해야 하네. 몇 명만 더 모이면 풍의 선계에 들어갈 생각인데 괜찮다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어떻겠나? 그 편이 훨씬 안전할 테니까.”
한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덤덤히 균열만을 바라보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툭 내뱉었다.
“필요 없네.”
말을 마친 그는 천천히 균열로 향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혼자 들어가려는 모양인데?”
“기껏 오 형이 선심을 써줬건만 저리 막무가내로 나오다니⋯⋯.”
오운래는 굳은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제는 균열로 다가갔고 금방이라도 진입할 것만 같았다.
한데 그때, 한제가 우뚝 멈춰 서더니 바짝 졸아든 눈으로 다급하게 수백 척 물러났다.
그리고 사방의 수련자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균열 안에서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뒤덮을 듯 강력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뒤이어 허공의 균열에서 붉은 안개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캬오오!”
그 순간, 붉은 안개 너머에서는 낮은 포효와 함께 줄기줄기 붉은 빛이 번득이며 1천 척에 이르는 붉은 흡혈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뒤덮은 털과 거대한 주둥이, 그리고 원고 시대를 방불케 하는 흉악한 기운… 그야말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1백 마리가 넘는 흡혈마수들이 나타나자 표정이 급변한 오운래가 크게 외쳤다.
“흡혈마수들이다! 어서 후퇴해!”
수련자들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수준으로는 이렇게 많은 흡혈마수를 도저히 상대할 수 없었다.
“제천향(祭天香)!”
오운래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동시에 그의 오른손에는 팔뚝 굵기의 검은 향이 소환되었고 불이 붙자 기이한 향기가 짙게 퍼져 나갔다. 정신을 차린 10여 명의 수련자들도 모두 그 향을 꺼내 불을 붙였다. 눈 깜짝할 사이 주위는 기이한 향으로 가득 찼다.
이는 흡혈마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향으로 녀석들은 우뚝 멈춰 선 채 분노한 듯 포효했다.
그때, 오운래 곁에서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던 한 청년 수련자가 멍하니 내뱉었다.
“저⋯⋯ 저게 뭐지?”
수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들의 눈빛은 이내 당황과 놀라움이 뒤섞였다.
그곳에서는 백의의 수련자 하나가 흡혈마수들 사이를 자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사내가 옅은 금빛을 발하는 흡혈마수 위에 올라탄 상태로 지나갈 때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붉은 흡혈마수들은 포악한 기세를 거두었고 심지어 길을 내주었다. 마치 깊은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실 붉은 흡혈마수들은 백의의 사내가 아니라 그가 타고 있는 옅은 금색의 흡혈마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으나, 수련자들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흡혈마수들은 그렇게 대형을 이룬 채 풍의 선계 균열 밖으로 흘러나오는 붉은 안개를 향해 이동했다.
이 기이한 광경에 수련자들은 반쯤 넋이 나갔다. 균열 밖으로 쏟아져 나온 흡혈마수들이 마치 저 백의의 청년을 영접하러 나온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